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라 Mar 19. 2024

벗는 남자 그리는 여자

  갑작스런 특강과 예정된 강의가 겹쳐 글을 완성치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기다리시는 분도 계시기에 2020년에 썼던 이 글을 올립니다. 특강 주제가 <여성과 미술>이어서 강의안 준비하며 이 글이 생각났네요. 느루가 구원투수(^^)가 되어주기를요.


  지난 12월, 송년회 & 오디오 북 축하 행사 때 느루를 보신 분도 계시지요? 글에서만 접했던 느루를 실제로 봐서 좋았다는 말씀 기억납니다. 느루가 한참 시험공부 중입니다. 1차를 넘기고 2차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결과를 기다릴 뿐입니다. 글구  '혹시나...'하고 브런치 들어오시는 분들이 기다리기 지루하실까 죄송한 마음으로 올립니다. 글도 서둘러 보겠습니다. 


    <벗는 남자 그리는 여자>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사무실이 밀집한 아케이드의 깔끔한 일식집. 방은 정갈했고 벽에는 일본 특유의 가는 선과 긴 눈꼬리를 강조한 여인이 등을 드러낸 판화가 있었어. 친구가 오지 않네. 컵과 물수건을 들고 온 종업원의 틀어 올린 머리에 나무 잎사귀 모양의 핀이 찔려 있었어. "아, 저 핀은..." 조금 전 골목길에서 선명히 깜빡이던 붉은 담뱃불 위에 흔들리던 핀이구나. 스물이 갓 되었을까. 앳된 그녀는 밝고 화사한 웃음으로 인사한 다음 메뉴판을 놓고 나갔어. 


  느루야, 엄마가 술 좋아하는 거 알지? 두고 간 메뉴판에서 회를 고르고, 맛난 술을 시키려고 훑어보다 새삼스러운 곳에 눈길이 머물렀단다. 이런저런 술 이름이 적혀있는 메뉴판 위에 여인들이 한 명씩 누워 있더구나. 과장을 좀 보태면 가슴은 축구공만 하고 엉덩이는 농구공만 한 글래머들이었어. 누워 있으니 키는 알 수 없지만 얼굴은 주먹만 했지? 8등신의 섹시한 미인들이 잔뜩 허리를 틀고 술잔을 들어 cheers 하고 있었어. 그 여인들의 뜨거운 응원으로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될는지, 술이 취하지 않게 되려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엄마는 그냥 우습더라고. 그건 실재 하는 여자의 몸이 아니라 남자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여자의 몸이었거든. 남자들은 이런 여자를 상상하는구나 하는 느낌에 피식 웃음이 나왔어. 아마 그 메뉴판의 여인들은 우리 시대 미의 기준을 대변한 이상형의 몸이었을 거야. 마치 실제 인간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완벽한 미를 구현하려고, 차가운 대리석을 다듬어 인체를 조각한 그리스인들처럼.  친구를 기다리며 슬며시 이 그림이 생각났단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실비아 슬레이 <터키탕, 1973>


  무척 재미있는 그림이지? 실비아 슬레이(Sylvis Sleigh, 1916~2010)의 <터키탕>이라는 작품이야. 남자 여섯 명이 화면에 가득 차 있어. 모두 벌거벗었구나. 가운데 앉은 남자는 정면을 바라보며 무릎을 굻고 있네. 벽에 기대고 서서 비스듬한 시선으로 화면 밖을 바라보는 남자도 있어. 오른쪽에는 쿠션에 기대어 있는 대머리 아저씨도 있구나. 눈빛 작렬인걸. 화면 앞, 왼쪽에 기타를 치는 남자를 봐. 엉덩이에 팬티 자국이 하애. 해변에서 물놀이하며 한바탕 그을린 모양이지. 모두 현실감이 가득한 털털한 아저씨들이야. 가슴에도 성기에도 까만 털이 잔뜩 있어. 그런데 누드화 특유의 에로틱함이 없네,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니? 


  <터키탕>이라는 작품명만 들어도 바로 떠 오르는 그림이 있지? 맞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탕>이. 한번 나란히 비교해 볼까?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터키탕>

  

  실비아 슬레이가 앵그르의 그림을 패러디했다는 것을 단박 알 수 있지. 앵그르의 작품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이 머리에 터번을 둘러 오리엔탈 분위기를 강조했다면 슬러거의 작품에서는 뒷배경의 양탄자 무늬가 이국적인 뉘앙스를 풍겨주지. 또 화면 앞을 구성하고 있는 여섯 명의 여인들의 구도가 비슷해. 악기를 연주하는 뒷모습의 여인이 있고 벌거벗은 여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지. 하지만 자세는 몹시 선정적이야. 가슴이 강조되도록 두 팔을 올린다던가, 서로 가슴과 어깨를 껴안고 있다던가 하는 에로틱한 자세지. 뒤편에 여인은 마치 발레를 하는 듯 몸을 움직여 아름다운 여인의 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게다가 둥근 프레임으로 그린 그림은 마치 열쇠 구멍으로 하렘을 훔쳐보는 듯한 은밀함까지 더하여 준단다. 어때? 이 그림, 아름다웠니? 어색하지는 않고?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과 앵그르의 그림은 왜 이리 다른 걸까? 우리가 실비아 슬레이의 그림이 낯선 건 누드라고 하면 으레 여자의 벗은 몸이 연상되기 때문이야. 그것도 팔등신의 균형 잡힌 우아한 몸매의 여자. 고대 그리스에서 깎고 다듬었던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은 중세에 숨죽였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금 부활한단다. 그런데 고대와는 다르게 르네상스 시기 이후의 누드란 거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그렸어. 그리스에서는 남자 누드만 있었거든. 그리스인들은 남자의 육체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인식했구나. 그리스 시대에 남자 누드 조각상이 많았던 이유지. 그들에게 육체와 정신은 하나였고 육체의 완벽함이 정신의 완벽함이었어. 그래서 올림픽 경기를 할 때에도 선수들은 나체로 승부를 가렸지. 그들은 완벽하고 이상적인 인간의 육체를 구체화하려고 노력했어. 얼굴은 신장의 1/10, 머리는 1/8, 가슴 넓이는 1/4 이런 식이었지. 지금의 성형외과에서 활용하는 인체 비례는 이곳이 출발점이 아닐까?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살롱전 당선작


  이 그림은 1863년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야. 나폴레옹 3세가 사들인 살롱전 당선작이란다. 마네가 출품해 떨어졌던 그 살롱전이지.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포르노 그라피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은데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제목만으로 이 작품은 신화를 다룬 예술작품이 되었지. 여자의 누드를 보는 400여 년에 걸친 남성 중심의 시선을 이 한 작품으로 알 수 있어. 


누드화는 사회가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와 사회적 권력을 갖게 된 남자의 관점으로 고정화되기 시작했단다. 누드가 갖는 관능성 때문이었지. 여자 누드화가 압도적인 것도 그림을 주문하고 구입하고 감상하는 대다수가 남자였기 때문이야. 남자들은 '예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여자의 누드를 맘껏 감상할 수 있었지. 남자는 욕망하고 소비하는 주체였고, 자연히 여자들은 성적 매력을 가진 타율적인 존재로 그려졌어. 성차별이 깊숙이 뿌리내렸어. 남자로 대변되는 권력의 주체가 보는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여자의 누드, 사회적인 지배와 권력이 인간의 신체에 깃들기 시작했단다. 미(美)는 막대한 프리미엄을 남성에게 쥐어주며 정신세계에서 육체의 세계로 이사했지. 


  누드를 그리는 전통적 방식이 폐기되었던 건 20세기 초, 다다이스트의 혁신 때문이야. 다다이스트들은 기존의 권위적이고 제도적인 것을 부정했거든.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 광활하고 거칠 것 없는 예술을 실험했어. 미술의 지각변동은 남성 중심의 시선을 바꾸기 시작했지. 게다가 세계대전 후 여자의 사회적 지위도 달라졌어. 드디어 보수적인 누드화의 역사에 도전하는 센 언니들이 등장했단다. 실비아 슬레이는 이상적 아름다움을 그리는 누드화를 공격하지. 르느와르의 피부와 루벤스의 근육은 거짓이라고 말해. 그녀가 꼼꼼히 벗긴 다른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자. 


실비아 슬레이 <Paul Rosano's Image>


   붉은 천을 씌운 소파 위에 한 남자가 기대고 있어.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이지. 에로티시즘은 포르노 그라피와 구별돼. 에로티시즘이 생의 근원적인 에너지와 성의 건강한 충동이라면 포르노 그라피는 성적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기에 천박하고 노골적이라고 규정했어. 그래서 전통적 회화에서 누드를 그릴 때 치모(恥毛)는 그리지 않았단다. 그녀는 체모와 거친 피부를 있는 그대로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여자들의 도자기 같은 피부와 남자들의 늠름한 자세의 환상을 깼어. 그녀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인간의 몸을 그렸어. 세계를 구하는 영웅들의 '식스 팩'도, 강철을 휘게 하는 이두박근도, 지폐를 세는 우아한 손가락도, 지적이고 사색적인 고상함도, 관능적인 페니스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몸. 노동하고 땀 흘리고 걷고 슬퍼하고 상처 입고 달리고 주저앉고 껴안고 섹스하는 몸을 그렸지. 아프고 늙고 시들어가는 실존의 몸이야. 


  실비아 슬레이는 오랜 세월, 여자의 누드에서 성적 판타지를 요구했던 폭력의 시선을 거두라고 말했어. "내가 볼 때 여성은 모욕적인 포즈로 성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나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품위와 휴머니즘을 갖춘 지적이고 사려 깊은 모습으로 그리고 싶다. 아직도 미술에서는 남녀가 평등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지. 그녀는 '벗는 여자와 그리는 남자'라는 미술계의 오랜 선입견도 깨려고 노력했어. 그녀는 쉴 새 없이 그렸단다.


실비아 슬레이 <누워있는 필립 골럽>

  

 느루야, 나체와 누드의 차이는 알고 있니? 영국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나체(Naked)는 '벗은 것'이라고 했지. 생물학적으로 알몸이야. 누드(Nude)는 '벗겨진 것', '무언가로 다시 생성된 몸'이야. 인간의 상상력을 덧씌운 육체지. 그러므로 누드란 일종의 또 다른 옷이기도 하지. 그래서 예술가들은 누드 작업을 하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찾아낸단다. 등을 보이고 있는 누드의 남자를 보며 화가가 찾는 건 무엇이었을까? 아직은 밑줄 그어진 '자아'라는 단어였을까? 허상을 버린 땀 흘리고 오그라드는 피부였을까?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를 패러디한 작품이야. 벨라스케스는 낭만주의 시대의 화가야. 스페인의 바로크를 대표하는 걸출한 인물이지. 화가는 가톨릭의 숨 막히는 교리 속에서도 1650년, 눈부신 비너스의 등을 그린단다. 벨라스케스가 활동하던 17세기는 신화나 성경에서 인물을 빌려와 누드를 그렸어. 어떤 때는 육감적이고 풍요롭게, 어떤 때는 날씬하고 가녀리게 그렸지만 그녀들은 모두 과거, 화려한 금박 장정에 귀한 돌가루에서 빻은 염료로 채색된 신화 속의 여인들이었지. 아름다운 여신들은 잠시 올림포스의 정원이 그려진 페이지에서 걸어 나와 고대의 황홀한 풍경을 상상하는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지. 비너스가 그녀의 얇고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벗고 침대에 누우면 수많은 남자들은 그 앞을 떠나지 못했어.  


벨라스케스 <거울 앞의 비너스>


  지나치게 아름다워 서였을까? 그녀는 끔찍한 일을 당했어. 그녀의 등은 날카로운 칼로 일곱 군데나 찔렸어. 피투성이가 되었지. 그녀를 찌른 사람은 메리 리처드슨이라는 여자야. 1914년은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이 활발했던 때였는데 여성의 선거 참정권을 주장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구속 위기에 처했단다. 이에 분개한 열렬 지지자 리처드슨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거울 앞의 비너스>를 훼손한 거지. 그리곤 이렇게 기자회견 때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신화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비너스를 찔렀다. 팽크허스트는 비너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현대사의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지도자다. 팽크허스트를 상하게 한 영국 정부에 거세게 항의한다."




  이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은 선거권을 획득했어. 1928년에는 모든 여성들이 남성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획득했지. 늘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남자를 유혹하기만 하던 비너스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자의 편에 섰던 단 한 번의 사건이었지. 물론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말이야. 다행히 복원 전문가를 통해 상처는 나았다는구나. 


  비너스가 상징하는 관능적인 여성성이 피투성이가 되고 나서야. 여자의 몸은 늘어지고 주름진 실제의 몸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단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고, 자신의 발로 꿈을 향해 달리는 육체의 주인이 되었지. 남자의 몸도 여자의 몸도 실존의 육체란다. 수학적인 비율과 계량적인 조화로는 나타낼 수 없는, 도무지 베낄 수 없는 신의 작품이지. 화가란, 그런 신의 작품을 손의 기억을 통해 드러내는 이야기꾼들이야. 친구를 기다리다 보니 생각이 여기까지 왔구나.

  

  친구가 많이 늦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어. 그런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해졌어. '어서 당장 일어나.' 하는 소리는 친구의 목소리로구나. 방 문을 열고 나가보니 친구가 나무 잎사귀 머리핀을 한 종업원의 손목을 잡아당기고 있었어. 느루야, 엄만 깜짝 놀랐단다. "누가 너더러 이 곳에서 알바 하랬니?" 친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하고 당황한 얼굴로 그 종업원의 손을 놓고 그냥 나가버렸단다. 


  엄마는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겨 택시 정거장으로 갔어. 친구도, 친구의 딸도 몹시 걱정이 되었지. 연인 사이로 보이는 젊은 대학생 뒤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어. 그런데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둘이 안고 뽀뽀하고 쓰다듬는 애정행각에 엄만 고갤 들지 못하겠더라. 택시에 올라타니 친구의 딸도, 젊은 대학생도 다 내 아들, 딸 또래니 나도 모르게 심란한 마음이 새어 나오더라고. 


  "기사님, 요새 젊은 친구들은 아무데서나 저리 안고 뽀뽀해요?" 

  "댁의 아이는 안 그럴 것 같죠. 택시기사 20년인데, 정말 자식은 모르는 겁니다." 

  "오 마이 갓!!!"


PS : 영화 <서프러제트> 편집 영상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별을 향해 달린 이상주의자의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