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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Mar 25. 2024

알 수 없는 인생

상상농담 44. 하랄드 슬롯 뮬러 <봄>

  느루는 배구를 좋아합니다. 결혼도 배구선수랑 한다고 하니까요. 전 농구를 좋아합니다. 오렌지색 공이 통통 튀면, 삶의 무거움이 바닥에서 아무리 옷깃을 잡아당겨도 "흥, 네 까짓 게" 하는 듯한 생명의 당당하고 매서운 눈초리를 보는 듯합니다. 가끔은 형상 없는 생각들이 경기장을 슝슝 날아다니다 제 가슴팍으로 직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날 밤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한 나만의 질문을 꺼내보기도 합니다. 언젠가 대답을 할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요. 게다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인데도 기가 막히게 골이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공이 선수의 손 끝을 막 떠나 환상적인 포물선을 그릴 때, 아름다움은 절정에 달합니다. 선수의 땀은 경기장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공은 아주 먼 곳을 향해, 아아... 보란 듯이, 거침없이 골대를 향해 날아갑니다.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농구장 안에서 만큼은 -삶은 real입니다. 물론 노안이 들어 작은 공은 보기 힘들다는 말은 세상이 아는 비밀입니다만......


  봄이 기다려지는 건 농구공처럼 바닥에서 생명이 솟구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오늘은 덴마크 화가 하랄드 슬롯 뮬러(Harald Slott Moller, 1864~1937)의 <봄, 1901>을 함께 보실까요? 


하랄드 슬롯 뮬러 <봄, 1901>


  얇고 따스한 석양이 피렌체 북쪽의 피에솔레(Fiesole) 산 너머로 살며시 내려앉고 있습니다. 빛이 주는 보드라움이 화면 전체를 다독입니다. 빛은 구릉을 다 포섭하고는 살금살금 두 연인의 테이블로 다가오는군요.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는 것인가요? 식사라고 하기엔 테이블이 너무 단출합니다. 물과 약간의 샐러드, 레몬과 소금, 후추병, 그리고 식초와 기름이 있습니다. 아, 짚으로 감싼 커다란 와인이 있네요. 와인병을 보니 끼안티 와인이군요. 이 지방에서는 주로 산지오베제 품종을 재배한다고 합니다.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라틴어로 '주피터의 피'라는 뜻이라지요. 와인을 '신의 물방울'이라고 하니 주피터(제우스)의 피가 맞나 봅니다. 


  여인이 와인 한 잔을 권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눈은 깊고 어둡고 얼굴은 붉다 못해 검습니다. 얼굴을 괴고 있는 흰 손과 대조적입니다. 남자의 손은 농부의 손이 아닙니다. 그의 새끼손가락엔 사제로서의 소명을 약속한 인장 반지가 끼어 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그의 옷은 검고 그의 뒤면엔 석양이 내려앉은 붉고 흰 교회가 보입니다. 오로지 신만을 바라보겠다는 신과의 약속에 대한 갈등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나 봅니다. 저 오른손은 얼마나 고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요. 





  여인에게 오늘은 촉감이 다른 빛과 바람입니다. 그녀의 맞은편에 사랑하는 이가 앉아 있으니까요. 그녀의 하얀 드레스는 흰 테이블보와 잘 어울립니다. 그녀 앞에는 생명의 파란색 접시와 물이 놓여 있고 그녀의 뒤편엔 붉은 열매가 달린 탐스런 나무가 있습니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 목걸이, 발그레한 볼과 치아가 드러난 입술, 우아하게 내민 와인 잔을 보세요. 벗어날 길 없는 기쁨과 열정의 강렬한 눈빛을 보세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 없습니다. 화가는 얄궂게도 남자와 그녀를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 우리에게 무언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무시하고 싶지만 그녀가 붉은 포도주에 봄을 담아 버렸습니다. 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때이지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봄'


  남자가 저 포도주를 마실까요? 어쩌면 그는 밤새 턱을 괴고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밤, 열기에 가득 찬 여인이 마침 자리를 비운다면 제가 살며시 앉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끼안티 와인이 있다면, 하루하루 도전과 실패와 교만과 비겁과 이해와 고립과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맨 몸뚱이의 실체로서 그와 더불어 한 잔 하겠습니다. 그가 나이 든 여인의 흐린 시력과 어둔 귀에 편안함을 느낄지도, 전 가슴으로 직진한 농구공을 골대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름답고 우아하고 열정에 가득 찬 여인이 돌아오기 전, 이 시도 들려주겠습니다. 


    <진정한 여행>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PS : 제가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 가사를 너무 좋아해요. 오늘 가볍게 들어보세요. 흐린 오늘도 좋은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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