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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l 16. 2024

7월, 달력에 걸터앉아

상상농담 49. 신윤복 <연당의 여인>

  앓는 소리를 내며 7월을 맞았습니다. 불안에 굽은 손가락으로 달력을 뒤적입니다. 어수선한 마음을 진정시킬 겸, 숲을 이룬 숫자들 사이로 느긋한 산책을 해 볼 요량이었거든요.


  보드라운 꽃잎이 차갑고 냉정한 겨울을 어루만졌을까요. 매몰찬 바람에도 동백, 매화, 수선화, 산수유가 피었고, 사람들의 희망찬 호들갑 사이로 어김없이 진달래, 목련, 벚꽃, 앵초, 프리지어, 라일락도 찾아왔었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엔 튤립, 금낭화, 은방울, 철쭉, 장미가 몸매와 향기를 뽐내었고, '그리움'이라는 꽃말을 지닌 능소화, 치자, 라벤더의 6월엔 지층마다 향기가 가득했네요. 달력의 시간과 꽃들의 세상은 조화로웠고 일목요연했습니다.


  책상에 앉아 훌쩍 일 년의 반을 보낸 지금, 꽃들과는 달리 시간과 저는 삐그덕거렸나 봅니다. 꽃들이 피고 지는 동안 사나운 분노는 없었으나 깊은 이해로 끄덕이는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수다스러움을 피했다고 해서 친밀한 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바삐 걸었지만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군데군데 말라죽고 쓰러진 숫자 너머로 7월이 보입니다. 달력에 걸터앉아 7월의 꽃을 봅니다. 신윤복(申潤福, 1758~1814 추정)의 <연당의 여인, 1805>입니다.



신윤복 <연당의 여인, 1805>

  

  널따랗고 풍성한 연잎이 흐드러진 후원엔 여름 한낮의 정적이 머뭅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어쩐 일인지 툇마루에 여인이 앉았습니다. 높고 풍성히 얹은머리에 한 손엔 생황을 다른 한 손에 장죽을 들었네요. 생황은 간신의 소리라고 할 만큼 윤기 나고 부드러운 음색을 지닌, 국악기 중 유일한 화음악기입니다. 거문고, 가야금, 비파처럼 예악을 숭상한 사대부들의 악기는 아니었지요. 게다가 장죽은 '상사초'라는 별명으로 불리거나 '정신과 기력을 쇠잔하게 하는 요사스런 풀'이라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필요한 물건입니다. 헤벌어진 다리 품새와 생황과 장죽을 든 행태로 보아 사대부집 여인이 아님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기녀(妓女), 간신히 주청(酒廳)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기녀입니다.  


  한물 간 그녀는 연당(蓮塘) 앞에 앉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여린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신윤복은 그녀의 눈길을 화면 밖으로 밀었습니다. 연당 너머에 입이라도 맞춰보고 싶었던 그 서생이 있는 걸까요?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때문일까요? 신윤복은 때로 봉오리 지고 때로 활짝 핀 연꽃 앞에 그녀를 둠으로 삶의 간난(艱難)을 지나온 여인의 애수(哀愁)를 기막히게 표현합니다. 그는 한순간의 실수도 돌이킬 수 없는 비단에 그녀의 비틀거리는 시간들을 번역했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농담(濃淡), 담백하고 진솔한 구성입니다. 그의 붓은 삶을 흘기거나 넘보지 않고 그저 그렸습니다. 위로할 줄 아는 신윤복의 탁월한 언어를 절절한 마음으로 읽습니다. 연꽃을 디디며 그녀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나란히 앉아 그녀가 생황을 불고 춤을 추었던 자리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흥겨운 가락과 선비들의 시가 어우러졌던 젊은 날, 연당의 풍류를 들려주었습니다.


김홍도 <하화청정, 18세기>


  "예로부터 꽃 중의 왕은 모란이지요. 설총의 '화왕계(花王戒)'에 화왕으로 등장했으니 천년의 제왕입니다. 풍요로움과 고귀함, 부귀영화의 상징이지요. 모란이 피고 나면 이어 작약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꽃 중의 재상, 화상(花相)은 작약으로 볼 밖에요. 품계로 치자면 한 급수 아래 입니다만 '앉으면 모란, 서면 작약'이라는 말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지요. 그럼 '꽃 중의 군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녀는 양 볼을 부풀려 장죽을 힘껏 빨고는 "후우"하고 내뱉었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흩어졌습니다. 그녀는 담배통을 댓돌에 툭툭 치더니 대답 없는 절 향해 말했습니다.


  "저 연(蓮)이랍니다. 선비들은 연을 사랑했지요. 송대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라는 학자가 애련설(愛蓮說, 연꽃을 사랑하노라)을 지었다고 하지요.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이제염오 離諸染汚), 물이 연잎에 닿으면 굴러 떨어질 뿐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 악이 다가와도 머물지 못하고(불여악구 不與惡俱),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가 사라져 그윽한 향기가 남고(계향충만 戒香充滿), 대가 부드러워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으니 세상의 외압에 꺾이지 않을 것(유연불삽 柔軟不澁)이라며 열 가지의 사랑하는 이유를 들었답니다. 그러니 선비들이 군자의 덕목을 지닌 꽃으로 애지중지했지요."


  교육을 받아 지식이 있었고 예술적 소양을 길렀던 조선의 기생, 그녀의 눈동자는 연꽃 가득한 연당이 되었습니다. 한창때의 옛 생각으로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는 곧 말을 이었습니다.


  "또 연에는 연밥이라고도 하는 연과(蓮顆)가 있지요. 선비님들은 과거를 보았답니다. 세상으로 나가야 했으니까요. 무관이 될 것이 아니라면 모두 문과를 보았는데 문과는 소과와 대과에 합격해야만 했습니다. 연과(蓮顆)는 연과(連科, 이을 연(連), 과정 과(科))와 소리가 똑같아 소과와 대과에 연이어 합격하라는 축수(祝手)의 의미를 담고 있었어요. 단원의 <하화청정, 18세기>도 그리 그려진 것입니다. 벗들이 모여 시를 짓기도 하고, 밀랍을 녹여 윤회매(輪廻梅)를 만들기도 하고, 먹으로 난을 치기도 했지만 모두의 마음속에는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려는 포부가 있었지요. 마음에 그늘이 생길 때마다 혹은 흥이 돋을 때마다 저희를 불러 노래를 청하곤 했습니다."


공주 정안천 생태공원의 연꽃


   전 다시금 신윤복의 그녀를 보았습니다. 생황과 장죽을 든 쓸쓸한 조선의 예인(藝人)의 목은 쉬었고 눈썹은 옅어 도망간 시간이 무엇을 가져갔는지 그리고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가늠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공주에서 본 연꽃이 떠올랐습니다. 호수 가득 펼쳐진 연잎 사이사이 가느다란 꽃대가 힘껏 봉오리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자 꽃대가 살짝 누었다 곧장 다시 꼿꼿이 일어섰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의연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 무거운 하늘은 낮게 낮게 내려오며 호수를 협박했지만 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들을 피웠습니다. 물 위에 뜬 꽃밭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없이 내리는 장맛비가 호수를 휘젓고 봉오리를 후려 치고 연잎을 누를 텐데도 움츠리는 기색 하나 없었습니다.


  일 년의 반을 지나는 7월에 열 가지의 덕을 지닌 연꽃을 피운 건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따뜻함일까요? 지난 모든 것들은 다 "괜찮다"라고. 다만 이제 가슴이 팔딱팔딱 뛰는 시간을 가지라고, 평범을 가장한 게으름의 협박에 의연하게 맞서라고, 알지 못해 불안한 시간이 다가오더라도 맑은 정(情)과 그윽한 향(香)과 부드러운 기(氣)를 담아 걸으라는 그런 말씀이었을까요? 대답 대신 깨달음을 기다립니다.


  달력을 다시 펼쳐 숫자의 숲 사이에 연당을 둡니다. 일상(日常)에서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시간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이 순환하는 것이라지요. 앓는 7월이 회복의 7월이 되기를 소망하며 천천히 숲을 빠져나왔습니다.



PS : 왠지 '꿈', '열정'하면 10대나 20대의 소유 같습니다. 50대에도 60대에도 '꿈'과 '열정'을 가질 수 있겠지요. 오늘 아침 이 영상을 여섯 번쯤 봅니다. 희망을 잃을 때라도 꿈(열정)을 절대 식히지 말라고 노래하네요. 일년의 절반이 지났지만 년초에 꿈꾸었던 일들을 향해 멈추지 마시기를!


영화 <발레리나> OST, 'You Know It's About You' 입니다.



맞는 말인 거 아시죠. 그 내용은 모두 머릿속에 있어요.

그러니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세요.

당신이 꾸었던 꿈이 맞았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당신이 이(힘)들을 만들어 냅니다.

마음속에 느껴지면 크게 노래해.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그러니 크게 노래해.

모두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은 알아야 해요. 넌 할 수 있어.

그래서 내가 이 노래를 썼나 봐.

너에 관한 노래란 걸 알잖아. 항상 너에 대한 노래야.  

   

희망을 잃을 때라도 꿈(열정)을 절대 식히지 마.

기분 알아. 넌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은 어지러워. 머리는 어지러워.

하지만 때로는 믿는 것이 전부입니다.

마음속으로 느낀다면 크게 노래해 보세요.

당신이 누구인지 알겠어요. 그러니 노래해 보세요. 시끄럽게.   

  

네 차에서 재생 중이라면 돌리지 마.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크게 노래해 보세요

마음속으로 느낀다면 그것이 당신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내가 이 노래를 쓴 이유인 것 같아요

당신에 관한 거라는 걸 알잖아요. 항상 당신에 관한 거예요

희망을 잃어도 꿈을 식히지 마세요.

(자막이 없어 혹시 불편하실까봐 아래 붙입니다. 중복가사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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