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마 Jul 23. 2020

인권의 시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개성을 강조하지만 반대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은 부족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믿고 따르며, 자신의 가치로 여깁니다. 이는 교육과 사회화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결혼하고, 아파트 분양받고 소형차에서 중형차로 늘려가고. 이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칠 때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며 만족해합니다. 자신이 이루어 가는 속도가 남보다 조금 더 빠를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교우위에서 오는 더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기 스스로가 자기만족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수동적인 가치의 받아들임이 아닌, 능동적인 가치의 개발이 필요합니다. 이는 목표나 성취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고,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달성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면, 목표나 결론을 생각하고 일을 하기보다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성공과 명예가 따라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삶과 일 자체를 즐기는 것이 그들이 잘하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즐기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물리치고,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은 인권의 프로세스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에서보다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 에릭 프롬의 소유가 아닌 존재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아닐까 합니다.  


    

인권도 목표나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합니다. 인권에서는 목표도 인권적이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이 인권적이어야 합니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찍고 퓰리처상을 받은 기자도, 국제 구호단체들의 자극적인 기부금품 후원 광고도 ‘빈곤 포르노’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권이 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적 이상형이 아닙니다. 그러한 국가는 현실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인권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유토피아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과정에서 공정하고 차별받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더 어려운 일일수 있습니다. 차라리 자로 잰듯한 절대적 기준이라도 있으면 속이라도 편하겠는데 공정과 차별이라는 것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 정확히 구현해내기가 어렵습니다. 인권적 관점에서 판사의 판결은 문제 삼을 수 없지만, 판사의 반말은 인격 침해가 될 수 있습니다. 기초수급권자가 되고 안 되고 보다는 기초수급권자가 되는 과정에서의 무시와 괄시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새로운 가치, 남과 다른 가치를 창조하려면 기존의 관점에서 일탈하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시각과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는 통상 ‘인권 감수성’으로 일컬어지는 인권적 접근법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권적 관점, 즉 남다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곧 인권의 가치가 됩니다.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과정을 새로운 가치로 여기는 것.     



어떠한 인위적인 결과나 목표가 아닌, 인권적인 방법이나 과정에 집중하다 보면 생기는 것이 인권의 가치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인권을 결과나 목표, 혹은 수단으로 생각하여 돈벌이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적인 사회는 인권적인 과정에 충실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고, 투쟁할 일이 있으면 투쟁할 수 있습니다. 사회를 인권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항상 즐겁고 평안한 일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인권을 즐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경제성이나 효율성, 효과성을 따지지 않는 것에서 인권은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저출산 시대의 책임을 묻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