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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마 Aug 16. 2020

우리로 인한 인권, 동시에 우리로 인하지 않은 인권

사회학 공부의 기초 by 앨런 존슨, 유유 출판사

      

• 앨런 존슨이 말하는 사회적 이슈     

저자에 의하면 사회학 이슈는 불평등과 차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종, 성, 성적 지향, 다른 여러 형태의 특권과 권력, 차별 등에서 오는 딜레마입니다. 이는 사회적 삶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또한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이자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차이(차별)는 특권의 근거가 되고, 이 특권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의 문제에서부터 생사의 결정까지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삶, 공동체의 기초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높은 계층에 대해 분노하거나, 자기주장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앨런 존슨은 말합니다.           


• 내가 말하는 인권과 사회     

사람들은 흔히 인권 하면 개인주의를 떠올리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권은 공동체주의에 더 가깝습니다. 만약 무인도에 나 혼자 있다면 거기에는 내 인권을 침해할 타인도 내가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제공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비로소 인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권은 그 시작부터가 공동체와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인권 수준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의식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잘되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공이고, 안 되는 것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운으로 치부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가난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스스로 경제적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 상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자아를 평가할 수 있는 과학적 능력이 갖추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고, 스스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진다.      


그러나 개인을 바라보고 자아를 인식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기보다는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면 인권은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조주의 철학이 언어와 무의식을 통해 주체의 무기력을 증명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택을 개인이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도 개인이 온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선택할 때 한정된 선택지를 주는 것이 사회이고, 그 결과를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때 도움을 주는 것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그 사회와 공동체에게 개인의 권리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내 선택과 결과가 온전히 내게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그 선택과 결과에 관여한 사회와 공동체가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내 권리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동일한 의무(권리보장)가 있는 것입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누구에게 외칩니까? 내 친구, 가족, 동료에게 외칩니다. 사회와 공동체에 외치는 것입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는 나 또한 다른 누군가의 권리에 대해 대상이자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주체인 동시에 대상(객체)이 될 수 있는 것이 인권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 앨런 존슨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앨런 존슨은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숲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숲과 나무, 그들의 연결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인권도 숲과 나무의 연결점에서 발생하고, 이루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개인이 사회에서 살면서 그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내가 사는 사회의 가치와 문화를 습득하고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남성우월주의나 학력에 의한 차별 등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학력의 남성 관리자로서 내가 차별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거나 물건을 살 때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이라는 단어가 붙은 상품을 고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본다는 것, 내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회 시스템의 일정한 곳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적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방식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앨런 존슨의 말처럼 우리로 인한 것이며동시에 우리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말하는 진리라는 것도 단지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통하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차별과 불평등은 비교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이 어떤 면에서 어떻게 다르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은 차이이지만, 여기에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고, 높낮이를 두고, 서열화할 때 발생하는 것이 차별과 불평등입니다.           



• 그래서 앨런 존슨의 관점을 인권에 도입시키면          

내가 비인권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거나, 인권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최소한 사법적 질서를 지키고 있다면 아마 인권침해를 하거나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권적이지 못한 이유를 나 자신,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의해 교육받아왔고, 양육되어왔으며, 그런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사회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면 그 사회를 만든 것은 결국 나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선택은 우리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상대적으로 저울질하게 합니다. 선택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입니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때 내가 선택하는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내가 선택하는 가치는 내게서 나온 것인가? 내가 의대를 선택할지 법대를 선택할지는 내 가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가치는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닌 사회에서 습득된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내게서 비롯된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 옷 한 벌 안 가지고 오듯이 내가 태어날 때 나의 가치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속한 사회에서 내가 가진 가치가 형성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사회가 내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것은 특정한 시스템에서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배운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해온 것은 4가지 답 중에서 하나만 고를 수 있고 그 외의 답은 생각할 수 조차 없습니다. 그 4가지 답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택도 내 마음대로, 그 선택지도 내 의지가 반영되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을 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듯 주어지는 선택의 가지들은 일정한 가치에 의해 서열이 매겨집니다. 서열과 가치가 부여된 선택은 이제 차이가 아니 차별이 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치가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 냅니다.           



•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따라서 인권적 관점이란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먼저 의심을 하고 보는 것입니다. 비판적 태도로 임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사회와 가치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적 요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회의 가치와 기존의 의미들이 마치 절대적인 것 마냥 믿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스템 속에서 살지만 또한 그 시스템을 분석할 수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믿고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스템이 유일한 시스템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에서 현대의 인권이 시작됩니다. 마치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을 때에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인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라는 집단의식에서 낙오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우리’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이들에게 가해지는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와 같지도 않은, 우리가 지키는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질적인 이들을 우리가 왜 보호하고 배려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인권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시스템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아웃사이더로 만드는 것에 맞서는 것이 인권입니다.      


누군가가 가난하다는 것은 게으름 같은 개인의 특성이나 능력 부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시스템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빈곤이란 사회의 부를 사회의 가치에 따라 배분한 후 남는, 또는 모자라는 한쪽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다행히 빈곤에 속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고, 동시에 언제든 나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와 불공평한 시스템이지만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이런 자본주의 시스템이 하나의 시스템이 아닌 절대적인 신과 같은 개념으로 우리에게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신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섬김에 있어 전혀 의심이 없는 사회. 그 신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밀려나 빈곤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까 전전긍긍하고, 그나마 빈곤을 마주친 이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래서 ‘천만다행’이라는 미덕으로 우리의 현실을 덮을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을 보면서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낙오된 이들을 보면서 시스템을 재구조화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권은 시스템, 그리고 사회의 주류와 거기서 나온 가치관과의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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