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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 Mar 29. 2024

오늘이라도 세상이 멸망하면 좋겠다.

천둥벌거숭이의 고백

중학교 1학년. 빳빳한 블라우스가 새로 산 교복임을 증명하던, 아직 꽃샘추위도 채 가지 않았던 날의 역사 수업이었다. 4대 문명의 마지막 파트였나? 인더스 문명에 대해 배우면서 선생님이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인도사람들은 파괴와 멸망의 신 시바를 좋아한단다."



그렇다, 선생님은 갓 중학생이 된 천둥벌거숭이들의 웃음코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늘부터 힌두교로 개종하겠다며 장난치며 소란스럽던 교실의 풍경이 그려진다. 너무도 친숙하고도 강렬한 이름 탓일까. 이 말의 의미를 묻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뭐 대충 전쟁 때문에 멸망의 신을 좋아하나 보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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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나이 때가 제일 재밌고 행복했는데"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첫 회사에 들어갔을 때 만났던 조대리님은 젊음을 부러워했고 그리워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던 터라 어딜 가던 막내였기에 젊음을 그리워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지겹게 들어야만 했다.


"저는 재밌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얼른 삼십 대가 되고 싶어요"


이유가 뭐였더라? 조대리님은 대답을 듣고 눈물을 흘렸었다. 우신 이유를 알려주셨던 것 같긴 한데 기억나지 않는 것 보니 크게 와닿지는 않았나 보다.




조금 더 능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학교 밖 청소년을 선택했고 검정고시를 응시했다. 또 중국유학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록금을 모았다. HSK 5급도 취득했으며 중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메이크업도 전문적으로 배웠다. (중국인 친구가 대학시절 스냅사진 + 메이크업으로 용돈벌이를 했다며, 한국뷰티가 인기가 많으니 준비해 가라고 조언해 주었음)


비 오는 날 와이탄의 야경






경제적인 문제로 유학을 접고 나니 모든 것이 문제 투성이었다. 당장 이력서만 해도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중퇴, 고졸 검정고시 합격이다. 머릿속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였다. 혼자서도 잘 걸어왔다 생각했는데… 내 삶이 인생 최대의 난제가 되어버렸다.


당장 증명해야만 했다.

남들은 대학 졸업으로 증명되는 2~4년의 시간을, 남들만큼 치열했던 노력을,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자격을.






증명하는 이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또 지겨워서 얼른 삼십 대가 되고 싶었다. 그냥 그즈음이면 자리 잡은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지 않을까? '노력했으니까 마땅히 보상받았을 거야' 어리석은 꿈을 꿨다.



내 나이 스물여덟.

이제는 안다. 밑바닥에서 몇 층 더 올라와도 바닥임을. 학력이 한 줄 더 추가되었고 취득한 자격증은 양손으로 셀 수 없을 개수가 되었다. 지금의 이력서는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여전히 난제를 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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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도 힌두교 할래요."

천둥벌거숭이들의 시끄럽게 날뛰는 교실의 풍경이 그려진다.


힌두교의 신, 시바



시바.


현실의 고통을 끝내줄 멸망.

세상을 멸망시켜 줄 구원자, 그들이 시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은 분명하다. 또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 자신한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이라도 세상이 멸망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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