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꿈, 공부!
<9살 내 인생>
그렇게 8살이 지나고 9살에 접어들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자녀들이 8살이 되면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농사일이나 길쌈으로 모시를 짜야하는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느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나의 집에서 5리(2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장항 시내에는 일본 학교가 있었다.
그 당시는 농사를 지으셨지만, 본래 뼈대 있는 집안의 선비셨던 아버지는, '일본식 교육으로 친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서 거기는 갈 수 없었다.
내가 보내달라고 부탁해도 단번에 거절하셨다. 일본 말도 안 가르치고 사용하지도 못하게 하실 정도였다. 아버지의 굳은 애국하는 절개를 존경했던 나로서는 그냥 순종하며 살았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선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교에라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사실 20리(8km) 떨어진 먼 곳에는 외갓집에서 세운 한국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못 보내준다고 하셨다. 나름 이유는 있었다.
고개 넘어 학교 가는 길목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 '아이들을 붙잡아 가고 때론 잡아먹기도 한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항상 나돌았다.
그 소문 때문이었다.
내가 사고당할까 봐 염려하시는 부모님 마음 때문이라, 때 부리지도 않고 8살 때를 참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던 그 해, 마침 나라에서는 늦어도 9살까지는 받아줄 테니 학교에 다 보내라는 유예기간을 주었다.
모시를 짜며 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집안일을 거들어드리며 지내던 나는, 친구가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웠고 나도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 동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왔다. 나를 학교에 보내라는 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 안 들어가면, 이젠 못 들어간다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너무나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늘 부모님께 순종하며 살던 나는 결심을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께 '학교 다니게 해 달라'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우리 자매들을 항상 곱게 옷을 지어 입히며 귀하게 기르셨고, 아버지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라 꼭 보내주실 줄 알았다.
그러나, 국민학교 입학 마감 시기에도 부모님이 나를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나의 좌절은 너무나 컸다.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하루는 정말 죽을 마음으로 마을에 있는 수리조합 저수지에 갔다. 그저 가만히 물을 내려다보았다.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얼마나 지났던지, 마침 물에 비친 내 모습 위로 물장구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새끼들도 나타나 엄마 뒤를 따라 바쁘게 뱅뱅 돌며 다녔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물장구 엄마가 새끼들을 보살피며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가운데에 있던 엄마가 물 바깥쪽으로 나갔다. 새끼들도 쪼르르 뒤따라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이런 감동이 밀려왔다. '
'물장구도 엄마가 새끼들을 사랑해서 저렇게 보살피며 함께 살아가는구나!,
나의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시니, 학교에 다니지 못하더라도 부모님께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물장구 가족처럼 나도 부모님과 함께 잘 살아야겠다!.'
<15세의 희망>
이렇게 배움에 대한 갈증을 마음 깊이 묻어두고 내색도 하지 않고 지내다 15살에 해방이 되었다. 그때, 우연히 한 중학교 선생님이 밤마다 야학당을 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밤마다 그곳을 찾아가 두 달 동안 어머니 몰래 열심히 한글을 공부했다. 너무나 재밌고 희망에 부풀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배우고 또 복습했다. 모시를 짜면서 몰래몰래 책을 보며 글을 익혀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알게 된 어머니가 야학에서 받은 내 하나뿐인 소중한 책을 아궁이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그 책은 전 과목이 다 들어있는 두툼한 책이었다. 그러고는 모시 길쌈이나 하라고 해서 서럽게 울며 결국은 학업을 접게 되었다.
그 아픔이 아직도 가슴에 시리게 저려오곤 한다. 9살 때 학교에 못 다니게 되었던 때보다, 이 사건이 더 슬픈 일이었다. 한글을 배울 때 어려운 받침을 다 못 배우고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 살면서 가장 불편했고 일평생 안타까웠다.
그 일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눈물이 나곤 한다.
그래도 한 번도 어머니께 원망이나 불평을 한 적이 없다.
< 마무리 >
다행히 어머니는 훗날, 30대 후반에 세 아이의 엄마이자 훌륭한 사업가의 아내가 되어있는 나에게 "정말 미안했다"라고 깊은 후회의 고백을 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13일을 함께 지내는 동안에, 천식으로 눕지도 못하고 침구 위에 엎드려 계시면서, 매일 나에게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셨다.
나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의 어머니의 유언을, 몸을 구부려 내 귀를 어머니 입에 바짝 대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다.
아쉬움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은, 그래도 이때 배운 짧지만 진한 공부가, 예수님 만나고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귀중한 기초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들릴 듯 말 듯 한 13일간의 유언이 나의 상처를 치유했고 굽이진 삶을 기쁨으로 묵묵히 살아내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
#아버지와의 농사일 추억 자서전 no3 https://brunch.co.kr/@ma-fe/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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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