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23세의 한복 기술자
23세에 나는 장로님 댁의 수양딸 겸 한복 입주 기술자로 취직했다.
2년 반 동안 성실히 한복을 만들고, 같이 교회에 다니며 가족처럼 지냈다.
처음엔 한복을 만들었는데 긴장을 해서인지 손에 땀이 나서 일을 그만두고 귀향하려고 했다.
<한복에 금박 찍는 기술자가 되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이 막 시작된, 한복에 금박을 찍는 일을 해보았는데 내가 아주 잘했다.
그 후엔 한복에 금박 찍는 일감이 밀려들어 그 집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었다.
금박을 찍는다는 것은, 주로 한복의 치마 끝단이나 저고리 소매 가장자리 등에 한자로 목숨 수자나 복 복자 등을 도장으로 찍고 그 위에 금박 가루나 은박 가루를 곱고 정교하게 뿌려 한복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나의 한복사랑>
나는 어려서부터 한복을 좋아했다. 그리고 직접 만들고 싶어 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바느질과 농사일 등을 돕는 부부가 아래채에 같이 살았다.
그 아내는 살림과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가 만든 한복으로 딸 넷을 곱게 단장해 큰집에 데려가곤 했다.
어머니가 직접 바느질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12살쯤에 내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내 한복 저고리를 곰곰이 살펴보다가, 하나하나 뜯어서 다시 본래대로 꿰매놓았다. 그럴듯했다!
그 후엔 자신이 생겨 막내 여동생 저고리를 만들었다. 내 손으로 처음 만든 저고리였다.
그때는 한복을 입다가 더러워지면, 조각조각 솔기를 따라 뜯어서 세탁한 후 다시 이어 붙이는 작업을 했다. 여동생 저고리도 빨아둔 조각들을 내가 다시 이어 만든 것이다.
나는 눈썰미가 있었다. 그렇게 한복 만드는 걸 스스로 배워 하나하나 만들었다.
내 한복은 내가 다 만들어 입고 다녔다.
그러다 드디어 14살 해방되기 전해에, 그 어렵다는 남자 두루마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두루마기를 만들어 드린 것이다! 그날, 아버지는 정말로 기뻐하셨다.
아버지의 두루마기에는 우리 부녀의 추억이 진하게 배어있다.
당신 저고리로 나를 받은 태몽은 물론이고, 당신의 두루마기 안에 넣어 안고 다니던 딸이, 커서 직접 두루마기를 만들어 드렸으니! 얼마나 기특했을까!
나는 그때까지 한복을 만들어 돈을 벌어볼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니게 된 교회에, 내가 지은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나의 솜씨를 알아본 목사님이 나를 한복 기술자로 지인에게 소개한 것이다.
그렇게 한복 기술자가 되어 부산에 왔다가, 이젠 금박 찍는 기술자가 되었다.
(금박 찍는 일, 그리고)
그 작업은 우리나라에 그 당시 처음 유행이 시작되어 나에게도 낯선 작업이었다. 그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조금만 잘못 뿌려도 한복을 망치게 된다. 그러니 초 긴장상태로 작업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가루가 날려 피부가 가렵거나 눈이 불편하기도 한 힘든 작업이었다.
매달 받는 봉급은 소개하신 목사님을 통해 고향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그 당시 나의 근무 환경은
평일 새벽기도와 주일에 교회 다녀오는 일 외의 외출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나의 기술이 유출될까 염려하여서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의뢰한 손님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성심껏 한복에 금박 찍는 일을 했다.
또 저녁엔 그 집 며느리와 주방일 하는 아이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평일엔 새벽 기도를 다니며 일이 끝난 밤에는 늦게까지 성경을 읽었다.
나의 믿음은 점점 깊어져갔다.
(달러! 시련? 평생 잊지 못할 일! )
그렇게 2년 반쯤 지난 어느 날, 많은 일을 맡아 신이 난 장로님이 나에게 일감을 잔뜩 주고 갔다. 나는 금박 찍을 한복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학 갈 딸이 미국에서 입을 파티복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총 3벌 반의 화려하고 폭이 큰 멋진 옷 들이었다. 여기에 금박과 은박을 찍어놓으면 얼마나 멋질까를 상상하며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잘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다짐으로 다가와 정성껏 일했다.
드디어 마지막 옷에 금박을 찍고 말리려고 옷걸이에 옷을 걸었다
그때, 그동안 그렇게 여러 번 뒤적였어도 없었던 봉투가 하나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한복 저고리의 소매에 끼어있었던 것 같았다. 지폐와 동전이 함께 있었는데 전부 달러였다.
그 순간 나는 오직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에게 도둑질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엄히 가르치셨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에 들어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가르쳤다.
나는 누가 '달러가 떨어진 한복'을 맡겼는지 몰랐다. 그래서 먼저, 친하게 지내던 나보다 몇 살 많은 그 집 며느리를 불렀다.
"언니, 꼭 직접 돌려줘야 돼!"라고 손가락을 걸며 약속하고 그 돈을 맡겼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돌려주지 않았고 자기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남편은 나에게 부엌칼을 들고 와 발설하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아버지인 장로에게도 말해서, 아버지는 매일 새벽 기도를 나와 같이 다녀온 후 나를 골방에 불러 23일간이나 취조하듯 말했다.
"이 돈을 처음 봤을 때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니? 솔직히 말해봐!"
나는 양심껏 똑같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저는 모르지만, 같은 교회 교인이라고 하시니 꼭 전해주세요!"
24일째 되던 날 아침, 그는 부인과 같이 나를 다시 불러 말했다.
"그녀는 이미 미국 가고 없으니, 공부 끝나고 4년 후에 돌아올 때 이 돈을 돌려주겠다. 여기 위 다락방에 매달아 두었다가 돌아오면 너도 불러 너 있는데서 꼭 돌려주마. 내가 약속할게"
나는 어이가 없어 애원하듯 말했다.
"그 사람에게는 지금 필요한 돈일 텐데 4년 후에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눈 가리고 야옹 하는 일입니다. 제발 지금 돌려주세요.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장로라면서 어찌 이렇게 행동한단 말인가? 기가 막히는구나!'
나는 그들의 생각이 확고하여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로 인해 수익이 많이 났던 그들은 나를 붙잡고 계속 일을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나갈 테니 차비로 쓸 만 원만 달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거절했다. 지금 가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집식구들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고 어서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승리!)
그날 아침 10시쯤 나는 교통비도 없이 무작정 그 집을 나왔다.
지금도 그때 내가 손해 보며 지켰던 양심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후회도 없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소문에 그 가족은 대가를 치른 것 같다.
나는 다시는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