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잃고... 예수님을 만나다.
15살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고향인 장항에서 공부 대신 모시를 짜며
가정 경제를 도왔다.
19세에 나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한없는 사랑을 베푸셨던 아버지가
사고로 늑막염을 얻게 되었다.
병원 치료 보다 민간요법을 더 신뢰하신 어머니의 주장으로, 내가 그리도 원했던 병원 치료 한 번 제대로 못 받으셨다.
어머니는 논 아홉 마지기를 팔아 이런저런 치료를 했지만, 아버지는 3년을 고생만 하시다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 내 온몸과 마음을 쓰러뜨릴 듯 밀려왔다.
< 6.25 한국 전쟁과 중선의 기적 >
다음 해 1950년. 내 나이 20살 6월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은 장항제련소를 목표로 군산에서 대포로 공중폭격을 해댔다.
그 대포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나는 그 소리에 크게 놀랐다. 그 후유증으로 나의 엄지손톱은 심한 생손 앓이를 했다. 그 손가락은 나았지만, 평생 아픈 손가락이 되어 나를 힘들게 했다.
또, 어쩌다 이웃 따라 외진 섬에 피난 가서 1년 반을 지내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던 중선 선장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고향인 장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중선- 조선 후기부터 1930년대까지 서해안 일대에서 사용한 조기잡이 어로선.
두 개의 돛과 하나의 노가 있고 바람으로 이동.
어부는 25~30명이 타고 그보다 크면 대선, 그보다 작으면 소선이라 함)
그 당시는 그 정도 큰 배에는 여자를 잘 태우지 않았던 풍습이 있어 배를 타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섬에 살던 할아버지 한 분이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 살 사람이 아니야."라며 나를 데려온 이웃들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때 마침 바람에 밀려 대피하러 그 섬에 온 중선 한 척이 정박했었다. 할아버지는 그 선장에게 부탁해서 나를 배에 태워주었다.
할아버지와 선장님!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는 기적 같은 일을 또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섬은 정말로 내가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때 내 나이 22살이었다.
< 예수님을 만나다 >
그 후, 고향에 돌아와 살던 어느 날, 어머니와 동생들은 외출하고 나는 어머니의 뜻대로 모시를 짜며 집에 혼자 있었다.
그때 마침 고향 근처 읍에 있는 한 교회의 사모님이 우리 집에 전도하러 오셨다.
그녀는 훗날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 박순천 여사의 친정어머니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나는 내가 직접 지은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목사님이 보고는 바느질 솜씨가 좋다고 그리도 칭찬을 하셨다.
그분의 딸은 부산에 피난 와 있던 국회에 근무 중이었다.
목사님은 딸을 통해, 부산 국제시장에서 부부가 한복 파는 가게를 하며, 집에서 한복 제작도 하는 교회 장로님을 소개해 주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