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앗! 꿈에 본 그 남자가 내 앞에!

결혼의 서사

by 남쪽열매

(광복동 금은방)

그 집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다니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있다가 저녁차로 장항에 가려고 광복동 길로 나섰다.


길을 가던 중 뜻밖에 근처에 있던 금은방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나를 여러 번 불렀다. 나는 놀라 뒤돌아보았다.


들어가 보니 그 아주머니와 남편이 같이 있었다.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의 부모로 노부부였다.


내가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는데, 그 길로 계속 가면 영도 다리 근처에 있는 술집과 홍등가로 가게 되어 위험할 것 같아서 서둘러 불러 세웠다고 했다.


부산에 와서 한복 금박기술자로 2년 반 넘게 살면서도, 교회만 갔다 왔다 했던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곳으로 갈 뻔했다.

나를 구해준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를 집으로 데려간 노부부는 나의 근심스러운 모습의 사정을 묻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대략적인 나의 이야기를 들은 남편 되는 분이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담! 내가 같이 가서 도와줄까요?"

나는 두 번 다시 그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알고 보니 그분은 나와 같은 파평 윤 씨였다. 그래서 나를 더욱 안타깝게 생각했다.

어수선하던 피난 시절 객지에서는 성만 같아도 그렇게 반가웠다.


그때, 그의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그 집에서 받은 봉급보다 더 줄 테니 내 한복을 수선해 줄래요?"

나는 그 집에서 한복을 수선해 주며 3개월을 머물렀다.

입주 한복 기술자로는 월 15000원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3개월 일하고 10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수선한 옷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2년 동안 입은 옷을 수선하고 손질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으니...


( 충무동 통조림 공장)

고향으로 가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부산에 더 머물게 되었다. 왜냐하면 충무동을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군 배급용 통조림 공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장 앞에서 장사하던 떡장사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나는 그 공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먼저, 한복 수선으로 벌은 돈 10만 원으로 대신동에 방을 얻고, 그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래위로 깨끗한 흰 가운을 입고 일하는 곳은 깡통에 햄을 담는 부서이다. 이곳 근무환경이 제일 좋아서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부서라고 했다.

나는 바로 그곳에 배정받았다.

매우 깔끔하고 엄격한 작업이었다.


기술 좋다는 평가도 받아 일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친구도 2명을 사귀어 친하게 지냈다.

그곳에서 8개월 동안 즐겁게 일했다.


(19살 순이)

그 시절, 독감으로 거의 죽게 된 19살 순이라는, 전라도에서 온 오갈 데 없는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불쌍한 마음에 나는 다다미 두 칸 반의 좁은 내 방에서 두 달 동안 그 아이와 같이 살았다.


주머니를 털어 아스피린 큰 통을 하나 사서 먹이며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출퇴근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곧 죽을 것 같던 그 아이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통조림 공장으로 데리고 갔다.


공장에 있는 직원용 식당에 근무하는 아주머니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따뜻한 식당 방에서 누룽지 끓인 거 라도 주어, 약 먹고 푹 잘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순이는 완전히 낫게 되었다. 그 후, 밤에는 나와 함께 내 집에서 자고, 낮에는 나와 같이 출근해서, 한 달 동안 그 식당에서 무료 봉사를 했다. 도와준 식당 아주머니에 대한 보답이었다.


(순이의 식모살이)

시간이 흘러 추석이 다가오자 나는 고향에 가족을 만나러 갔다. 순이에게는 열흘 후에 오겠다고 했다. 순이가 내 집에서 열흘 동안 먹을 양식을 다 챙겨놓고 나는 고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예정보다 10일을 더 머물다 오게 되었다. 와보니 양식이 떨어진 순이는 식모살이를 가고 없었다. 나는 서둘러 순이가 식모살이 간 집을 찾아갔다.


순이는 나를 보고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 집은 3대가 함께 사는 다복하고 부유한 집이었다. 그 집안 어른인 할머니는 순이에게서 내 말을 많이 들었다며 나를 무척 반기셨다.


그 할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나를 좋아하시며 며느리 삼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할머니 아들은 파평 윤 씨로 나와 동성동본이었다. 당시는 동성동본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어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맞선과 일주일 만의 결혼)

그 후, 그 할머니의 딸인 그 집의 여주인이

자기 오빠 친구를 나에게 소개했다.

군에 자원해서 복무했다가 5년 만에 막 제대한 그가 바로 나의 남편이 되었다.

선본 후 1주일 만에 나는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55년 9월에 25살인 충청도 아가씨와

30살의 제대한 지 10일 된 평양 청년이 부산에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남편이 거처가 없어 친구 집에서 자고 있던 터라 결혼을 서둘렀다. 남편이 나와의 새 거처를 마련했다.


(꿈)

나는 남편을 소개받기 전날, 꿈에 남편의 모습을 미리 보았다.

꿈에 나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손목에는 스위스제 커다란 금시계가 끼워있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서 놀라 빼려고 했다.

꿈에서 나는, 남의 것에 손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시던 무서운 어머니께 혼날 것이 겁이 났다.


그때, 모르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내가 주는 것이니 빼지 마시라요. 놀라지 말고, 걱정도 마시오"

그리고 꿈에서 깼다.


다음 날, 선을 보았는데 바로 꿈에 본 그 남자가 내 앞에 앉는 것이었다.


(긴 이야기)

남편은 그날 처음 만난 나에게 자신의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향인 평양에서의 생활, 피난 온 과정, 5년간의 군대 생활 이야기를. 그리고 전역 후에 친구네 단칸방에서 사흘 밤을 자게 된 이야기, 이틀 전에 그 친구와 사업을 시작한 이야기, 그리고 오늘 나를 만나러 나오기까지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하소연 같기도 했다.


그날 나는 오랜 군 생활로 검게 그을린 얼굴에, 키가 크고 코가 우뚝해서 외국인같이 보이는

이 사람이 그렇게 불쌍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솔직하고 진실한 말들이었다.


(청혼)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건을 말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다른 조건에는 관심 없소. 서로의 마음이 맞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내가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간다면 당신은 뒤에서 나를 밀어줄 수 있겠소?

그렇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소."


(결혼)

나는 그때 이 남자의 '리어카'를 밀어줄 마음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꿈에서처럼 이 남자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인연이구나.'라고 확신하고 결혼을 승낙하게 되었다!

단 한마디 "네!"라는 말로.



※그 후 53년을 함께 사시며, 우리 삼 남매를 키우고 해로하셨다.

17년 전에 83세의 일기로,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은 아버지는 노환으로 먼저 천국에 가셨다.

어머니는 현재 95세로, 연세에 비해 정정하고 예쁘고 현명한 삶을 살고 계시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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