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eo del Prado(파세오 델 프라도, 앞으로 파세오라고 줄여 부르기로 하자)‘는 남쪽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 북쪽 시벨레스 광장까지 이어지는 약 1.5Km의 대로이다. 이 대로는 그 자체가 예술을 주제로 한 거대한 테마파크이다. 레이나 소피아, 프라도, 티센 보르네미사로 이어지는 3대 미술관, -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 기획전시를 즐길 수 있는 까익사 포럼과 시벨레스 궁전, 대로 중앙을 따라 길게 뻗은 가로수길과 아름다운 분수들, 마지막으로 마드리드에서 가장 황홀한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시벨레스 전망대까지. 휴식 없이 걷는다면 30분가량 소요되는 이 대로는 중앙의 가로수길을 따라 미술관, 박물관, 분수, 주요 건축물 등이 연달아 나타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종교적 순례길이라면 파세오는 예술의 순례길이다.
이번 글에서는 파세오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며 예술에 관련된 장소 위주로 설명하되 예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흥미로운 장소나 사실도 덧붙이고자 한다. 파세오라는 산책로를 소개할 것이기 때문에 각 미술관의 콜랙션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지는 않겠다.
< 파세오 델 프라도의 가을 전경 >
먼저 파세오의 남쪽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부터 시작해 보자. 지하철 역으로는 마드리드 중앙역인 아토차에서 가깝다. 런던에 테이트 모던이 있고 파리에 퐁퓌두가 있다면 마드리드에는 레이나 소피아가 있다. 레이나 소피아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관이다. 미술관 이름은 개관 당시의 스페인 왕비인 소피아에게 바쳐진 것이다. 스페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세 명의 거장인 피카소, 달리, 미로의 소장품이 대표적이다. 특히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유명하다. 레이나 소피아는 소장품도 좋지만 입구의 카페와 서점도 훌륭하다. 카페는 주말이면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고 서점은 마드리드에서 손꼽히는 미술 전문 서점이다. 미술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서점에 들어간 이상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
소피아 미술관에서 5분쯤 북쪽으로 걸어가면 까익사 포럼이 나온다. 까익사는 바르셀로나에 본사를 둔 스페인 최대 저축은행이다. 이 회사는 공익사업의 일환으로 스페인 주요 도시에 ‘까익사 포럼’이라는 복합공간을 운영 중으로 예술, 유물 전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특별전이나 강의를 제공한다. 마드리드의 까익사 포럼은 입구의 ‘세워진 정원’이 포토 스폿으로 유명하다. 이름 그대로 정원을 수직으로 세워 둔 느낌이다. 마침 마드리드 여행 기간 중에 본인이 관심 있는 특별전이나 공연을 한다면 빠지지 않고 들러보자. 무심코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음원 사이트에서 콕 찍어 들을 때와 다른 각별한 기쁨을 준다. 어렵게 방문한 여행지에서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특별전을 만날 때도 비슷한 기쁨 이리라. 설사 자신이 잘 모르는 작가라 하더라도 그 기회에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 까익사 포럼의 세워진 정원 >
까익사 포럼의 건너편은 왕립 식물원이다. 넓은 공간에 다채로운 식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식물원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파세오 델 프라도 대로를 따라 뻗어있는 산책로를 더 좋아한다. 파세오 델 프라도를 한국어로 옮겨보면 ‘초원의 산책로’ 쯤 된다. 이름 그대로 산책로는 푸르름으로 뒤덮여 있다. 이 거리는 언제 걸어도 좋지만 특히 여름의 녹음이나 가을의 단풍 사이에서 걸을 때면 매 발걸음이 즐겁다. 까익사 포럼을 보았으면 신호등을 건너 반대편 인도를 따라 걸어보자. 지금 우리가 북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니 도로의 오른쪽 인도가 되겠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프라도 미술관이 나온다. 프라도는 스페인 고전회화를 대표하는 3명의 화가가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데 남쪽에서 올라온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화가의 동상은 무릴요 이다. 무릴요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인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지만 미술 팬이 아니라면 조금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릴요는 스페인 왕실에서 작품 반출을 금지했을 정도의 대가이다.
< 프라도 미술관 앞 무릴요 동상 >
무릴요 동상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벨라스케스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전 유럽이 자랑하는 미의 전당, 프라도의 정문을 지킬 수 있는 화가로 벨라스케스를 대체할 아티스트는 없을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곧 스페인 미술의 승리를 나타낸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수많은 대가들이 군웅할거했지만 그 끝판왕은 벨라스케스라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 작품 앞에서 질투와 선망을 느꼈을까. 마지막으로 매표소 앞에서 고야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고전시대의 마지막 거장이자 모더니즘의 첫 번째 거장. 고야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시대정신을 반영했다는 점, 자연의 재현을 넘어 작가의 내면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근대회화의 개척자라 할 만하다.
프라도를 두고 세계 3대 미술관이니 4대 미술관이니 말들이 많으나 그런 것은 애정남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도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프라도의 위대함은 현지 일간지가 2019년 개관 200주년 기념으로 바친 찬사를 인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프라도는 세계 최고의 피나코테크(회화관)이다. 최고라 잘라 말할 수 없다면 최고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프라도 앞에는 로터리가 하나 있고 로터리 중앙에는 냅툰 분수가 있다. 냅툰 분수를 시작으로 파세오의 남쪽에는 그리스 로마 신을 테마로 한 세 개의 분수가 이어진다. 냅툰은 그리스 식 이름으로는 포세이돈이고 바다의 신이다. 냅툰은 바다의 신이면서도 육지생물인 말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분수 속의 냅툰은 고래가 아니라 말 위에 우뚝 서 있다. 참고로 냅툰 분수는 마드리드 연고 축구팀 중 하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우승 축하 장소이다.
< 넵툰 분수 >
분수를 지나 오른쪽을 보면 스페인 독립운동 중에 희생된 영령을 모신 현충탑이 있다. 현충탑은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탑 밑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타 오르고 있다. 19세기 초, 스페인은 프랑스 나폴레옹 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에 강하게 저항했다. 당시의 독립운동을 묘사한 유명한 그림이 고야의 ‘5월 2일’과 ‘5월 3일’인데 바로 인근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어느 날씨 궂은 날에 현충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불은 물에 저항할 수 없건만, 불꽃은 내려 꽂히는 빗줄기를 거슬러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비바람도 뚫고 올라가는 뜨거운 애국의 불꽃.
< 현충탑 >
현충탑 건너편에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꼭짓점인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이 있다. 티센 미술관은 사업가였던 티센 남작이 기증한 개인 콜랙션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방대한 개인 콜랙션이라고 하는데 개인이 수집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 국가 차원에서 수집하려 해도 힘들 만큼 - 많은 작품이 1층부터 3층까지를 빼곡히 매우고 있다. 티센은 지역, 미술사조, 시대를 아울러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유럽 미술관으로는 드물게 미국 작품도 다수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고딕부터 추상화까지. 이탈리아부터 미국까지. 서양 미술을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 한 군데에서 파악하고 싶다면 전 세계에서도 티센 만한 곳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한 가지 여담. 티센 미술관의 남쪽 벽면(웨스틴 호텔 맞은편)에는 19세기에 쇼팽과 쌍벽을 이룬 피아노 영웅, 리스트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리스트가 마드리드에서 두 번 리사이틀을 한 곳이 바로 지금의 티센 미술관이다.
< 1844년 리스트의 마드리드 공연 기념문 >
보르네미사 박물관을 나와서는 다시 도로 중앙의 산책로를 걸어보자.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테마로 한 두 번째 분수, 아폴로 분수가 나온다. 수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중에 왜 하필 아폴로일까. 사실 아폴로는 파세오에 가장 어울리는 신이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자 예술의 신, 학문의 신이다. 아폴로가 사는 장소를 ‘파르나소스’라고 하며 파르나소스에는 아폴로와 더불어 예술과 학문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9명의 뮤즈가 머물고 있다. (‘뮤즈’란 단어에서 박물관 즉 ‘뮤지엄’이란 단어가 나왔다.) 자연과 예술이 둘러싸고 있는 이 거리가 파르나소스라면 파세오에 흩어져있는 프라도, 티센 같은 미술관들은 뮤즈들이다. 아폴로는 파세오의 수호신인 것이다.
< 아폴로 분수 >
아폴로 분수에서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에는 해군박물관이 나오고 왼쪽에는 스페인 중앙은행이 보인다. 스페인 해군은 영국 해군,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함께 역사상 최강 3대 해군이 아닐까. (어디까지나 개인 소견이지만) 신대륙 발견과 무적함대의 전투로 유명한 스페인 해군의 위대한 영광을 보고 싶다면 이 곳에 들러볼 만하다. 박물관에서는 해군장비와 무기, 지도, 선박 모형 등의 흥미로운 전시품과 함께 레판토 해전 - 스페인 무적함대가 오스만 튀르크 군대를 물리친 유명한 전투 -의 영광을 기리는 거대한 회화도 놓치지 말자.
< 해군 박물관 >
해군 박물관까지 지나면 파세오의 종점인 시벨레스 광장이 나온다. 시벨레스 광장은 중앙의 시벨레스 분수와 분수 뒤로 펼쳐진 장엄한 시벨레스 궁전이 어우러져 마드리드의 랜드마크를 연출하고 있다. 시벨레스 분수는 파세오에 위치한 그리스 로마 신화 분수 3부작 중 가장 걸작이다. 시벨레스는 대지의 여신으로 두 마리 사자가 이끄는 수래를 타고 있다. 이 사자들은 여신의 분노를 산 아탈란타와 히포메네스라는 젊은 연인이 변한 것이다. 이들 연인에 얽힌 이야기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귀도 레니가 그린 ‘히포메네스와 아탈란타’라는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넵툰 분수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분수라면 시벨레스 분수는 지구 대표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의 축하 장소이다. 축구 실력으로 보자면 바다의 신 보다 대지의 여신이 더 강한가 보다.
< 시벨레스 분수와 시벨레스 궁전 >
< 귀도 레니 - 히포메네스와 아탈란타 >
분수 뒤의 시벨레스 궁전은 1919년에 개장한 ‘네오플라테레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플라테레스크는 스페인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고딕과 르네상스를 조금씩 받아들인 데다 화려한 장식성이 특징이다. 시벨레스 궁전도 외관은 화려하고 디테일한 장식은 현란하다. 이 건물은 과거에는 우체국으로 쓰였으며 지금은 시청이자 복합 문화공간으로 사용된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에는 조그마한 음악당이 있어 클래식 위주의 공연을 하고 위로 올라가면 기획전시 공간이 나온다.
마드리드 최고의 경관을 볼 수 있는 곳도 이 곳 시벨레스 궁전이다. 전망대가 있는 6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전망대에서 눈 아래 펼쳐진 시벨레스 분수와 중앙은행, 파세오 산책로를 보고 있노라면 ‘여행의 추억은 사진이 아니라 가슴에 담는 것이다’라는 여행 철학을 가진 사람도 어느새 스마트폰 카메라 어플을 켜게 될 것이다. 전망대는 낮에도 아름답지만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만약 전망대가 문을 닫았다면 4층에 위치한 카페를 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 시벨레스 궁전에서 바라본 야경 >
파세오는 미술관에 들르지 않고 일단 남쪽부터 북쪽 끝까지 한 번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다시 말하지만 파세오 자체가 광활한 예술이며 아폴로와 뮤즈의 정원이다. 가히 유럽의 파르나소스라 할 만한 이 곳에서 뮤즈의 영혼이 되어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지는 예술을 만끽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