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립 예술원은 이름에 무려 ‘레알(레알 마드리드 때문에 한국사람도 많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단어. 왕가, 왕립이라는 뜻)’이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프라도, 티센, 레이나 소피아라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광채가 너무 눈부신 나머지 이 소중한 미술관은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는 것이다. 왕립 예술원 입구에는 ‘피카소 그림 있어요’라는 호객(?) 문구가 붙어 있는데 정작 전시품 중 피카소 그림은 하나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디카프리오 출연이라는 광고에 혹해 영화를 보러 갔더니 이 잘생긴 조각미남은 후반 1분 정도 엑스트라로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왕립 예술원은 피카소 그림이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피카소 이름을 내세워서라도 관람객을 더 유치하고자 하는 미술관의 고뇌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 같이 관계없는 사람도 이 미술관을 알리고 싶어 하는데 미술관 관계자는 오죽할까. 이렇게 적고 보니 왕립 예술원을 소위 악플보다 더 무섭다는 무플에 시달리는 미술관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 적지 않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미술관이지만 그 가치에 비해 과소평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이다.
왕립 예술원은 알칼라(Alcala) 대로 13번지에 있다. 지하철 역으로는 방코 데 에스파냐(Banco de Espana) 역이나 솔(Sol) 역 인근이다. 솔 역보다는 방코 데 에스파냐 역에서 천천히 걸어서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시벨레스 광장을 등지고 서쪽으로 향하다보면 상업시설이 즐비한 그란비아와 구시가지의 유적이 시작되는 알칼라 대로로 나누어지는 분기점에 다다르게 된다. 이 분기점에서 바라보는 마드리드의 모습은 유럽 어느 대도시보다도 위풍당당하고 아름답다.
< 알칼라-그랑비아 교차로 >
이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보자. 미술관 입구는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가기가 조금 망설여 질 수도 있다. 염려 말고 편안히 입장하기 바란다. 매표소는 2층에 있다. 미술관 내부를 보면 복도와 층계 사이사이에 그리스로마 조각상과 회화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어 본격적으로 전시실을 둘러보기 전에도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복도는 물론이고 전시실 안에도 유명 작품들의 복제품이 드문드문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행여 이들 복제품만으로 미술관을 판단하지 않기 바란다.
< 왕립 예술원 입구 >
왕립 예술원은 1752년에 설립되었다. 예술원의 가장 큰 설립취지는 미술가 양성이다. 따라서 젊은 미술가들에게 고전 감상의 기회를 주어 미술가로서의 기초를 닦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고전이란 조각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품, 회화에서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작품을 말한다. 젊은 예술가들이 고전을 원본으로 감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행의 기회가 드물고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는 복제품으로 원본을 대신하였다. 즉 왕립 예술원에 있는 많은 모조품들은 국립 미술학원의 ‘교구재’였던 것이다. 물론 예술원 내부의 전시작품들은 대부분 '진품'들이다. 진품들 사이에 일부 복제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미술관은 *1,2,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대순으로 감상하려면 3층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지금부터 흥미로운 작품들을 살펴보자.
* 참고로 유럽의 고층건물은 0층부터 시작한다. 즉 스페인의 3층은 한국으로 치면 4층이다.
< 왕립 예술원 내부 >
1. 폼페오 바토니(Pompeo Girolamo Batoni)
성녀 루치아의 순교
< 폼페오 바토니 - 성녀 루치아의 순교 >
폼페오 바토니는 18세기 이탈리아 화가이다. 이 화가의 장기는 초상화였다.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영국이나 아일랜드 귀족의 초상화로 유명했다. 18세기 영국인 사이에서 유럽 본토 - 특히 이탈리아 - 로 예술기행을 떠나는 ‘그랜드 투어’가 성행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이들 관광객들에게 풍경화가로 인기 있었던 사람이 카날레토였다면 초상화로는 폼페오 바토니가 유명하다. 한 손에는 베네치아 풍경화 한 점,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 한 점을 들고 으스대며 - 혹은 기진맥진하여 - 고향에 돌아갔으리라. 생각해보면 공항에서 면세점을 찾아가는 우리 심정이나 그랜드 투어 중 화가의 아틀리에를 찾아가는 당시 영국 귀족의 심정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Now or Never'라 생각하면 쇼핑 열기가 더 치솟는다는 점, 이탈리아에서는 명품을 구입하고 싶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폼페오 바토니는 초상화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웅장한 종교화나 역사화도 종종 그렸다. 그의 화풍은 부드러운 로코코와 장엄한 신고전주의를 섞어놓은 듯 하다. 따라서 당대에 비슷한 화풍을 가졌던 안톤 라파엘 맹스와 비교되기도 했다. 맹스는 마드리드에서 까를로스 3세의 궁정화가로 활약하였고 이 미술관에도 몇몇 작품이 있으니 비교해 보기 바란다.
루치아 성녀의 순교는 1759년에 완성된 세로 3미터, 가로 2미터의 커다란 작품이다. 로코코 영향으로 성녀 루치아는 끔찍한 죽음을 앞두고도 방금 화장을 하고 나온 여인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또한 주인공인 루치아를 화면 중앙에 두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반면, 나머지 인물들은 주변부에 어둡게 처리한 것에서는 신고전주의 화풍을 느낄 수 있다. 성녀 루치아는 자신의 발 밑에 타들어가는 불길과 이미 가녀린 목을 뚫은 듯한 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교의 종려나무를 들고 날아오는 천사를 평온하게 바라보고 있다. 루치아의 오른 쪽 위에는 제우스 동상이 번개를 손에 쥔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 그림에서 제우스는 이교도의 신을 상징한다. 우리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따라서 만화속에서 자주 보던 제우스나 포세이돈이 유일신 야훼에 대비되는 이교도의 신이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유럽 종교화, 특히 순교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로마 신을 발견하게 되면 그건 순교자들이 이교도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고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석하면 된다.
루치아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 시칠리아에 살았던 성녀이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약혼자와의 결혼을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약혼자는 루치아를 로마 집정권에게 고발해 버리고 루치아는 순교하게 된다. 루치아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에 순교하였다. 당시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지 않았고 많은 박해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참고로 디오클레티아누스 다음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성녀 루치아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순교하지 않았을텐데.
루치아는 한 무리 소가 끌어도 꿈쩍하지 않았고 장작불 위에서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끝내 참수형으로 죽게 되었기에 이 그림에는 장작불과 참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림 속의 성녀 루치아를 자세히 보자. 오른 손에 접시를 들고 있고 그 접시 위에 눈 두 개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눈은 루치아의 상징물이다.
루치아는 라틴어로 ‘빛’을 뜻한다. 그러다보니 후일 대중들이 ‘빛’을 ‘눈’으로 연결시켰다. 루치아가 눈이 뽑혔다가 스스로 끼워 넣었다는 일화도 있으나 이는 너무 나아간 애기라고 생각한다. 화살에 맞은 자신의 눈을 뽑아 먹었다는 삼국지의 *하후돈도 아니고. 어쨌든 루치아는 이러한 대중의 상상력으로 눈이 상징이 되었다. 앞으로 루치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만나면 “두 눈이 아름다우시군요.”라고 칭찬하면 어떨까. 부모님이 아기의 예쁜 두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테니까.
*삼국지의 등장인물로 조조 휘하에서 활약했다. 눈에 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자신의 눈알을 씹어 먹으며 적장을 쫓아간 일화가 유명하다.
2. 알론소 카노(Alonso Cano)
옷을 집어들고 있는 그리스도
알론소 카노는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화가이다. 17세기의 벽두인 1601년에 태어난 이 화가는 벨라스케스, 무릴요 등과 함께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를 이끈 안달루시아 화파 중 한 명이다. 알론소 카노의 고향은 알함브라로 유명한 그라나다 이다. 세비야에서는 벨라스케스와 함께 파체코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의 스승이자 장인이다.
< 알론소 카노 - 옷을 집어들고 있는 그리스도 >
카노는 회화 뿐 아니라 조각, 건축에도 능하여 ‘스페인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렸다. 재능만 이탈리아 거장을 닮았다면 좋았으련만 성격은 이탈리아의 또 다른 거장을 닮았다. 카노는 성격이 불 같고 한 번 화가 나면 조절이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즉 알론소 카노는 성격 않 좋기로 유명한 카라바조를 닮은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에 카라바조의 성격. 아무래도 평탄한 인생을 살기는 힘들어 보이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알론소 카노는 아내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다. 어느 날 작업장에서 돌아와보니 집이 도둑을 맞았고 아내는 살해 당했다는 것이 알론소 카노의 주장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알론소 카노를 살인범으로 의심하였다. 알론소 카노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것이었다. (이러니 평소에 잘 해야 한다.) 카노는 발렌시아로 도망갔으나 끝내 마드리드로 돌아와 고문을 받는다. 그는 고문 끝에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버티기가 통했는 지 왕은 카노를 다시 왕실 화가로 받아들인다. 테니스 경기 후 상대를 살해하고 도망갔던 카라바조와 겹쳐 보이지 않는가. 물론 알론소 카노의 경우 자신의 죄를 끝까지 부인하긴 했지만 말이다.
알론소 카노의 그림은 불같은 성격과는 다르게 과장이 없고 우아한 동시에 고요하다. 옷을 집어들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자. 검은 화면을 바탕으로 옷을 집어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명상적으로 보인다. 17세기 당시 바로크 그림에서 나타나는 화려하고 극적인 표현과는 대조적이다. 그리스도를 소위 단독샷으로 그린 것도 특이하다. 가끔 그리스도의 얼굴이나(보통 그림 제목으로 ‘구세주’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홀로 그리기도 하나 대부분 그리스도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이든 추종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천사에게든 많은 이들에게 둘러 쌓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러 면에서 알론소 카노는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그렸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주제이다. 옷을 집어들고 있는 그리스도 모습은 흔한 주제가 아니다. 이 보다는 옷을 집어들기 전, 즉 그리스도가 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하는 그림이 훨씬 많다. 그리스도의 채찍질에서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이라면 알론소 카노가 그린 옷을 집어드는 모습에서는 심리적인 고난이 느껴진다. 지금 그리스도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아니라 병사들의 조롱인 듯하다.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에게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나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해 보인다.
그리스도의 손목과 발목에는 기둥에 묶였던 흔적이 역력하고 머리와 등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혈은 절제되어 표현되어 있어 더욱 사실적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는 회화적 과장이 없다. 이탈리아 화가처럼 고난의 그리스도를 매끈하게 그리지도 않았고 독일 화가처럼 너무 처절하게 그리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실주의 전통은 스페인 회회의 특징으로 고야에게까지 전해진다.
알론소 카노는 정말로 아내를 죽였을까. 그의 고요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고문 끝에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믿고 싶어진다.
3.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자화상
< 프란시스코 고야 - 자화상 >
자화상 앞에서는 늘 생각이 많아진다. 자화상은 화가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써내려간 자기소개서라고나 할까. 이 화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지길 원한 것인가. 수 백년 전 고전회화 속의 자화상을 볼 때면 조금 오싹한 느낌도 든다. 그림 속 화가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왕립 예술원의 고야 자화상은 비스듬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고전화가의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자아를 강조하기 위해 아뜰리에에서 작업하는 모습이 많다. 하지만 고야의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상징이 전혀 없다. (화가로서 작업하는 모습의 자화상도 있다. 역시 예술원 안에 전시되어 있으니 비교하여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거기다 그림의 배경은 까맣게 처리되어 흡사 고야의 얼굴이 어둠속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고야는 자신의 얼굴 외에는 어떤 장식도 상징도 사용하지 않았다. 고야는 어둠 속에서 무슨 애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이 자화상이 그려진 시기는 1815년이다. 고야가 1746년생이니 70세 가까이 되어서 그린 작품이다. 고야의 그림은 시기별로 느낌이 다르다. 후기로 갈수록 어두운 그림이 많아 말년에는 ‘블랙 페인팅’ 시리즈를 남기게 된다. 무능력한 왕과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민중들, 프랑스 군대의 야만적인 스페인 점령. 거기다 신경쇠약과 청각상실이라는 개인적 불행까지 겹친 고야는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어두운 환상에 시달렸다.
고야는 늙고 지쳤다.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해오는 어둠 속에서 고야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긴 하는 건가. 내가 그렸던 수 많은 그림들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나. 젊은 나이도 아니고 칠십이 다 되어 가지게 된 회의는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어둠도 개인적인 불행도 이 위대한 화가의 이성을 잠재우지 못했다. 고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눈을 치켜 뜨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 고야의 판화집인 ‘카푸리쵸스’의 부제
< 프란시스코 고야 -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
4. 안토니오 페레다 (Antonio de Pereda)
기사의 꿈
바니타스라는 장르가 있다. 바니타스는 ‘공허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세속적인 물건이나 가치들은 일시적이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립 예술원에는 바니타스의 걸작이 있다.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페레다가 그린 ‘기사의 꿈’이란 작품이다.
< 안토니오 페레다 - 기사의 꿈 >
안토니오 페레다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인 17세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2시간쯤 떨어진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태어났으며 11세 때 부모를 여의고 삼촌에 의해 마드리드에 당도한다.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마드리드에서 화가들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페드로 데 라스 꾸에바스(Pedro de las Cuevas) 밑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17세기 스페인 화단은 남부 안달루시아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벨라스케스, 무릴요, 알론소 카노 등이 모두 안달루시아 출신이다. 안토니오 페레다는 이들 안달루시아 출신에 맞서 수도 마드리드의 체면을 세워준 소위 ‘마드리드파’의 촉망받는 화가로 성장한다.
페레다는 종교화, 역사화를 많이 그렸지만 특이하게 정물화와 바니타스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특이하다고 애기한 것은 정물화와 바니타스는 네덜란드 화가들의 주특기였기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 후 네덜란드 화가들은 화려한 종교화보다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를 즐겨 그렸고 바니타스는 정물을 많이 사용하기에 자연히 네덜란드 화가들이 좋아하는 주제가 되었다.
페레다는 종교화가 초강세였던 스페인에서 바니타스를 가장 잘 그렸던 화가이다. 왕립 예술원의 이 작품과 함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바니타스의 알레고리’는 바니타스 회화를 통틀어서도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붓을 쥐기만 하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걸작을 만들어내는 화가라니. 페레다의 재능이 부럽기만 하다. 대중음악으로 비유하자면 락 스타가 갑자기 힙합신에 나타나서도 차트 1위를 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 안토니오 페레다 - 바니타스의 알레고리 >
‘기사의 꿈’을 보면 화면 왼쪽에 귀족으로 보이는 기사가 잠들어 있고 오른쪽에는 테이블 위에 정물들이 쌓여 있으며 그 둘 사이에는 천사가 글귀를 들고 기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테이블 위의 정물들은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물건들과 그 물건들이 덧 없음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나눠져 있다.
세속적 물건들을 하나씩 보자. 지구본과 펼쳐진 책은 인간의 지식을 상징한다. 지식이란 것도 신의 섭리 앞에서는 덧 없는 것일 뿐. 게다가 지나친 지식의 추구는 7대 죄악 중에서도 최악이라는 ‘자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 바라건데 하느님께서 그 분의 영혼을 수습하시되, 지적인 허영에 못 이겨 그 분이 지으신 허물을 용서하기기를.’
지구본 곁에는 교황의 삼중관과 군주의 왕관이 있다. 권력을 나타낸다. 16세기 이후 스페인이 신교도에 반대하는 소위 반종교개혁의 대표국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교황의 삼중관까지 그림에 삽입한 것은 대담한 표현으로 느껴진다. 17세기 쯤 되면 교황의 힘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로마 카톨릭을 신봉하는 구교국가에서 교황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교황도 바니타스를 빗겨갈 수 없다.
갑옷과 무기는 전쟁에서의 공훈과 명예, 가면과 꽃과 악기와 악보는 감각의 쾌락(악기는 인생의 간결함과 덧없음을 나타낼 수도 있다.), 금은보화는 당연히 ‘부’를 나타낸다. 지식, 권력, 명예, 쾌락, 부. 이 정물들만 모아놓았다면 이 그림은 바니타스(Vanitas)가 아니라 *배니티 페어(Vanity Fair)가 되어야 할 것인데 몇 가지 사물을 더해주면서 인생무상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 허영으로 가득 찬 상류 사회
책 위의 해골과 꺼진 촛불은 사람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시계는 인생이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가 들고 있는 현수막(?) 중간에는 태양 위에 화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시간과 죽음을 암시한다. 시간은 - 한국어 표현 그대로 - 쏜살 같이 날아가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천사는 잠 든 귀족에게 찾아와 지상의 모든 것이 덧없음을 알려주려는 것이니 그렇다면 귀족이 꾸고 있는 꿈은 구운몽 같은 일장춘몽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