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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예술의 요람, 왕립 예술원 (2)

골든 트라이앵글에 가려진 보석

by 강명재

5. 훌리오 로메로 또레스(Julio Romero de Torres)

기도하는 여인


그림 속의 인물이 이제 막 그 공간에 들어선 우리를 휙(또는 힐끔) 쳐다보는 듯 한 그림이 있다. 프라도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가 대표적이다. 왕궁 투어 중인 우리를 화가와 공주, 시녀들 모두가 일제히 돌아보는 듯한 느낌. 훌리오 로메로 데 또레스의 ‘기도하는 여인’은 그와 다르다. 그녀가 나를 쳐다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도하느라 곁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하는 듯한 느낌.


< 훌리오 로메로 또레스 - 기도하는 여인 >


훌리오 로메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화가이다. 스페인 남부의 꼬르도바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사망하였는데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꼬르도바에서 지냈다. 꼬르도바는 세비야, 그라나다, 말라가와 함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안달루시아를 여행할 때 대부분 세비야, 그라나다만 둘러보는 경우가 많은데 꼬르도바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도시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이슬람 세력이 초기에 세운 수도가 꼬르도바였고 10세기 경에는 유럽 최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꼬르도바의 메스키타는 비교적 이슬람 지배 후반기에 세워진 알함브라에 비해 이슬람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데다가 카톨릭 성당과 함께 어우러져 있어 묘한 매력을 준다.

다시 그림 애기로 돌아와보자. 이 그림을 그린 훌리오 로메로는 세밀한 스케치 실력으로 유명했는데 그 실력을 십분 살려 달력이나 잡지 일러스터레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안달루시아 민중들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1907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예술가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끊임 없이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입산수도라도 한다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뭘 알아야 그리던가 말던가 하지. 뭘 알려면 그 때부터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니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면에서 훌리오 로메로는 대단한 화가이다. 그의 그림을 한 번 보면 다른 작품을 보더라도 대번에 로메로의 작품이란 것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레코의 그림 만큼이나 개성이 강하다. 훌리오 로메로는 상징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신비하고 시적인 장면이 많다. 고향땅, 안달루시아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기도 했다. 그렇다고 풍경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그 곳 사람들의 모습을 담거나 인물들의 배경으로 고향산천을 자주 그렸다는 애기이다. 투우사나 플랑맹코 연주자, 댄서 등이 로메로 그림의 단골 모델들이다.


이런 특징만으로는 로메로의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없다. 로메로의 개성은 여인의 모습에 있다. 로메로 그림 속의 여인은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안달루시아의 여인을 이처럼 잘 묘사한 화가는 드물다. 자신의 신체와 자신이 속한 땅이 둘 일 수 없다는 ‘신토불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로메로의 그림은 ‘화토불이’가 아닐 지. 화가의 그림과 자신을 키워준 땅이 둘일 수 없는 것이다.


< 훌리오 로메로 또레스 - 질투 >

이제 기도하는 여인이라는 그림을 보자. 화면 오른쪽에는 ‘로메로’스러운 여인이 양 손에 책을 들고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앞서 애기했 듯 휙 돌아본 것이 아니라 문득 고개를 들어 지긋이 쳐다보는 듯하다. 그림 제목으로 보건데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분명 기도서일텐데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비극적인 연애소설을 읽고 있었던 것 마냥 슬퍼 보인다. 은하철도 999의 매탤이나 80년대 순정만화 여주인공 같은 눈빛. 화면 왼쪽에는 한 남성이 여성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내고 있다. 화면을 양분하고 있는 이 두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술 평론가들은 이 그림이 ‘세속적 사랑’과 ‘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화면 왼쪽의 남녀가 세속적 사랑을 나타낸다면 오른쪽의 여인은 성스러운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세속적 사랑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사랑하지만 성스러운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 세속적 사랑은 태양 아래에서 빛나지만 성스러운 사랑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힌다. 슬픈 것 같았던 그녀의 눈빛을 다시 보니 이제는 평화로운 여운으로 다가온다.


사족 두 가지. 첫 째, 만약 꼬르도바로 여행을 간다면 훌리오 로메로 미술관을 방문해보자. 이 그림의 배경이 포트로 광장이다. 미술관은 포트로 광장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스페인 미술관을 많이 돌아 다녔지만 훌리오 로메로의 그림을 다른 미술관에서 접하기가 쉽지 않았으니 꼬르도바를 여행한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자. 둘 째, 세속적 사랑과 성스러운 사랑이란 주제로 가장 유명한 그림은 티치아노의 그림이다. 로마 보르네세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두 그림을 한 번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 세속적 사랑과 성스러운 사랑 - Vecellio Tiziano >

6. 호세 마리아 로페스 메스키타 (Jose Maria Lopez Mezquita)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초상


<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초상 - Jose Maria Lopez Mezquita >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클래식 기타의 가능성을 보여준 최고의 기타리스트 이다. 한국인들 중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세고비아를 기타 브랜드로만 알고 계신 경우가 많다. 마드리드 근교의 세고비아를 방문하는 분들은 종종 세고비아 기타는 어디서 볼 수 있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세고비아는 기타리스트로서 유명한 이름이다. 안드레스 세고비아가 너무 위대한 연주자이다보니 기타 브랜드 이름으로까지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왕립 예술원에는 세고비아의 초상화가 있고 그가 연주하던 기타도 있다. 프라도처럼 아주 넓은 곳도 아닌 데 세고비아의 초상화를 찾지 못 해 안내원에게 문의하였더니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안내원의 친절로 마주하게 된 세고비아의 초상화와 그가 쓰던 기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어설프지만 조금씩 기타를 치고 있고 평소 기타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다니던터라 기타의 레전드 앞에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어떻게 전설이 되었을까. 그는 1893년 안달루시아의 리나레스에서 태어나 1987년 마드리드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국 나이로 95세까지 살았으니 거의 1세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스페인의 또 다른 클래식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첼리스트)도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며 98세까지 생존 하였는다.(1876-1973) 음악에 대한 사랑이 장수의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그라나다 음악학교에서 잠시 동안 배우기도 했으나 거의 독학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고 한다.


어린 세고비아가 차츰 실력을 키워가던 무렵, 기타는 악기의 주류가 아니었다. 클래식 악기의 주류가 아니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기타는 집시나 한량들이 저잣거리에서 통속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용도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저잣 거리에서의 버스킹(?)이나 통속적인 음악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당시 클래식 음악가들이 기타를 한 수 아래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종종 기타를 대중음악 반주용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기타를 연주한다고 하면 악보가 아니라 코드표만 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타는 반주만 하라고 만들어진 악기가 아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독주가 가능한 악기이다. 기타가 소위 음악의 삼 요소라는 리듬, 멜로디, 화음을 한 대의 악기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타는 그 어느 악기보다 독주로서의 기능이 뛰어난 악기이다.


독주 악기로서의 기타가 주는 매력을 온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세고비아이다. 조각가가 돌덩이 안에 감춰진 천사를 끄집어내 듯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기타 안에 숨겨진 예술성을 밖으로 드러낸 것이다. ‘기타가 바이올린, 피아노 보다 못 한 것이 뭐가 있나. 기타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들려주마.’ 사람들은 강자들에게 열광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 약자의 반란을 좋아한다. 세고비아가 기타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스토리는 마치 언더독의 반란처럼 생각된다. ‘너희들이 무시하는 바로 그 것으로 너희들을 넘어서주마.’

< 안드레스 세고비아가 사용했던 기타 >

세고비아는 작곡에도 능했지만 다른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들을 기타 연주용으로 편곡한 곡들이 유명하다. 그가 편곡한 작품으로는 바흐의 샤콘느, 헨델의 사라방드, 라모의 미뉴엣 등이 있다.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은 평소 기타에 삐딱한 시선을 가졌다 하더라도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고비아의 공연은 스페인 뿐 아니라 미국이나 남미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된다. 클래식 기타줄로 나일론을 도입하였던 사람도 세고비아다. 그 뿐 아니라 기타에 쓰이는 원목을 고급화하고 연주하기 좋도록 디자인을 바꾸는 등 세고비아는 현재 우리가 쓰는 클래식 기타의 모습을 완성시킨다. 클래식 기타를 위한 작곡과 편곡, 기타 디자인 개선, 그리고 무엇보다 기타라는 악기의 위상 제고까지. 클래식 기타 연주자는 누구라도 안드레스 세고비아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세고비아의 초상화를 보자. 한 손에는 책을 - 아마 악보집 이리라 - 다른 한 손에는 기타를 들고 차분한 표정으로 서 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보다는 엄숙한 신학자 같은 느낌을 준다. 화가가 20세기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바치는 경의심이 느껴진다. 입술은 빨간 색이 도드라져 그가 태어난 안달루시아 지방의 정열을 상징하는 듯 하다. 별다른 배경 없이 모델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초상화 전통을 떠올리게도 한다. 세고비아는 20세기를 살았던 인물인만큼 사진도 많이 남아 있지만 이 초상화만큼 그를 잘 표현한 기록물은 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 초상화는 사진을 뛰어넘는다.


이 그림을 그린 호세 마리아 로페스 메스키타는 세고비아와 비슷한 시기에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다. 9살에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13살에 왕립예술원에 입학했다고 하니 어릴 적부터 소질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01년에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국선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이후 화가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었고 미국, 브뤼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다가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7. 에두아르도 치차로 (Eduardo Chicharro y Aguera)

붓다에 대한 유혹

< 에두아르도 치차로 - 붓다에 대한 유혹 >

서양 미술관에서 만나는 부처님.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이 그림은 에두아르도 치차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치차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활약한 화가로 스페인 외광파를 대표하는 소로야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치차로는 스승인 소로야의 밝은 빛 보다는 다소 어두운 공기에 마음이 더 끌렸던 것 같다. 1922년부터 왕립 예술원 회원이 된 그는 스케치와 채색이 고루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자. 보리수 아래 수행하는 석가모니를 두고 각양각색의 유혹이 둘러싸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목을 조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이 있다. 이 둘은 욕망을 상징한다. 연인의 아래 쪽을 보면 반은 인간이고 반은 표범 가족으로 덮여 있는 여인이 보일 것이다. 이 표범인간(?)은 색욕을 나타낸다. 표범인간 밑으로는 얼굴이 반쯤 가려진 여인이 보일 것이다. 이 여인은 나태를 상징한다. 석가의 바로 발 밑에는 두 명의 여인이 누워있다. 짐작하겠지만 이들 역시 색욕을 상징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면 오른쪽에는 두 명의 인물이 팔을 앞으로 뻗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얼핏 부처님께 경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아첨을 상징한다. 아첨꾼 2명 위의 무희와 화면 반대쪽 오른편의 악사들은 음악으로 석가를 유혹하는 중이다. 코끼리 위에 올라서 있는 여인은 힌두교의 비너스라 불리는 락슈미 이다.


색욕, 나태, 음악, 아첨. (장담하건데 아첨은 색욕만큼이나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다!) 이런 엄청난 유혹의 와중에도 석가는 고요하기만 하다. 그런데 한 명 설명이 빠진 사람이 있다. 화면 좌측 하단에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사실 이 인물이야말로 가장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다. 바로 석가가 속세에 있을 때 혼인을 올렸던 아내, 야소다라 부인이다. 야소다라는 석가에게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이 여인은 진짜 아소다라가 아니다. 석가를 유혹하기 위해 *압사라가 모습을 바꾼 것이다. 부처는 압사라를 향해 꾸짖는다. “너는 환영일 뿐이다. 환영은 진실 앞에서 모습을 감춰야 한다. 내가 바로 진실이다.”

*힌두교의 님프, 요정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들라크루아의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바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다. 루브르에 소장된 이 그림은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적의 침입에 무너지기 전에 자신의 부인들을 죽이고 보물들을 불사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두 그림 다 아시아의 강렬한 이야기에서 소재를 취했다는 것과 관능적인 여인들이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구도가 흡사하다.

< 들라크루와 -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쾌락의 극한까지 추구했던 사람의 최후를 보여준다. 한편 석가에 대한 유혹에서 석가모니는 쾌락에 초연한 모습이다. 석가모니는 까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기에 사루다나팔루스처럼 원하는만큼 쾌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석가는 쾌락 대신 깨달음과 중생구도의 길을 걸었다. 사루다나팔루스의 얼굴은 평온하지만 그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평온할 수 없다. 하지만 석가의 얼굴에서는 내적평화를 느낄 수 있다. 사루다나팔루스가 허무를 보여준다면 석가는 초월을 보여준다.


쾌락을 탐닉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보통사람이 쾌락을 초월할 수도 없는 법. 그렇다면 어떤 인생이 좋은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끈적한’ 쾌락보다는 ‘상쾌한’ 쾌감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한 가지 더. 이 그림의 옆 쪽 벽면을 보면 화가의 자화상이 있다. 자화상의 배경을 자세히 보자. 바로 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텐데 화가가 이 작품에 가지고 있던 애정과 자부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에두아르로 치차로 - 자화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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