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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의 종합 카탈로그, 티센 미술관(1)

고딕에서 입체파까지, 이탈리아에서 미국까지

by 강명재

티센 보르네미사(Tyssen Bornemisza) 미술관은 프라도, 레이나 소피아와 함께 소위 마드리드 골든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미술관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걸어서 5분, 냅툰 분수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다. 티센 미술관은 서양 미술사의 카탈로그 같은 장소이다. 시간적으로는 14세기 고딕 미술부터 20세기 모더니즘까지, 국가로는 유럽 각 국은 물론 미국 작품까지 갖추고 있다. 시간 축을 종으로, 장소로는 횡으로, 그야말로 종과 횡을 아울러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미술관이 ‘종합 미술관’을 지향하느라 그저 그런 작품들을 얼기설기 긁어모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품의 질도 아주 훌륭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어떤 작가를 좋아하든 아니면 어떤 시대, 어떤 화풍을 좋아하든 이 미술관에서는 분명히 좋아하는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 티센 미술관 테라스 >


티센 미술관은 출범 과정 자체가 흥미롭다. 이 방대한 콜랙션은 놀랍게도 한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이다. 티센은 독일, 헝가리계 귀족이자 성공한 사업가 가문이었다. 지금의 티센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한스 하인리히 티센(Hans Heinrich Thyssen) 남작인 데 이 분의 할아버지인 아우구스토 티센(Augusto Thyssen)이 로댕의 조각품 7점을 사들이며 가문의 콜랙션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티센(Heinrich Thyssen)부터는 본격적으로 콜랙션이 늘어나는 데 뒤러, 한스 홀바인, 프라 안젤리코, 프란츠 할스, 얀 반 에이크 등 고전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사들인다.


하이리히 티센 남작의 아들인 한스 하인리힌 티센 남작은 계속해서 고전 명작을 사들이는 한편 고흐, 피카소, 잭슨 폴록 등 모더니즘 거장의 작품도 사들인다. 한스 하이리히 남작은 미스 스페인 출신인 카르멘 세르베라(Carmen Cervera)와 결혼했고 까르멘 여사는 자신만의 취향으로 미술품을 수집했다. 티센 미술관에는 까르멘 여사의 콜랙션을 별도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말라가에는 그녀의 콜랙션으로 이루어진 미술관도 있다. 티센의 콜랙션은 아구스트, 하인리히, 한스 하인리히 남작과 카르멘 여사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 미술관 설립자인 한스 하인리히 남작과 카르멘 여사 >

한스 하인리히 남작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가문의 콜랙션을 한 곳에 모으고 싶어 했고 스위스 루가노 근처를 그 장소로 택한다. 하지만 루가노의 갤러리는 방대한 작품을 전시하기에 협소한 데다 접근성도 떨어지는 곳이라 많은 대중들에게 작품을 공개하고자 하는 남작의 바람과 맞지 않았다. 남작은 다른 장소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가히 가공할만한 양과 질을 자랑하는 콜랙션이 새로운 둥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은 세계 미술계를 술렁이게 만들었고 각 국에서는 유치 작전에 들어갔다. 한 나라의 미술 수준을 한 번에 끌러 올릴 수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는 터.


독일의 본과 영국 런던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파리에서는 세느 강변의 근사한 전시장, 쁘티 팔레를 전시장으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소문에는 일본도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하고 심지어 미국 올랜도의 디즈니월드에서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인 콜랙션을 전시하고 있는 게티 재단이 3천억 페세타를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3척 억 페세타를 당시 환율로 적용하며 약 1조 8천억이다. 지금 물가로 생각하면 3조 원은 훌쩍 넘길 것이다. 하지만 티센 남작 입장에서 게티는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일단 티센 남작은 박물관 이름에 반드시 가문의 이름이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만약 게티 미술관에 작품을 넘기면 티센의 이름은 사라지고 게티 가문의 또 다른 소장품이 될 뿐이다. 게다가 티센 가문과 게티 가문은 미술 경매 시장에서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티센 콜랙션을 게티 재단에 넘기는 것은 자존심상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마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스페인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다. 물론 그렇게 된 계기는 스페인 출신 아내인 카르맨 여사의 존재가 작용했을 것이다. 마드리드 시는 냅툰 분수 인근의 18세기 궁전, 빌야 에르모사(Villa Hermosa)를 전시공간으로 제시했고 1988년 12월, 티센 남작은 이를 받아들인다. 티센 남작이 스페인에 콜랙션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 문화계의 주요 뉴스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는 티센의 콜랙션이 마드리드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재임 기간 중 추진했던 문화 정책 중에서 가장 뼈아픈 실패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당초 프라도에 티센 남작의 콜랙션을 추가하는 방안도 제안되었으나 이는 앞서 설명했듯이 티센 가문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남작의 바람 때문에 불발되었다. 만약 프라도와 티센의 콜랙션이 합쳐졌다면 - 회화에 관한 한 - 프라도 미술관은 세계에서도 원탑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여러모로 낫다고 생각한다. 티센 남작의 바람대로 이 정도의 사회 공헌을 하는 가문에게는 미술관 이름 앞에 그 가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그렇잖아도 두 미술관의 콜랙션이 방대한 데 이 두 개를 합쳐버리면 하루 만에 감상하기에는 도저히 무리일 것이다. 예술도 식사처럼 한 번에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정한 양이 있다.


티센 미술관으로 마드리드의 골든 트라이앵글이 완성되었다. 티센 미술관은 마드리드 미술 수준을 양적으로만 끌어 오린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티센 미술관은 시대와 국가를 아울러 최고 수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티센 미술관 덕분에 마드리드의 예술은 더욱 다채로워진 것이다. 일례로 인상파를 들어보자. 대중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르 중 하나가 인상파인데 스페인에서는 티센 미술관이 아니라면 인상파 작품을 감상하기 쉽지 않다. 티센은 마네, 모네, 드가, 르노와르로 대표되는 인상파 4대 거장은 물론 피사로, 시슬레이 같이 이들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인상파를 마지막까지 수호한 거장의 작품, 여성 화가 모리조, 후기 인상파를 장식하는 고갱, 고흐, 세잔의 작품까지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다. 티센에서만 인상파 주요 거장의 작품은 대부분 만나 볼 수 있다.


거기다 키르히너, 에밀 놀데, 에릭 헨켈 같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 오스트리아 분리주의의 코코슈카,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뭉크, 추상화의 칸딘스키, 미국 허드슨 화파의 거장 토마스 콜, 도시의 고독을 잡아내는 에드워드 호퍼, 추상표현주의의 잭슨 폴록, 팝아트의 릭텐슈타인 등 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모더니즘 거장들의 면모는 놀라울 따름이다. 고전 예술도 뒤러, 반 에이크, 루벤스, 고야 같은 거장은 물론 프라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와토, 프라고나르 같은 로코코의 거장,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 풍경화의 대가 루이스달,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의 대표주자 쿠르베 등 이 미술관의 다양성은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2018년 기준으로 티센 미술관은 연간 90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2002년 타계한 티센 남작의 소원대로 이 방대한 콜랙션은 가문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고 수많은 대중들이 이 미술관의 소장품을 감상하고 있다. 서양 회화의 거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이 미술관에서 평소 좋아하던 화가의 그림 앞에서 반가워할 수도 있고 아직 몰랐지만 당신의 감정을 흔들어 놓을 작품을 만나고 한동안 그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티센 미술관의 몇몇 작품을 소개하겠다.

< 미술관 카페테리아 >


1. 크리스토프 암베르거 (Christoph Amberger)

마태우스 슈바르츠의 초상

< 크리스토프 암베르거 - 마태우스 슈바르츠의 초상 >

유럽 미술관에는 초상화가 많고 그들 중 대부분은 왕족이나 귀족이다. 그들의 인생에 대해 남겨진 기록을 보면 대부분 정치, 전쟁, 혼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종종 유난히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사람도 있다. 크리스토프 암베르거가 그린 마태우스 슈바르츠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패션 화보’를 만든 사람이다. 마태우스는 1520년부터 1560년 사이에 자신이 입었던 옷들을 삽화와 함께 기록을 남겼고 이 책은 통상 영어로 “Book of Clothes"로 불린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아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의상을 사들이는 데 썼다고 한다. 당시는 계급에 따라 의상규제가 있던 시대이다. 타고난 패셔니스트인 마태우스에게 이런 규제는 분명 답답한 것이었겠지만 그는 규제를 피해 가며 최대한 멋을 부렸다고 전해진다.


마태우스는 1497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516년부터 당시 전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은행가 집안 중 하나인 푸거(Fugger) 가문의 회계사로 일했다. 23세가 되던 1520년, 마태우스는 패션 화보 제작에 착수한다. 나르시스 리나(Narziss Renner)라는 화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복원해 그리도록 한 것이다. 태어났을 때, 아기였을 때, 학생이었을 때, 푸거 가문의 수습사원일 때 등의 모습을 담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그린 그림이 36개에 달한다. 자기애가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 마태우스가 고용한 화가 이름이 ‘나르시스’라니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 지, 아니면 마태우스가 내심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한 것인 지 궁금해진다.

< 유럽 최초의 패션 화보, Book of Cloth >

1536년까지는 나르시스가 마태우스의 패션을 화폭에 담았고 그 이후는 이 그림을 그린 주인공인 크리스토프 암베르거 혹은 그의 화실에서 일하던 다른 수습생들이 마태우스의 패션을 기록해 나갔다. 마태우스는 신성로마 황제의 연회, 고용주 가문인 푸거가의 결혼식, 오스트리아 공작이었던 페르디난드의 방문 등 굵직한 일이 있을 때는 거의 빠짐없이 자신의 의상을 기록하였는데 거기에는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라틴어 문구를 종종 적었다고 한다. "Omne quare suum quia" 한국어로 해석하면 대략 ‘모든 원인에는 그 이유가 있다’라는 것인데 자신이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옷을 입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뜻 이리라.


티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태우스의 모습은 1542년도에 그려진 것으로 그의 나이 45세 때이다. 그림의 창문 쪽을 보면 1542라는 숫자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부리부리한 눈에 좋은 풍채를 가진 마태우스는 검은색 모자, 검은색 상의를 입고 왼 손에는 네 개의 반지를 끼고 있다. 자신이 즐겨 인용하던 문구를 떠올려보면 이 날, 이렇게 옷을 입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인데 거기까지는 기록이 없다. 창 밖의 어두운 먹구름과 창 가의 와인으로 미루어 볼 때, 마음속에 뭔가 고민이 있던 시기가 아닌가 추측해 볼 따름이다.


이 그림을 그린 크리스토프 암베르거는 독일의 르네상스 화가로 마태우스처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활동했다. 당시 초상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그린 초상화 중에는 로마 이후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주 중 하나인 카를 5세(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도 있다. 카를 5세는 마태우스에게 귀족 작위를 줬던 황제이기도 하다.

2.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시소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시소 >

집 현관에 그림을 하나 걸어둔다면 어떤 그림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인상파를 선택하지 않을까 한다. 메시지보다 자연에 집중한 인상파 회화는 위안을 받기에 좋은 장르이다. 인상파 외에 고전회화 중에서는 어떤 장르가 인기 있을까? 머릿속에 얼핏‘로코코’가 떠오른다. 화사하고 우아하며 경쾌한 로코코 회화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것 같다. 프라도 미술관은 로코코 회화가 많지 않은데 로코코 팬들은 실망할 필요가 없다. 건너편 티센 미술관은 소위 로코코의 3대 거장이라는 와토(Watteau), 부세(Boucher), 프라고나르(Fragonard)의 그림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 프라고나르의 ‘시소’란 작품을 소개한다.


흔히 프라고나르는 로코코의 마지막 거장이라고 한다. 로코코 회화의 선배인 부세는 어린 프라고나르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나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고 샤르뎅(Chardin)의 화실로 보냈다. 샤르뎅은 고양이가 있는 정물화를 많이 그렸고 서민들의 일상생활도 따뜻하게 그려냈다. 샤르뎅의 작품은 티센에 있으니 한 번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기 바란다. 샤르뎅의 화실에서 수습생으로 지내던 프라고나르는 로마와 나폴리, 베니스 등 이탈리아를 여행하였고 거기서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와 교제하게 된다. 위베르 로베르는 옛 로마 유적을 많이 그려서 ‘폐허의 화가’로 불린다. 위베르 로베르의 작품도 역시 티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잠깐 딴 길로 새어서 얘기를 해보자. 프라고나르를 소개하다 보니 그와 연관이 있었던 화가를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소개하게 되는 데 이미 얘기했듯 그들의 작품들도 대부분 티센에 있다. 티센 미술관을 관람하는 재미, 티센 콜랙션의 놀라움이 여기에 있다. 워낙 다양한 콜랙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화가를 중심으로 그와 연관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한 군데서 감상할 수 있다. 어떤 화가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그 화가의 주변 인물들도 함께 알아가는 것이 좋다. 미술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지는 것은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특징을 더 두드러지게 파악할 수 있고 혹은 그 화가에게 영향을 끼친 화가도 알아갈 수 있다. 깊이 파다 보면 넓게 파게 되는 법이다.


프라고나르의 애기를 마무리하자면 그는 야심 차게 그린 일련의 로코코 풍의 그림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하자 신고전주의로 기울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그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사형되었고 프라고나르는 고향인 그라스(Grasse)로 돌아온다. 19세기 초반 파리로 다시 돌아오지만 얼마 못 가 1806년에 사망한다. 사망 후 프라고나르는 거의 잊혀졌지만 19세기 후반 독일 미술사가의 소개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이제 ‘시소’라는 그림을 보자. 시소의 오른쪽에는 화사한 모습의 여인이 들어 올려져 있고 왼쪽에는 남자 한 명과 아이 두 명이 시소를 내려 누르고 있다. 남녀는 사선의 구도를 이루고 있어 바로크 회화처럼 적정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여성은 시소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데 그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시소 앞에는 물통과 과일이 놓여 있으니 이 놀이가 끝나면 즐거운 피크닉이 이어지지 않을까. 이 그림은 프라고나르의 가장 유명한 그림을 하나 떠오르게 한다. 바로 영국의 왈래스 콜랙션이 소장하고 있는 ‘그네’라는 그림이다.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그네 >

두 그림 모두 그네와 시소라는 놀이기구를 중심으로 한 쌍의 남녀를 등장시킨다. 화면 오른쪽의 여성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왼쪽의 남성이 그 여성을 올려다보는 시선의 구조도 동일하다. 남녀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면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상대방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여 사랑에 빠지기 쉽다고들 한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시소나 그네 같은 놀이기구가 롤러코스터 역할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시소도 그렇고 그네도 그렇고 여성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게 나뭇가지 혹은 그네 줄을 꽉 쥐고 있다. 아래에 있는 남자와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심장아, 진정해. 나는 그저 이 시소(그네) 때문에 두근거리는 것이라고!‘ 마침내 여성이 그 손을 놓고 아래의 남자 품 속으로 뛰어드는 상상을 해 본다. 다행히 남자는 좋은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행복한 연인이 되었을 것이다. 로코코 그림을 보면서는 그런 해피앤딩을 상상해 보고 싶어 진다.

3. 베리스 모리조 (Berthe Morisot)

프시케 거울

< 베리스 모리조 - 프시케 거울 >

티센 미술관의 인상파 작품은 2층과 1층(각각 한국의 3층과 2층)에 흩어져 있다. 참고로 티센 미술관은 남작의 콜랙션과 그의 아내인 까르멘(Carmen) 남작부인의 콜랙션으로 나눠지는데 남작의 콜랙션은 방 번호가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되고 남작부인의 콜랙션은 알파벳으로 표시된다. 티센의 인상파 콜랙션은 남작이 수집한 작품도 있지만 남작부인의 콜랙션이 더 많다. 앞서도 설명하였듯이 티센은 모네, 마네, 르노와르, 드가, 고흐, 세잔 등 인상파 거장들의 그림을 고루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눈과 귀에 익은 이들 거장의 작품 외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한 그림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베리스 모리조(Berthe Morisot)의 ‘프시케 거울’이란 작품이다.


베리스 모리조는 미국의 매리 커셋과 함께 인상파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화가이다. 2013년 경매에서 베리스 모리조의 작품이 약 천백만 불에 판매된 적이 있는데 이는 당시 여성 아티스트의 경매가로는 최고 기록이었다고 한다. 굳이 이런 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녀는 무명의 화가가 아니다. 다만 인상파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들에 비해서는 조금 생소할 수 있다는 애기이다. 베리스 모리조는 1841년 프랑스 부르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앞서 소개한 로코코의 거장, 프라고나르의 후손이다. 모리조는 언니인 에드마와 함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많았으며 바르비종 화파의 거장 중 한 명인 코로에게서 배우기도 한다. 1868년, 모리조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평소 동경해 마지않던 마네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마네는 그리 상냥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첫 만남 이후 베리스 모리조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해 기탄없이 애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베리스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인상파의 또 다른 거장인 르노와르 역시 모리조를 높이 평가하였고 가장 소중한 인연 중 한 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마네 -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스 모리조 >

모리조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처럼 야외에서 그리기도 했으나 그녀의 대표작은 실내에서 그려진 작품이 많다. 특히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들을 즐겨 그렸다. 모리조 자신이 일상에서 늘 접하게 되는 장면, 늘 만나게 되는 인물들을 즐겨 그린 것이다. 그녀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붓터치가 가볍고 경쾌하여 유화인데도 얼핏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인상파 작품은 인물이나 배경의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은데 베리조의 작품은 더욱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흔히 인상파는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잡아내었다고 한다. 모리조의 작품은 특유의 맑은 색감 덕에 빛보다도 물이 번져가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티센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에는 ‘프시케 거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한 소녀가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전신 거울을 프시케 거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리조 그림답게 그림의 주제는 실내 공간의 여성이고 붓 터치는 가볍고 경쾌하다. 프시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에로스의 사랑을 받는 소녀이다. 따라서 어떤 평론가는 이 그림을 프시케 신화와 연관시켜 그림 속의 소녀가 거울을 비춰보는 것은 성적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프시케는 철학에서 혼이나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가 비춰보고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화가의 의도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림 속에서 메시지를 읽고 그림 속의 사물이나 인물에서 알레고리나 상징을 찾는 도상학 혹은 도상 해석학적 접근은 인상파 그림에 적합하지 않다. 인상파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순간적으로 잡아낼 뿐, 그림에 특정한 메시지를 넣지 않는다. 따라서 이 그림은 거울 앞에 선 소녀의 모습을 포착하였을 따름이다. 우리가 인상파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 그림 속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볼수록 반하기보다 첫눈에 반하게 되는 그림이 바로 인상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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