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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콜렉션, 시민 모두의 예술

예술로 실천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사로 갈디아노 미술관

by 강명재

유럽의 대형 미술관을 방문하다 보면 연달아 쏟아져 나오는 거장들의 작품들에 압도당하기 쉽다. 벽면을 가득 채우다 못해 머리 위에까지 빼곡히 걸어놓은 걸작들을 보면 스탕달 신드롬이 엄습할 것 같기도 하다. 어렵사리 시간과 비용을 들여 유럽을 방문했다면 당연히 대형 미술관부터 우선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대형 미술관을 관람한 다음 날에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작은 미술관을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 우리가 미술 관람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연상 – 오후의 햇살 속에서 천천히 작품 사이를 거닐고 이름도 생소한 작가의 그림 앞에 몇 분이고 서서 쳐다보는 그런 경험 – 은 사실상 대형 미술관에서는 하기 힘들다. 예술과 함께 하는 여유로운 한 때를 꿈꿔 왔다면 지금 소개하는 라사로 갈디아노 (Lazaro Galdiano) 미술관을 지나치지 말자.

< Lazaro Galdiano 미술관 정원 >

티센 보르네미사 (Tyssen Bornemiza) 미술관이 마드리드 최대의 개인 콜랙션이라면 라사로의 콜랙션은 두 번째 규모이다. 사실 라사로의 작품 수는 만만치 않다. 한 층의 크기가 그리 넓지 않긴 하지만 총 4층 건물에 예술품이 가득 차 있다. 정성 들여 한 작품, 한 작품 감상하다 보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프라도나 티센에 비해서는 아담(?)한 느낌이 있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 건립자인 라사로 갈디아노는 이 미술관의 설립자인 호세 라사로 갈디아노(Jose Lazaro Galdiano)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라사로는 19세기 후반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역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업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예술 수집가로서 스페인의 근대화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갈디아노의 콜랙션 형성에는 그의 아내가 큰 역할을 했다. 아내의 이름은 파울라 플로리도 이 톨레도(Paula Florido y Toledo)로 아르헨티나 사람이었으며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울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나 결혼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불행했다. 아니, '불행'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닥친 비극을 묘사히기에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 녀는 갈디아노를 만나기 전에 세 번 결혼했는데 세 명의 남편이 모두 일찍 사망해 버린 것이다. 잇단 불행에 지친 그녀는 자녀를 데리고 유럽으로 떠난다. 새로운 삶을 위해 유럽에서 남미로 건너가는 사람이 많은 시대였지만 그 녀는 거꾸로 남미에서 유럽으로 떠나며 불행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신은 그녀에게 마냥 잔인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로마에서 라사로를 만나 네 번째 결혼을 하였고 다행히 스페인에서 안정적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미술관 내부 모습 >

라사로와 파울라는 모두 예술품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수집을 뒷 받침 할 만한 재력도 충분했다. 미술관을 채우고 있는 작품을 수집하는 데 있어 파울라의 경제력과 안목이 분명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이름에는 남편인 라사로 갈디아노만 들어가 있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지금의 미술관 건물은 부부가 실지로 거주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1947년 라사로가 사망한 직후, 그의 모든 수집품은 국가에 기증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라사로 재단이 세워진다.


앞 서 말했다시피 미술관은 4층 건물이다. 3층부터 0층으로 내려오며 감상하는 것이 좋다. 3층은 무기, 조각, 장식, 코인 등을 전시하고 있고 2층은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스페인을 제외한 유럽 콜랙션, 1층은 스페인 작품, 마지막으로 0층은 라사로 부부에 대한 소개와 콜렉터로서의 취향을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프라도나 티센이 회화 위주의 피나코테크라면 라사로 미술관은 종합 미술관이다. 회화, 조각은 물론 식기나 가구, 장신구 같은 장식예술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다. 자그마한 크기의 장식 예술은 쉽게 지나치기 쉽지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대작과는 또 다른 감상의 재미를 준다. 예를 들어 3층에 있는 묵주 컬렉션이나 식기 컬렉션의 다양한 디자인을 비교하다 보면 작은 일상용품에 녹아든 예술성에 매료된다. 전시창 너머의 작품들을 보며 마치 19세기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듯한 상상을 하곤 했다. 친구에게 생일선물을 해야한다면, 혹은 집들이를 위한 새로 식기를 사야한다면 무얼 사는 것이 좋을까. 지금부터 3층부터 0층으로 내려가는 동선으로 몇몇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 묵주 컬렉션 >


< 식기 컬렉션 >


1. 라포르트 블레어지 (Laporte blairzy)

테이블 장식


< 테이블 장식 일부 - 라포르트 블레어지 >
< 테이블 장식 전시 모습 >

‘Centro de Mesa’라는 물건이 있다. 영어로는‘Centerpiece’라고 한다. 테이블 중앙에 놓는 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테이블 장식은 꽃이나 식물 같은 자연소재가 될 수도 있고 지금 여기에서 소개하는 조각처럼 인공물이 될 수도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시각과 미각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침샘을 자극하는 것은 예쁜 음식만은 아닐 것이다. 음식을 둘러싼 예쁜 장식도 분명 식욕을 자극할 수 있다.


훌륭한 테이블 장식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일단 크기가 너무 커서 마주 앉은 상대의 시야를 가려서는 안 된다. 자연물 장식일 경우는 그 향기가 음식의 미각을 해쳐서는 안 된다. 아울러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다른 물건들, 즉 식기, 포크, 나이프, 테이블 보와의 조화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는 시기와 잘 어울리면 금상첨화이다. 예를 들어 계절의 분위기를 표현한다든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특정 이벤트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테이블 장식은 식사를 초청한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미적 취향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이고 초청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테이블 장식이 근사한 집으로 식사 초대를 받았다고 상상해보자. “음식 냄새가 좋군요.”라는 식으로 음식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며 초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테이블 장식을 고른 호스트의 심미안을 칭송한다면 더욱 훌륭한 식사 매너가 되지 않을까. 식사라는 것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본능적 활동이 아니라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생활이기도 하기에 테이블 앞에 앉아서는 훌륭한 매너가 필요하다. 영화 ‘킹스맨’의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테이블 장식은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나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나 식사는 문화이고 매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지금 소개하는 테이블 장식은 18세기 프랑스 풍으로 차려입은 여인들을 청동으로 조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만든 라포르트 블레어지(Laporte blairizt)는 19세기 프랑스 남부 뚤루즈에서 활동한 조각가이다. 여러 피스로 이루어진 여인들의 조각은 모두 일 하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힘들다가 보다 즐겁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18세기 초중반 프랑스를 휩쓴 로코코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 조각품들은 라사로와 파울라의 결혼식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앞 서 말했듯이 테이블 장식은 식사를 초대하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한다. 이 장식을 선택한 라사로와 파울라는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골랐을까. 세 번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45세의 나이로 유럽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파울라는 엄숙하기보다 경쾌한 장식을 원했을 것이다. 결혼식 피로연 식탁에 올릴 테이블 장식을 고민하다가 이 사랑스러운 조각 앞에서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는 그 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2. 프랑수와 링케 (Francois Linke)로 추정

실린더 데스크 (일명 마리아 렉진스카)

< 프랑소와 링케로 추정 - 실린더 데스크 >

‘왕의 책상’이라 불리는 가구가 있다. 프랑스 루이 15세의 책상을 그렇게 부른다. 유럽의 수많은 왕들이 많고 많은 책상을 사용했을 것인데 루이 15세의 책상에만 고유명사처럼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루이 15세의 책상을 처음 디자인 한 사람은 18세기 최고의 가구 장인이었던 장 프랑수와 외벤(Jean-Francois Oeben)이다. 외벤은 이 책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그의 수제자였던 장 앙리 리즈네(Jean Henri Riesener)가 마무리하였다. 18세기 프랑스 가구계의 최고 장인 두 사람이 사제간의 대를 이어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과연 '왕의 책상'이라 부를만하며 단어 순서를 바꿔 '책상의 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왕의 책상은 디자인도 아름답지만 기술도 독창적이었다. 정밀한 실린더 장치를 통해 덮개를 열고 닫을 수 있어 실리더 책상이라고도 불렸다.


< 장 프랑소와 외벤, 장 앙리 리즈네 - 왕의 책상 >

라사로 미술관에 있는 책상은 이 ‘왕의 책상’을 모방하여 만든 작품이다. 제작 시기는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반으로 추정한다. 그럼 이 책상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19세기 최고의 에바니스트, 프랑수와 링케(Francois Linke)로 추정하고 있다. 에바니스트는 가구 제작자를 이르는 호칭으로 이지은 작가님의 “귀족의 시대, 탐미의 발견”이라는 책을 보면 설명이 잘 되어있다. 작가님의 설명에 의하면 가구 제작자는 크게 ‘에바니스트’와 ‘메뉴지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주로 책상이나 서랍장을 만들었고 후자는 의자나 침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링케는 왕의 책상을 여러 점 만들었는데 그중 3점은 소장처가 확실하다. 기록에 의하면 4점을 더 제작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소장처를 모른다. 라사로 미술관에 있는 이 책상은 정확한 소장처를 모르는 4개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이 책상의 별칭은 마리아 렉진스카(Maria Leczinska)이다. 왕의 책상을 사용하였던 루이 15세의 왕비 이름이다. 이 책상이 전시되어 있는 곳은 2층 19번 방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프랑스, 영국 예술품을 모아놓은 이 방에는 로코코에서 낭만주의 시대의 예쁜 장식품이 많다. 그 많은 장식들 중에서도 이 책상이 가장 눈에 띄었다. 책상은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럽고 책상 양 쪽의 청동 조각은 사랑스럽다. 식물을 모티브로 책상 덮개를 수놓은 장식은 품격을 더 해 주며 상단의 시계는 실용성과 장식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책상을 보고 있자니 나무와 청동은 궁합이 좋은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어른들은 “엉덩이 떼지 말고 책상 앞에 좀 앉아있어라!”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책상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가구이다. 학교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책상 앞에 잠시 서서 한숨을 쉬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이런 책상이라면 언제든 앉고 싶어 질 것 같다. 이 책상에서 공부를 한다면 어떤 시험이라도 합격할 수 있을 것 같고 이 책상에서 일을 한다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일 텐데. 명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이토록 멋진 책장 앞에서는 괜스레 사무실의 내 책상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책상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가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책상에 앉기 전에 행하는 자신만의 의식 혹은 습관이 있을 것이다. 서랍 자물쇠를 열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고 혹은 컴퓨터부터 부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들은 책상에 앉기 전에 커피부터 뽑아올 수도 있다. 라사로 미술관에 있는 왕의 책상을 가지고 있다면 책상 앞에서 행하는 첫 의식은 덮개를 여는 것이 될 것이다. 실린더로 작동하는 아날로그 장치의 손 맛, 향긋한 나무향기가 무척 기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작업을 다 마치고 덮개를 닫으며 일어설 때는 마치 무대의 막을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덮개를 여 닿는 상상, 좋아하는 책을 읽는 상상, 사각 사각 펜으로 글을 쓰는 상상. 예술이 된 책상 앞에서 여러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3. 카이사르 접시

작자 미상 ( 플랑드르 장인 )

< 미상의 플랑드르 장인 - 카이사르 접시 >

미술관 0층은 라사로 콜랙션의 하이라이트이다. 회화, 조각, 장식, 유물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최고의 걸작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여유를 가지고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만약 시간이 없다면 0층만 감상할 것을 추천한다. 걸작들이 즐비한 0층에서도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접시’이다. 스페인은 예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가 발달한 곳이다. 마드리드의 다양한 미술관을 방문하여도 회화나 조각에 비해 카이사르의 접시 같은 금속공예는 많지 않다. 만약 스페인에서 고전시대의 금속공예 작품을 보고 싶다면 라사로 미술관이 적격이다. 라사로 미술관은 카이사르의 접시 외에도 다양한 금속공예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접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상단의 인물상, 인물상 밑의 접시, 접시 밑의 받침으로 나누어진다. 인물상과 접시는 16세기 플랑드르 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하단의 받침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덧붙여진 것이다. 카이사르 접시와 같은 고전시대 금속공예는 반드시 가까이에서 감상해야 한다. 회화처럼 색채도 없이 단색으로 만들어진 데가 크기도 그리 크지 않은 편이라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런 류의 작품이다. 카이사르 접시도 높이가 45cm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수의 예술품이 몰려 있다 보면 일단 크기가 큰 작품부터 눈이 가는 법이다. 하지만 ‘정교함’은 ‘장대함’ 못지않게 감동을 안겨준다. 일단 접시에 바짝 다가가서 정교함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자.


접시 위의 인물은 작품 제목 그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는 숱한 영웅들을 탄생시켰지만 그중에서도 한 명만 꼽으라면 카이사르가 될 것이다. 7년에 걸쳐 갈리아(프랑스) 지방을 정복한 이야기라던지 천재 장군으로 꼽혔던 폼페이우스를 굴복시킨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다. 접시 위의 카이사르는 왼손에는 허리에 찬 칼을 잡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긴 창을 세워 잡고 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창. 로마 역사 최강의 장군에게 방패 따위는 필요 없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간 오른발 덕에 조그마한 인물상이 좀 더 동적으로 보인다. 인물상 밑의 접시는 카이사르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중요한 사건 4가지를 묘사하고 있다. 갈리아 원정의 주요 전투인 아바리쿰 점령, 폼페이우스와의 전투, 루비콘 강 건너기, 로마 입성이 그것이다. 접시를 기울여서 자세히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 작품은 12개의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로마 시대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의 책인 ‘12명의 카이사르(황제 열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카이사르부터 도미티아누스까지 12명의 황제를 모델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에 가까운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수에토니우스의 저서에는‘12명의 카이사르’라는 별칭이 붙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카이사르가 워낙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또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기에 유럽의 황제들을 ‘카이사르’라 부르기도 했다.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가 모두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호칭이다.


이 작품에 대해 조사하며 놀란 것은 자세하고 세심한 기록이었다. 16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을 소장하였던 10명이 넘는 사람의 국적, 이름은 물론 거래된 가격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카이사르를 제외한 나머지 11 작품이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 모두 추적하여 기록해 두었다. 45cm의 조그마한 은접시에 대해 이토록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작품의 정교함에 이어 기록의 정교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카이사르 외의 다른 황제들은 어떻게 묘사되었을지 무척 궁금하다. 언젠가 12명의 카이사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다면 멋지지 않을까.


4. 루카스 크라나흐 (Lucas Cranach, the Elder)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경배받는 아기 예수


< 루카스 크라나흐 -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경배받는 아기 예수 >

2층을 15번 방부터 19번 방까지 순서대로 감상하다 보면 각 방을 채우고 있는 예술품의 색감과 분위기가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 작품이 있는 15,16번 방은 다소 밝은 분위기이고 플랑드르 예술이 있는 17번 방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이다. 독일 작품이 있는 18번에 이르면 무게와 어두움이 더 강해지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와 영국 작품이 있는 19번 방은 가장 화사하다. 대체로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18번 방에서도 가장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이 바로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의 “세례자 요한의 경배를 받는 아기 예수”이다.


루카스 크라나흐는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화가였고 이름도 같았기에 아버지를 대(大, 영어로는 the Elder) 루카스 크라나흐, 아들은 소(小, 영어로는 the Younger) 루카스 크라나흐로 부른다. 대 루카스 크라나흐는 신성로마제국 작센 공작의 궁정화가였으며 16세기 전반의 가장 유명한 독일 화가였다. 또한 대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파 신자이기도했다. 16세기 초반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온 유럽이 술렁이는 시기였는데 대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의 절친이자 일찍부터 루터파로 개종한 종교적 동지이기도 했다.


“세례자 요한의 경배를 받는 아기 예수”의 배경은 칠흑 같은 검은색이다. 아무런 장식이나 풍경 없이 순수한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우리는 두 인물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아기 예수와 세례자 요한은 분명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보통의 어린아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크라나흐의 솜씨가 놀라운 이유이다. 어떤 인물을 그린다고 했을 때 화가가 표현해야 하는 것으로는 감정, 성품, 아우라 등이 있을 것이다. 일단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기쁨’은 ‘웃음’으로 ‘슬픔’은 ‘눈물’로 분노는 ‘치켜 올라간 눈꼬리’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감정은 표정이나 생리현상으로 어느 정도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성품이나 아우라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지식하다’,‘자상하다’ 같은 형용사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나타낼 것인가. 크라나흐는 인물을 그리는 것을 넘어 그 인물의 아우라까지 훌륭히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 속의 두 인물을 보면 누구라도 엄숙함을 느낄 것이다. 아이와 엄숙함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에 아이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엄숙함을 자아내게 그린 것은 더욱 놀랍다.


크라나흐의 그림은 스페인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인 무릴요(Bartolomo Esteban Murillo)의 작품 두 개와 비교하면 더욱 흥미롭다. 먼저 비교해 볼 무릴요의 작품은 “Los Ninyos de la Concha(조개의 아이들)”이다. 왼쪽의 아기 예수가 오른쪽의 아기 요한에게 조개 속에 물을 담아 건네주고 있다.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에게 닥쳐올 비극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무릴요는 인물들을 부드럽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무릴요는 가톨릭 신앙이 독실하였고 인품이 자상했다고 한다. 크라나흐가 엄숙함으로 신앙심을 표현했다면 무릴요는 따뜻함으로 신앙심을 표현하였다. 무릴요의 이 그림은 프라도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 무릴요 - 조개의 아이들 >

크라나흐의 그림을 좀 더 살펴보자. 세례자 요한은 왼손으로 양을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 구세주가 될 아기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아기 예수는 십자가를 들고 발 밑에 뱀과 해골을 두고 있다. 여기서 뱀은 원죄,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윈죄와 죽음을 초월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 더해 이 그림은 신교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통해 –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상징한다 –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가톨릭은 ‘무염시태’를 통해 예수님이 원죄 없이 탄생했다고 한다. 무염시태는 동정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신학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해 성모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무염시태는 로마 가톨릭에서만 인정하는 개념으로 가톨릭 신앙이 강한 스페인에는 무염시태와 관련된 걸작이 특히 많다.


이제 크라나흐의 그림과 비교할 무리요의 두 번째 그림을 살펴보자. 바로‘무염시태’이다. 스르바란(Francisco Zurubaran), 루벤스(Peter Paul Rubens),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등 프라도 미술관은 가히 무염시태의 각축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대가들이 그린 무염시태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무릴요이다. 무릴요가 그린 성모는 아기 예수와 아기 요한처럼 더없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크라나흐는 개신교 교리를, 무릴요는 가톨릭 교리를 자신의 그림에 녹여내고 있다. 화풍과 교리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두 화가를 비교하는 것은 미적인 즐거움과 지적인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 무릴요 - 무염시태 >

5. 사카리아 곤살레스 벨라스케스 (Zacaria Gonzalez Velazquez)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마누엘라 곤살레스 벨라스케스

< 사카리아 곤살레스 벨라스케스 -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마누엘라 곤살레스 벨라스케스>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본다. 머리에는 화관과 티아라를 쓰고 있고 귀에는 진주 귀걸이,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데다 왼 손 중지와 약지에 각각 반지를 끼고 있다. 소녀가 입고 있는 높이 올라오는 허리와 짧은 소매의 실내 원피스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 제정시대에 유행한 옷이다. 소녀가 앉아있는 피아노는 지금도 고가의 물건이지만 19세기에는 더욱 비싼 물건이었다. 이렇듯 머리 끝에서 손 끝까지 부티(?) 나는 이 소녀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사카리아 곤잘레스 벨라스케스(Zacaria Gonzalez Velazquez)의 조카인 마누엘라 곤살레스 벨라스케스(Manuela Gonzalez Velazquez)라는 소녀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초상화란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면서 부유한 시민계급이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서민들의 모습이 그림에 등장하기도 하나 그것은 초상화라기보다 풍속화에 가깝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19세기에 태어난 데다 당대 가장 훌륭한 솜씨를 가진 화가를 삼촌으로 둔 덕에 이렇게 아름다운 초상화를 가질 수 있었다. 이 그림이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그림 속 모델이 그리 자연스럽지 않아서였다. 다분히 연출된 모습이란 것인데 그 점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매력이다.


우리가 취업을 위한 증명사진이나 거실에 걸어두기 위한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를 찾는다면 평소보다 더욱 신경 써서 치장할 수밖에 없다. 사실 더 세심하게 꾸미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진사님이 약간의 기술(?)을 발휘해 주길 바랄 것이다. 모처럼 마음먹고 찍은 사진 속 내 모습에 다크써글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 사진사님을 '리얼리즘의 거장'이라 칭송할 것인가. 당시 초상화가 지금의 스튜디오 사진보다 훨씬 더 귀한 기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그림의 과장된 연출은 당연히 이해가 간다.


본격적으로 이 그림의 연출을 살펴보자. 일단 소녀의 나이를 보자. 12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 데 이토록 침착한 눈빛은 그 나이의 소녀에게서 나오기 힘든 것이다. 자녀의 증명사진을 찍어본 부모는 그 나이의 아이에게서 이런 표정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소녀가 걸치고 있는 장신구는 평상시 실내에서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집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화관, 티아라, 귀걸이, 목걸이, 반지까지 풀 세트로 착용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우리를 향해 돌아보는 모습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조카 곁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피아노 앞에 앉은 조카에게 “자, 이제 이쪽으로 돌아봐줄래?”라고 요청해서 그린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빛의 처리이다. 조카를 비추는 환한 빛은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듯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그림의 매력은 그렇게 연출된 모습이다. 19세기 초에 살았던 12세 소녀가 한 껏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지 않는가. 예쁜 모습으로 남고 싶어 하는 이 소녀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화가의 조카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이 그림의 매력이다. 사카리아는 왕립 예술원의 회화 부분 이사직을 맡았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이고 또 그만큼 바쁘기도 했을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나 종교화로 분주했던 화가가 모처럼 시간을 내어 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부분 사용하고 막상 가족에게는 그 재능을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쑥스러워서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매일 그 재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라면 집에서도 그 재능을 보이기가 피곤해서일 수도 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조카를 그리고 있는 사카리아의 모습이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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