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예술이라 하면 미술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마드리드는 클래식 콘서트를 즐기기에도 좋은 도시이다. 유럽의 클래식 수도는 누가 뭐래도 비엔나이기에 비엔나 관광 코스에는 클래식 공연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비엔나를 제외하면 클래식을 강조하는 여행지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마드리드 소개 책자에도 클래식 애기는 별로 없다. 아마 음악에 대한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럽을 여행할 때 미술관에 비해 음악회에 대한 관심은 조금 덜 한 것으로 보이는 데 거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미술관에 비해 콘서트 입장료가 더 비싸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테고 클래식이나 재즈는 팬 층이 두텁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 마드리드 국립 콘서트홀 내부 >
또 하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위 공간예술과 시간예술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레싱(Lessing)의 예술분류에 따르면 회화,조각,건축은 공간예술이고 음악,문학,무용은 시간 예술이다. 공간예술은 ‘진품’의 가치가 크지만 시간예술은 따지고 보면 진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작곡가가 써내려간 오선지나 작가가 친필로 쓴 원고 같은 것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감명 받는 것은 오선지나 원고지 때문이 아니라 오선지가 표현하는 음악, 원고지가 전해주는 서사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류를 하고 보면 사람들은 굳이 콘서트홀이 아니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보다 여행 중인 기회가 아니면 진품을 볼 수 없는 미술에 좀 더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음악이 복제(혹은 재연)가 쉽다고 해서 휴대전화 어플로 듣는 음악이나 베를린 필의 실황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깔끔하게 녹음되고 전문 엔지니어의 손을 거친 음악 파일이 라이브보다 훌륭한 면도 있다. 하지만 연주자의 악기에서 나온 음이 직접 내 귀에 들어올 때의 경험은 이어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을 전해준다. 게다가 몰입해 있는 연주자, 그 연주를 감상하는 청중, 콘서트 홀의 예술적인 장식이 더해져 콘서트 홀을 가득 매운 예술적인 분위기는 결코 기계가 만들어내지 못한다. 음악을 듣는 것은 즐겁다.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것은 더욱 즐겁다. 하지만 음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연주하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닌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그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이 서로 교감하는 것이다. 콘서트 홀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아니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마드리드에는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여러 장소가 있다. 그 중 몇 군데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장소는 국립 콘서트 홀이다. 국립 콘서트 홀은 1988년에 개관하였다. 유럽의 유구한 음악 역사를 생각할 때 이 장소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프랑코 독재가 종식된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대중들을 위한 문화사업이 추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콘서트 홀은 주로 오케스트라 공연이 펼쳐지는 심포니 홀(Sala Sinfonica)과 독주 혹은 실내악 위주로 공연하는 실내악 홀(Sala de Camara)로 나뉘어진다. 두 개 홀의 입구가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으므로 자신의 예약한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 지 미리 확인이 필요하다.
< 마드리드 국립 콘서트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협연 모습 >
콘서트 홀을 처음 보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외관이 화려하지도 않다. 국립이 아니라 구청 문화센터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부는 콘서트를 관람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음향시설과 기품 있는 장식을 가지고 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매일 펼쳐지는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높은 수준이다.
2019년에는 피아노 거장의 릴레이 연주회(Ciclo de Grandes Interpretes)가 기획 되었는데 참여 연주자의 면면을 보고 깜작 놀랐다.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안내 퀘벨릭(Anne Queffelec), 마르사 아르헤리찌(Martha Argerich) 등이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마음만 먹으면 현존하는 피아노 거장의 연주를 1년 내내 들을 수 있었다. 소콜로프가 3월, 아르헤리찌가 12월로 피아노의 황제와 여제가 상하반기를 각각 책임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상반기에는 소콜로프 연주를 감상하러 갔다. 마드리드 시민은 10회가 넘는 앵콜로 러시아에서 날아온 피아노의 황제에 경의를 표했다. 소콜로프는 녹음용 연주를 하지 않기로 유명하기에 그의 실황연주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 피아노 황제, 소콜로프 >
< 피아노 여제, 아르헤리치 >
글을 쓰고 있는 2019년 하반기 기준으로 앞으로의 연주회를 살펴보니 기사작위에 빛나는 Sir 사이먼 래틀의 런던 관현악단이 바르톡, 말러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고 러시아 국립 관현악단은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연주도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거장들의 연주 위주로 애기하였다. 하지만 국립 콘서트홀이 거장들만을 위한 장소는 결코 아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연주자나 메이저 관현악단에 비해 명성은 덜 하지만 충분히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주는 오케스트라 공연도 활발하게 진행된다. 우크라이나 국립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비발디 사계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봄 1악장부터 겨울 3악장까지 한 순간도 빼놓을 수 없었다. 국립 콘서트홀을 본부로 사용하는 스페인 국립 유소년 관현악단의 모차르트, 하이든 심포니도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이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신년 음악회도 무척 즐거웠다. 비록 비엔나만큼의 열기는 없었으나 마지막 라데츠키 행진곡의 지휘에 맞춰 신나게 박수를 칠 때는 신년 음악회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뿌듯함마저 느꼈다.
아직 클래식이 조금 낯선 분들을 위해 어떤 공연을 선택할 것인지 팁을 드리고자 한다. 평소 클래식 팬이라면 감상하고 싶은 공연이 딱 정해질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클래식이 조금 생소한 경우는 뭘 봐야 하는지부터가 고민일 것이다. 일단 연주자 보다는 작곡가에 초점을 맞춰 선택하는 것이 좋다. 초보팬에게는 일류 연주자가 연주하는 난해한 음악보다는 덜 알려진 연주자가 연주하는 유명 레파토리가 더 듣기 좋다. 바로크나 고전주의,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가 무난하다. 바흐, 헨델, 비발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밴, 슈베르트, 슈만, 쇼팽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고전음악은 보통 연주자가 많을수록 감상하기 수월하다. 종종 클래식을 처음 듣기 시작한 분들이 오케스트라가 부담스러워 독주 소나타부터 듣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어떤 분들에게는 독주가 더 듣기 편할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독주 보다는 실내악, 실내악 보다는 오케스트라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대중음악을 생각해봐도 독창이나 독주보다는 다양한 악기로 연주하는 밴드 공연이 분명 더 듣기 편할 것이다. 어떤 공연을 볼지 정했으면 그 음악을 미리 들어보고 방문하면 좋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멜로디를 실황으로 들으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데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이 언제 나올까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다음으로 클래식 콘서트 경험이 없는 분들을 위해 관람 매너에 대해서도 몇 가지 팁을 드리자면 일단 드레스 코드의 경우 그리 엄격하지 않으니 지나치게 자유분방(?) 하지 않으면 문제 없다. 그리고 연주 중에는 화장실을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정 급하면 물론 나가야겠지만 - 사실 화장실이 급하면 클래식 공연이 아니라 입사 면접 중이나 상견례 중이라 하더라도 당장 나가야 한다. - 보통 한 곡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다시 못 들어가게 한다. 또 어떤 분들은 언제 박수를 쳐야하나 걱정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남들이 치기 전에는 안 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외에 많은 분들이 걱정하는 것이 콘서트에서 졸면 어떻게 하나,라는 것이다. 클래식은 지례 지루하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런 걱정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클래식은 곡 당 길이가 길어서 그렇지 음악 자체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현대 음악이 아니라면 클래식은 기본적으로 멜로디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본인은 팝이나 락도 많이 듣지만 몇몇 대중음악은 비트와 엔지니어링에 치중한 나머지 멜로디가 실종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에 비하면 고전음악은 대부분 멜로디가 뚜렷하다. 게다가 연주시간이 긴 곡들도 분위기 전환이 많아 지루하지 않다. 연주자와 지휘자의 생생한 표정과 몰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지루함을 덜어준다.
물론 지루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졸음이 엄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예술이든 지루한 부분이 있고 피곤하면 무엇을 해도 졸음이 온다. 피곤할 때 영화관에 가면 화면에서 어벤저스와 타노스가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졸음이 쏟아진다. 클래식 연주회만 유독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편안히 귀를 기울여보자.
마드리드를 여행하게 되면 클래식 콘서트를 놓치지 말자. 클래식 팬이라면 여행 전에 콘서트 일정을 미리 확인하고 그에 맞춰 일정을 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클래식이 낯선 분이라면 마드리드를 여행하는 김에 클래식과 친해지는 기회를 만들면 좋지 않을까. 여행 중 콘서트 방문의 장점은 밤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을 감상하기 위해 뭔가 다른 일정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덜 알려진 연주자의 경우는 티켓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15-25유로) 국립 콘서트 홀의 티켓은 인터넷(entradasinaem.es)에서 구매가능한데 영어로도 번역이 제공되니 큰 불편이 없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음악산업이 잘 생긴 사람과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등을 최전선에 내세우는 바람에 음악을 생각하면 멜로디보다 시각적 영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의 본질은 ‘듣는 즐거움’이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예술이 음악인 것이다. 물론 문학도 시각에 의존하지 않지만 글을 읽다보면 오감 중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부분이 가장 클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청각적 쾌감이라는 순수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 레파토리를 자랑하는 마드리드에서 멜로디의 아름다움에 빠져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