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 시지프 신화와 진격의 거인에서 찾은 자유 이야기
[플레이리스트] 자유의 노예
https://www.youtube.com/watch?v=bjvYyzrPmJ0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c'est le suicide.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La lutte elle-même vers les sommets suffit à remplir un cœur d'homme;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 자기 인생에 어떤 목표를 상정함으로써 그를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요청에 순응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 Le Mythe de Sisyphe(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1942)
시지프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로, 신들을 속인 죄로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바위는 꼭대기에 다다르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는 영원히 그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 카뮈는 시지프를 부조리한 삶을 인식하고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시조 유미르는 시지프와 유사한 운명을 지닌 인물이다.
두 존재 모두 자유의지를 잃은 채 타인의 뜻에 따라 끝없는 반복을 강요받는다. 유미르는 죽은 후에도 좌표 세계에서 수천 년간 거인을 만들며 복종했고, 시지프는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반복한다. 두 인물 모두 형식상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존재이며, 진정한 해방은 외부의 개입(미카사, 혹은 카뮈의 해석 속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유의 노예’는 스스로 선택한 신념, 목표, 혹은 갈망이 오히려 자신을 속박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겉으론 자유롭게 보이지만, 그 자유는 오히려 책임과 강박으로 작용해 삶을 무겁게 만든다. 자유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며, 때로는 멈추는 법조차 잊는다. 결국 ‘자유의 노예’는 자유의 이름 아래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비춘다.
자유의 노예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게 꽂히는 인물이 있다면,
역시 에렌이다.
에렌 예거는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한 인물이자, 자유의 환상에 가장 깊이 사로잡힌 인물이다.
그는 벽 안의 새장 같은 삶을 거부했고, 그의 자유는 바깥세상을 보고자 하는 단순한 열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진격의 거인을 계승하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완전한 자유의 주체가 아니었다. 과거와 미래의 기억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는 결국 자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 것을 따라가는 자가 되었다.
그는 “자유롭게 살겠다”는 갈망으로 움직였지만, 사실상 진격의 거인이 보여준 미래를 연기하는 운명의 배우였던 것이다. 세계를 멸망시키는 ‘지구의 악마’가 되기를 자처하고, 수많은 생명을 희생하며 친구들과도 등을 돌렸지만, 그것마저도 이미 결말의 일부였다. 그는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모든 것은 처음부터 그 길로 흐르도록 짜여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을 죽이게 함으로써 모든 흐름을 완성한다.
에렌은 신념에 충실한 자유인이 아니라, 자유라는 이름의 운명에 사로잡힌 존재, 즉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믿으며 움직인 가장 비극적인 자유의 노예였다.
그가 갈망한 자유는 결국, 자신이 결코 벗어날 수 없던 굴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유미르와 에렌은 모두 ‘자유의 노예’지만, 그 속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미르는 태어날 때부터 철저한 복종의 존재였다.
프리츠 왕의 노예로서 살았고, 죽은 후에도 좌표 세계에서 수천 년간 거인을 만들며 살아간다. 그녀는 자유를 선택할 기회조차 없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매여 스스로를 구속한다. 그녀의 노예 상태는 자각 없는 복종이며, 자유를 모른 채 살아온 무의식의 굴레다.
반면 에렌은 자유를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추구한 인물이다.
그는 벽 안에 갇힌 삶에 반발했고,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는 갈망에서 시작해 세계를 뒤흔든다. 하지만 그는 미래를 본 뒤, 자신의 선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에 사로잡히게 된다.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믿지만, 사실상 그는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각 있는 복종자, 즉 자유의 신념에 묶인 자였다.
유미르는 자유를 상상조차 못한 노예, 에렌은 자유를 너무도 갈망한 노예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늘 책임과 결과를 동반한다.
때로는 신념이, 때로는 사랑이, 혹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이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이끌리는가가 아니라, 그 끌림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가다.
자유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을 감당할 수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유에 종속된다’는 말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피할 수 없는 역설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정의’를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자.
그는 처음엔 부당한 일에 분노하고, 소외된 사람을 돕고자 나섰다. 스스로 선택한 신념이었기에 자부심도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주변 사람들의 모순, 사회의 불합리, 심지어 자신의 작은 타협에도 민감해지기 시작한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 삶의 방향이 아니라 족쇄처럼 작용하게 된 것이다. 타인의 실수조차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끊임없는 검열을 가하며 무너져간다. 처음엔 자유롭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어느새 그 신념이 그를 지치게 하고 고립시킨다.
반대로,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어떤 틀에도 묶이지 않겠다’며 가치도, 관계도, 목표도 거부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기를 택한 이들. 하지만 그런 삶은 처음엔 자유로워 보여도,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불분명해지는 방향 없는 부유로 바뀐다.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선택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공허함만 남게 된다.
핵심은 ‘종속되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어떻게 종속되는가’다.
자각 없는 종속은 노예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할 수 있는 종속은 오히려 성숙한 자유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를 명확히 붙잡는 행위다.
삶은 매 순간 내가 어떤 바위를 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과정이다. 그 바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면, 그 무게는 형벌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가 된다.
지금 내가 밀고 있는 바위는 무엇이며, 그 바위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