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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나요?

[인생] 2: 자몽살구클럽과 룩백, 그리고 죽음

by 민석
당신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나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
<자몽살구클럽, 16p>


우리는 모두 큰 아픔을 하나씩 지니고 있잖아.
그 아픔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고 되뇌게 하지.

우리 자몽살구클럽은 서로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고,
생존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결성된 비밀 모임이야.
<자몽살구클럽, 35p>

자몽살구클럽, 한로로 (2025)


자몽살구클럽은 한로로의 첫 소설이다.


동명의 EP가 8월 공개될 예정이며, 셋리스트에서 소설의 장면들과 설정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거라고 한다.


때마침 홍콩 여행 첫 날 정오에 공개된다고 하는데, 일정을 마치고 숙소 앞 강가에서 셋리스트 전 곡을 돌려야겠다.


자몽살구클럽, 한로로(2025)


자몽살구클럽은 죽지 못 해서 살아가는 여중생 4명이 서로의 삶을 보듬고 치유해주는 구원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삶 속에 투영된 관점을 독자에게 제시해주고, '동아리'라는 공동체를 통해 한로로가 항상 이야기해오던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작가 한로로는 이 소설과 함께 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자몽살구클럽 속에 등장하는 친구들은 가상 인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에도 지금 어디선가는 수천 명의 태수가 죽음을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2023년 청소년 자살 사망자가 1,867명이라고 한다. 자살 시도율은 2.8%, 전체 청소년 중 100명 중 3명은 자살을 시도하거나 깊게 생각해보았다는 뜻.


어떤 어른이 되어야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줘야할까.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순진무구한 상상들이 연이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갓 스물이 되었던 당시의 나는 스스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곱씹고는 했다. 타의에 의한 선행도 동일한 선행이라는 인식을 꽤 오래 전부터 가져왔기에,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봉사활동을 동아리원들과 함께 다니기도 했었고, 은퇴 후에는 사회적 기업을 차리겠다는 꿈도 총명하게 간직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그런, 사회에 잠식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지만, 언젠가 실천하게 될 날이 불현듯 다가오지 않을까.


스물다섯의 내가 삶의 관점을 넓히기 위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과 생각들을 1년, 10년, 그리고 먼 미래의 나에게 전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처럼.



한로로 EP 3집 - 자몽살구클럽


책을 배송받기 전에는 한로로의 ep 3집 선공개곡 '도망'을 출퇴근 내내 들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심상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 다양한 시선이 혼재해있어서 상상의 여지를 자극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내린 결론, 도망은 '소하'의 시선이다.


한로로 - 도망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버선발로 집을 도망쳐나오는 소하의 마지막 행선지는 음악실 옥상.


현실의 극단에서 소하가 원했던 세계의 정답은 무엇이었을까. 화목한 부모님 밑에서 안온한 일상을 누리는 것?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고백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떼우는 것? 학원에 안 가고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를 하다 하루를 보내는 것?


누군가, 단 한 번이라도 그런 평범한 나날들을 소하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면 과연 소하는 끝없는 추락을 택했을까. 삶에서부터 도망치는 선택을 하게 된 소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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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유민의 시선에도 투영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우정을 넘어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나눴던 둘이기에, 내성적인 유민의 옆자리를 항상 채워주었던 태수의 쾌활함이 없어진 자리는 너무도 크게 다가왔으리라.


부제인 'can i be me?'는 태수가 없이도 나라는 사람 오롯이 내 인생을 끌어갈 수 있을까, 태수와 새끼손가락 걸고 스무살 첫 순간을 함께 하자던 약속이 없어진 내가 과연 세계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함축된 문구가 아닐까 하며.





자몽살구클럽을 완독하자마자 머릿속에서 오버랩된 작품은 바로 '룩백' 이다.


룩백과 자몽살구클럽은 여러 가지로 닮아 있다. 구원의 서사, 학창시절의 아픔과 찬란함, 친구의 죽음까지.


다만, 크게 두 가지의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죽음의 방식, 두 번째는 결말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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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두 작품 모두 쿄모토의 죽음, 태수의 죽음을 통해 서사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다만 쿄모토는 타살, 태수는 자살로 생을 마무리 하게 된다는 점에서 큰 분개를 갖는다.


쿄모토의 옆을 지키지 못했던 후지노의 상심이 클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태수의 옆자리에 있던 유민의 상심이 클지 분간해내기는 정말 어렵다. 필히 둘 다 본인을 자책하며, 자신의 행동을 원망하며 살 것이다.


'내가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면, 이 아이에게 네컷을 그려주지 않았다면' 하는 무한한 상상의 굴레가 이어질테고, 교무실 문 밖에서 쳐다만 보고 있던 자신의 소극적인 모습을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것이다.


두 번째는 결말의 회수다.


자몽살구클럽은 현실의 극단에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을 택하고, 룩백은 현실의 극단에서 본인의 삶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결말을 제시한다.


룩백의 원작을 아직 읽어보지 못 했지만, 영화가 자몽살구클럽보다 좋았던 것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둘'이라는 서사를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시골의 빗길에서 손을 잡고 뛰어가는 장면이 이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미장센이다. 황금빛의 논, 좁은 길, 맞잡은 손, 등을 보이는 후지노와 이를 놓칠까봐 손가락 끝까지 붙잡으려는 쿄모토, 그렇게 천진난만한 아이 둘. 순수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두 사람.


동치로서 한로로가 녹여내고자 했던 것은 아마 '보현의 영화 촬영' 일텐데, 4명의 이야기를 짧은 분량에 풀어내다보니 서사의 깊이가 얕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룩백(look back)이라는 제목은 '돌아보다'와 '등을 보다' 2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이 그려준 만화 때문에 쿄모토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그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 쿄모토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울먹이는 후지노.


현실과 다른 결말의 허구를 제시하기 위해, '방문'이라는 장치를 사용한다.


네 컷 만화 '룩백' 에서 곡괭이에 등을 찔린 채 걸어 나가는 후지노의 장면이 상징적이다. 누군가의 등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의지와 믿음의 표상이다. 쿄모토는 후지노를 믿었기에 그녀의 등을 항상 바라보면서 의지했고, 후지노는 쿄모토에게라면 기꺼이 자신의 등을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등에 도끼가 꽂혀 있다.


이는 쿄모토가 평소 후지노를 생각해왔던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데, 항상 믿고 따르던 후지노의 등에 자신이 도끼를 꽂은 것은 아닐까, 원하는 길을 가고자 후지노와 갈라서겠다고 결심한 내가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속에서 일상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어, 죽음이 번복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희망적인 허구를 현실에 투영시키는 것,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을 눈 앞에 보여주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미술이 아니라 가라데를 배우는 삶을 살며, 자신의 등을 바라보던 쿄모토를 구원하는 장면은 쿄모토와 후지노가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 네 컷 만화라는 상상을 통해 교차되는 지점이다.


룩백이 그토록 애절함을 주는 것은 나를 믿어줬던 사람이 나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서사, 더 이상 자신의 등을 보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더는 그 사람과 회상할 과거조차 만들어갈 수 없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작년 가을 룩백을 혼자 보러 갔을 때, 관람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던 것을 기억한다.


<체인소맨>의 작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인 룩백은, 체인소맨의 액션신들과 사뭇 다른 잔잔한 감성으로 1시간의 러닝 타임을 이어간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던 시점에 내 뒷자리에 있던 남자 둘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 했고 ('이거 보자한 사람 누구임?'),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중에 들려오던 커플의 대화 역시 비슷한 결이었다.


다만 나는 light song이 나오며 후지노의 작업실과 쿄모토의 네 컷 만화가 부착된 유리창 사이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던 장면,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항상 같은 곳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던 네 컷만화와 후지노를 보며 왜 그리도 서럽게 울음이 터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동력을 얻고 현실로 복귀했던 후지노가 과거의 내 모습과 오버랩되어서였을까, 쿄모토의 방문 사이로 흘러나왔던 네 컷 만화가 보여준 후지노의 구원 서사 때문이었을까. 혹은 사람에게 가장 큰 좌절을 주는 방법은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보여주는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일까.


돌아보아도 과거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한스럽다.


인간은 왜 항상, 사라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걸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일상 속에서 소중함을 느끼고, 행복해하고, 감사해하는 습관을 체화한 사람에게 항상 존경을 갖게 되고, 끌림을 느낀다. 친구로서든, 연인으로든, 가족으로든, 동료로서든.


그들이 일상 속 자그마한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가치는 인생을 즐기는 순간들의 연속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죽음은 사실, 살아있음을 향한 처연한 고백이 아닐까.


어쩌면 삶은 죽음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괄호 안에서 벌어지는 아주 길고도 섬세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문장의 마침표가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이 긴 문장을 끝내고 싶은 걸까?’ 하며 말이다.


누군가는 이루지 못한 꿈의 잔해 위에 쓰러져 삶을 놓고 싶어 할 것이고, 누군가는 떠나간 사랑의 흔적을 어루만지다 슬픔을 견디지 못해 삶을 놓고 싶어하고, 또 누군가는 이유도 모른 채 세상이 자꾸 멀어져만 가는 걸 느끼며, 그렇게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몽살구클럽의 태수는 분명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더는 ‘살아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때로는 너무 무거워서, 그 무게를 혼자 견디고 서 있는 일이 버거워서,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태수의 선택은, 아마 그 무거운 삶의 끝자락에서 홀로 내려놓은 슬픈 고백이었으리라.


반대로 룩백의 후지노는 죽음으로부터 삶을 길어 올린다. 친구 쿄모토의 부재 속에서 그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삶을 바라본다. 그녀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고, 시골 길 위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달렸던 순간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기어이 삶을 떠올리고야 만다.


-


삶과 죽음은 늘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나요?’라는 질문 뒤엔 사실 언제나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라는 질문이 숨어있다. 죽고 싶은 이유가 너무 많다면, 살아가고 싶은 이유 또한 어딘가엔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청명한 하늘에서 비추는 햇살일 수도, 따스했던 기억 속 누군가의 웃음일 수도, 아니면 아직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더듬으며, 우리는 기어이 오늘도 삶을 살아낸다.


이 글을 읽는 태수들에게.

당신이 오늘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잠시만 더 살아가 보자.


아직 만나지 못한, 아직 다 알지 못한 무언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삶이라는 문장에 찍는 마침표를 잠시 뒤로 미뤄두고, 조금만 더 이어서 써보자.


그 문장의 끝이, 의외로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앨범에 대한 해석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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