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1: The End Of the F***ing World
빌어먹을 세상 따위 (The end of the F***ing World)는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제임스와 앨리사가 서로의 상처를 사랑으로 회복하는 이야기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오로지 둘만을 의지하며, 기꺼이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 인생의 처음들이 떠오른다.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타인의 상처를 포용해주는 것들이 처음부터 가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 모두 저마다의 트라우마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그토록 오래도록 자신의 성을 쌓아왔을 것이고, 우리는 처음의 어리숙함과 서투른 과정을 청춘으로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제임스와 앨리사는 청춘으로 표현하기엔 너무 깊은 상처를 간직했고, 너무 어렸다. 사랑을 몰랐던 아이들이 사랑을 찾아떠나는 여행 속에서 구원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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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에서 처음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상처 받은 아이들이 사랑을 찾아나서는 느와르물이라고 소개받았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Oasis의 'Half the World Away'가 떠올랐다.
I would like to leave this city
This old town don't smell too pretty and
I can feel the warning signs
running around my mind
And when I leave this island
I book myself into a soul asylum
I can feel the warning signs
running around my mind
...
Oasis <Half the World Away>
Aurora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먼저 알게 된 노래였지만, 세상에 권태를 느끼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마다 들었던 노래라서 그런지, 드라마를 다 보고나서 이 곡을 빌-세 플리의 첫 곡으로 넣었다.
이 곡 역시 권태와 도피 욕구, 그리고 정서적 거리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생각보다도 더 제임스와 앨리사의 서사와 닮아 있어서 신기했다.
드라마에서 가장 부각되는 속성 두 가지는 사랑과 방어기제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위치한 상처와 결핍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하고, 이로 인해 왜곡된 사랑의 형태가 최초 등장하며, 일련의 갈등과 사건들을 거친 뒤 방어기제를 붕괴하고 둘만의 사랑을 온전히 회복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구조다.
방어기제 발동 → 왜곡된 사랑 → 방어기제 붕괴 → 사랑의 재형성
그리고 이를 끌고가는 것은 제임스와 앨리사의 상처에 대한 서사다.
상처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서로가 상대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주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그들이 상처를 대응하는 과정들을 보면 참으로 서툴고 어색해보이지만, 막상 내가 타인과 스스로의 상처를 포용하기 위했던 행동들을 차근차근 곱씹어보면 저들의 행동과 그리 다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의 상처를 회복해주기 위해서는,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상처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연이어 강렬해졌다.
안나 프로이트의 『자아와 방어기제(The Ego and the Mechanisms of Defence, 1936)』 에 따르면, 사람의 방어기제에는 10가지가 존재하며, 현대에는 대략 30가지 정도로 확대되었다.
각각의 인물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방어기제는 아래와 같다.
1. 제임스
: 유리(Isolation), 해리(Dissociation),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2. 앨리사
: 행동화(Acting out),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
3. 보니
: 투사(projection), 고착(Fixation), 합리화(Ration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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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임스
제임스는 엄마의 자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외상, 그리고 이로 인한 아빠의 침묵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살아있음의 의미를 잊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가 된다. 죽임의 행위를 통해서도 본인의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못 하게 되고, 점점 더 강해지는 살인의 충동은 앨리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번져가게 된다.
엄마의 자살에 있어서, 감정과 기억을 절연하는 형태의 유리가 등장한다. 감정을 여기로 끌어들이면 감당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 판단 때문인 것이다. 인간관계에서의 '무감각'의 시초가 이 곳이다.
또한 자신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로 진단하듯 선언하며, 살인의 계획을 관찰자 혹은 타인처럼 취급한다(해리). 이는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침묵에서 출발한 심리적 탈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음의 인식'과 '친밀감 형성'이 어려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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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앨리사
사회부적응자로서 떠나간 아빠, 자신을 성추행하고 무시하는 새아빠, 그저 허례허식에 찌든 엄마를 보면서 자란 앨리사의 속에는 완강한 반세속주의가 형성되어있다. 카나페를 나눠주다가 떠나는 장면, 결혼식에서 도주하는 장면을 통해 자유를 원하는 앨리사의 성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첫 만남부터 제임스에게 들이대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습관들은 사실 자신의 불안과 분노를 감추기 위한 표현이다(행동화). 상대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지 시험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누구보다 간절히 안정적인 애정과 보호를 원하지만, 제임스에게 냉소적인 말투와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 역시 반동 형성의 대표적 장면이다. 취약한 자신을 들키지 않도록 '강한 척'하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 쉽게 말해서 연인관계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회피형 인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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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니
부모님께 징벌을 받지 않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보니.
제임스와 앨리사에 대한 살인 계획을 '사랑하는 사람의 복수를 위한 정의' 정도로 합리화하고, 교수의 잘못된 행동을 목도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교수와의 감정을 유지하는 세계에 남고자 스스로를 고착화한다.
보니가 앨리사의 카페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다 저지당하는 장면이 시즌2의 클라이막스다. 거짓된 합리화의 가면으로 본인을 감추고 살아왔던 자신이었지만, 너무 지쳤다며 쓰러져서 아이처럼 펑펑 우는 장면이 정말 슬펐다. 본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 사라진 순간, 자신의 모든 삶이 부정당하는 그 기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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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지점은, 제임스는 감정을 차단하는 것을 자신의 방어기제로 펼치고 있고, 앨리사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을 자신의 방어기제로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둘의 대조가 서사적으로도 흥미롭게 극을 이끌어가는 게 아닐까.
앨리사는 무감각한 제임스를 보면서 더욱 도전적으로 도발하게 되고, 제임스는 앨리사의 폭발하는 말과 행동들로 인해 자신의 방어막에 틈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부모로 인한 유년 시절의 애착 형성 실패다.
셋 모두 안정형이 되지 못 했고, 불안정 유형 중 제임스는 회피형, 앨리사는 양가형, 보니는 혼란형의 패턴을 형성한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회피형은 양가형에 가깝다)
좋은 부모, 좋은 어른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감정과 애착을 왜곡시키는 어른은 되지 말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제시하는 빌어먹을 세상 따위. 그 메시지를 접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결국, 빌어먹을 세상 따위가 말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사랑의 회복이다.
제임스와 앨리사는 서로의 상처와 방어기제를 끌어안으며, 본인들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들에게서 배운 사랑의 의미는 나다워질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는 사람이 서로에게 되어주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과거의 상처들을 구태여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안아줄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지켜가며 둘의 세상을 확장해나가는 것. 어디에 있더라도 서로를 알아 볼 수 있고, 누구에게도 대체될 수 없는 옆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 자연스럽게 내가 나로서 온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삶의 양식 말이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말 사랑을 나누기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규격화된 사랑만을 정답으로 여기는 태도가 있다.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오히려 어색해진 회색빛 세상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정답의 유형을 강요받는다. 이는 사회적 배경, 그러니까 집안, 재산, 직업들과 같이 한순간 없어지면 그 뿐인 것들로부터 올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혹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 것인가?
그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할 수 있는 둘만 있다면 그 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에 정답 따윈 없다. 다만 사람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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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많은 사람은 조심스럽다. 상처를 줄 사람을 미리 알아보고, 피하게 된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주지 못 한다.
내 방어기제는 제임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꽤 오랜 시간동안 상처를 받다보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유리와 해리를 통해서 감정과 현실을 분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감정에 둔감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아빠마저 자신을 떠나버리고 의지할 대상이라곤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앨리사를 마주친 제임스. 그가 그렇게 깊은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에게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숨기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몰입했던 장면이자, 가장 슬펐던 장면이었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느낌을 받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방어기제를 펼쳐야하도록 요구하는지 모른다. 제임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앨리사를 다시 마주하고서, 그의 방어기제가 무장해제되는 과정에서 제임스는 얼마나 그녀에게 안기고 싶었을까.
처음부터 완벽한 사랑은 없다. 제임스와 앨리사처럼 무턱대고 시작한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좋은 것만 내보이고 포장하는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포용과 자아 탐색의 파괴적 반복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제임스와 앨리사.
가장 힘든 순간에 서로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둘의 사랑은 이미 애틋하다 못해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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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크기와 모양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결말에 이른 그들이 자신들만의 진실된 사랑을 찾게 되어 진심으로 안도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끝까지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나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답했다.
이는 고차원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대단히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통해 나에게 인사이트를 전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화의 결이 잘 맞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티키타카라고 부르는 그것). 그리고 나아가, 그 결로 하여금 서로의 세상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가장 큰 매력을 갖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닮고 싶은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 내 삶의 관점을 넓혀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 스스로 깊은 반향을 느끼고, 존경을 갖게 되고, 안정감을 얻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의 문제는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는 것, 그래서 속아 넘어가기 쉽다'는 시즌 2의 대사처럼, 나 역시 무턱대고 앨리사처럼 피상적 사랑을 좇아 행동했던 시절이 있었다. 외모, 성격, 취향, 사회적 배경과 같이 파편화된 요소들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시기들 말이다. 따지고, 재고, 결함을 찾고, 부족함을 느끼던 시기들.
그 시절을 지나고 나에게 남은 것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안목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사랑을 유지시키는 동력이자 사랑의 깊이를 더해주는 나만의 힘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신기한 점은, 자몽살구클럽과 빌어먹을 세상 따위 모두 유년기 상처의 회복과 구원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나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처럼, 내밀히 간직된 트라우마와 상처들을 사람과 사랑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궤를 함께 하는 두 작품이 어쩌다 동시에 지금의 내 인생에 스미게 되었는지 나도 신기하다.
처음 브런치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스물넷에도 출발점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모르겠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어떤 사랑을 내가 줄 수 있고, 그것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사람에 따라 유연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나의 것을 관철하지 않아야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자유롭고, 나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서야,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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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조건은 많다. 외모든, 성격이든, 배경이든, 가정 환경이든.
다만 시작보다 더 중요하는 것은 유지다. 나에게 사랑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은 믿음이고, 그 본질은 서로의 시선을 넓혀주는 것이다.
이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고, 주는 사랑의 가치를 알고,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둘은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와 앨리사에게 있어서 믿음의 트리거는 역설적으로 살인이었지만,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보여준 서로를 향한 날것의 시선과 마음들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결국,
사랑은 나다움을 지키며, 동시에 서로의 세계를 끝없이 확장하는 여정이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는 한, 아무리 세상이 빌어먹을지라도 두렵지 않다.
제임스와 앨리사가 상처 없이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평행세계를 상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