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프로젝트]40대 초보가 배우는 '스포츠 클라이밍'

[누만예몸][행복프로젝트]

by Maama


요즘 일본과의 경제 전쟁이 한창이다. 그 와중에 등장한 신박한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토왜'로도 불리는 '토착 왜구'다. 굳이 말뜻을 풀자면 '우리나라에 정착한 왜놈 도둑'이란 뜻이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기가 막힌 작명이다.


토착 왜구들은 기본적으로 반민족적 친일파이며, 획일적 반공주의자고, 개발독재와 군부독재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며 자신의 이득을 취한 자들이다.


그들은 나라를 팔고, 민주주의를 팔고, 다른 이들의 희생을 팔아 축재한 막강한 부로 정치, 경제, 사법, 종교, 학문, 예술, 의료, 스포츠와 같은 분야에 뿌리를 내려 사회 기득권층을 형성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미 1899년에 토착 왜구를 표현한 다른 단어가 있었다. 바로 '유한계급'이다. 놀랍게도 유한계급은 토착 왜구와 거의 똑같은 특징과 행태를 보인다.


유한계급은 소스타인 베블런이란 학자가 '유한계급론'에서 말한 상위계급 계층이다. 그들은 벼락부자들이고 이미 축적되고 세습된 부로 인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이다.


유한계급을 표현하는 특징은 '금력 과시 경쟁', '과시적 여가', '과시적 소비'다. 특징의 핵심은 과시에 있다. '내가 너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과시, '내가 더 많다'는 것에 대한 과시, '내가 더 우월하다'는 것에 대한 과시가 핵심이다.


그들의 과시는 여가, 예법, 인간관계, 의복, 종교, 스포츠 등 다양한 비생산적 활동에서 드러난다. 남들이 하지 않는 여가나, 복잡한 규율과, 타인의 억압을 통한 과시로 남과 나를 구분 짓는다.


그런데 더 기분이 나쁜 건 필수적인 생존 노동에서 해방된 그들의 명예적 과시에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각종 취미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여가 생활이 과시의 전리품인 셈이다.





잠깐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됐다.


행복을 위한 나의 노력은 유한계급이 강요하는 과시를 위한 사회적 명성의 '규준'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유행하는 생활기준, 체면치레와 상관없는 진정성 있는 욕망인가?


혹시 남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경쟁하고, 돈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과시적인 여가 활동을 하고, 과시를 위한 부가적 가치에 아낌없는 소비를 흉내 내는 것은 아닐까?


거창한가? 다소 거창할 수는 있겠으나 나름 의미 있는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활동을 누군가에게 소개하면서 왜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요즘 유행이니까~, 남들이 하니까~, 핫하니까~, 있어 보이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남에게 보여줄 게 있으니까~'이긴 싫을 뿐이다.


문제는 자유시간을 가치 있게 소비는 것에 대한 욕망의 순수함에 있다. 그 욕망은 정말 순수한 것일까?


나로부터, 나의 경험과, 나의 성찰의 결과에서 발로한 것인가? 아니면 상류계층의 과시적 삶에 대한 의식적 동경인가? 그것도 아니면 상류계층이 관습화 시킨 성공적 삶에 대한 규준을 부지불식간에 따르고 있는 것인가?






현재 우리의 삶은 수렵, 채취를 하고 농사를 짓던 시대와도, 증기기관을 만들었던 산업혁명의 시대와도, 심지어는 정보통신 시대의 초기와도 많이 달라져 있다.


그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위치나 역할,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나 욕망은 어떤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렵다.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인의 조작된 또는 리얼한 사생활이 모두 노출된 상황에서 개인의 욕망은 개인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조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고민이었다. 나의 순수한 욕망은 무엇인지 또는 그 욕망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곧 반세기인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이었다. 유한계급들이 흔들면 흔드는 데로, 정부가 시키면 시키는 데로, 언론이 속이면 속이는 데로 '파도 위 스티로폼' 같이 살았다.


유한계급의 규준을 삶의 성공으로 여기고, 그 가느다란 희망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불필요한 것도 사고, 해외여행도 가고, 맛나다는 것도 먹고살았다.


유한계급 대신 그들이 돈을 더 많이 벌을 수 있는 방법을 대신 궁리해 주던 어느 날, 그 삶이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삶 같아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삶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공정하고, 비효율적인 삶이라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노력과 실천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아주 짧은 순간 나를 만족케 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크게 기쁘고, 가슴 뛰는 일. 스스로는 힘들지 않다고 느껴지는 그 어떤 일.


그게 틀에 박힌 삶에서 얻어진 것이든, 유전자로 전해져 온 것이든, 돌연변이처럼 나에게 처음 발로 된 것이든, 나의 엔도르핀과 도파민을 증가시키는 그 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를 뿐이다.


왜냐하면 짜릿한 쾌감의 순간 그것이 유한계급의 규준에 부합하지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셀프 폐기'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곤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유한계급의 규준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에는 이러저러한 것만이 과시가 될 수 있다는 법칙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맞는 온갖 종류의 과시가 넘쳐난다.


과시는 추종자를 부르고, 추종자는 돈이 된다. 주종자는 마치 대 약탈 시대의 과시적 명예를 위한 전리품과 같다.


유한계급이 만든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들의 규준에서 벗어난 나의 욕망을 찾고 싶다.


왜 이렇게 벗어나려고 하냐고?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욕망은 허망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만든 것이니 남이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따라가다 보면 가랑이가 찢어지게 되어 있다. 왜냐면 우리는 삶을 위한 노동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노동을 하지 않고 '심심하지만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런 삶은 일부 유한계급과 토착 왜구 말고는 실현할 수 없다.


유행 트렌드가 바뀌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 때문 만은 아니다. 과시의 지속을 위해서다. 가랑이 찢어진 누군가가 선을 넘으면 기준을 바꾼다.


먹고, 입고, 사는 문제는 다르다고? 먹고, 입고, 사는 것으로 하는 과시가 가장 크다.


그들은 안전하고 깨끗한 것을 먹는다. 몸에 좋은 것은 맛없게 마련인데 누군가 맛있게 해 준다.


그들은 그날의 기분과 상황을 패션으로 표현한다. 그 표현에 제약이 없다.


그들은 편안하고 효율적인 곳에 산다. 심지어 거주에 제약이 없다. 집의 개념이 먹고 자는 곳이 아니다.


그들은 건강하기까지 하다. 절제와 폭주를 넘나들지만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


이런 그들과의 과시 경쟁에선 이길 가능성은 제로다. 그렇다면 그들의 규준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나의 쾌락과 욕망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남의 욕망을 쫒다가 허망해지는 일이 없다.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사람인가?





클라이밍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유니크'함에 있을 것이다. 난 유한계급이 아니므로 무언가를 과시하기 위해선 유니크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또 몸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 지금과는 다른 몸을 가지고 있을 때도 운동은 곧잘 했다. 과시적 명예를 위한 원초적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나는 '몸 쓰는 유니크한 일'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모임 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 모임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규칙'이 싫어서였다. 벽을 쳐놓고 특정한 방법으로 그 벽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자존심 상하고 무의미해 보였다.


그래서 웬만한 운동들은 모두 독학으로 마스터를 했다. 나는 유한계급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 규준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반골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나 보다.





클라이밍은 암벽을 오르는 스포츠다. 떨어지면 죽는다. 그래서 이 스포츠의 모든 지침과 규칙은 납득이 된다.


클라이밍은 혼자 할 수 없는 스포츠다. 최소 2명이 페어를 이뤄야 한다. 물론 프리 솔로 클라이밍이라고 장비 없이, 혼자, 수시간에 거쳐, 수백 미터를 오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그 루트의 정복을 위해선 팀과 함께 사전에 안전을 담보한 연습을 한다.


클라이밍은 2020년 올림픽에서 첫 선을 보인다. 전 세계적으론 5억 명이 클라이밍을 즐기지만, 국내에선 12만 명 정도만이 클라이밍을 한다. 숫자 상으론 유니크하다.


출국자 3000만 명, 등산 1500만 명, 자전거 1300만 명, 낚시 760만 명, 캠핑 300만 명, 서핑 20만 명, 스쿠버 다이빙 8만 명, 승마 5만 명(승마체험 90만 명)에 비추어 봐도 아직은 초기 단계다. 한다는 것 자체로 유니크하다.


클라이밍은 해외여행이나 자전거, 낚시, 캠핑, 서핑, 스쿠버 다이빙, 승마에 비하면 저렴한 레저 활동이다. 등산보다는 조금 더 들겠지만 일반 등산용품이 과시용 비용이라면 클라이밍에 드는 돈은 필수 불가결한 안전 비용이다.


이 말인즉슨 '과시용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전거나 낚시, 캠핑처럼 용품으로 과시를 하는 것도 아니다. 서핑, 스쿠버 다이빙, 승마처럼 때와 장소의 제약 사항을 탈피하는 것으로 과시를 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리스크를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바위와 벽을 기어 올라가는 여가를 하거나, '대리 여가활동'을 할 것 같지도 않다. 직접 하기엔 위험해 보이고, 대리하기엔 썩 과시가 되지도 않으니까.






유한계급이나 토착 왜구들이 절대 우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누구나 유니크한 욕망을 꿈꿀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받는 Respect와 같은 '관계에서의 만족'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돈이 좌지우지한다고는 하지만, 과시로 얻을 수 있는 관계는 그 한계가 뻔하다.


또 한 가지는 몸을 단련하고 절제해야 얻을 수 있는 건강이다. 물론 최근에는 돈이 건강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과시를 위한 1차적 욕망에는 무절제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줄을 연결하고, 자신의 관절과 근육을 이용해서,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클라이밍은 이런 면에서 어떤 트렌드나, 어떤 과시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욕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3개월간의 강습을 통해서 암벽을 바로 오를 수 있진 않을 것이다. 사실 막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인공암벽과 실내암장을 가볍게 이용할 수 있는 정도만 돼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작고 안전한 바위부터 오르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듯하다.


장비도 간단하니 캠핑이나 등산과도 결합할 수 있을 듯하다. 집에 쌓여 있는 캠핑 장비를 다시 깨울 수 있으니 좋다.


부상이 걱정이긴 한데, 이것은 12주를 체험하면서 클라이밍이 40대도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인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12회의 연재를 통해 스스로의 행복의 찾는 작은 솔루션이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자! 이제부터 올라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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