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숨긴 '다수'라는 단어 - 2024다283668 판결
"변호사님, 저 정말 몰랐어요."
의뢰인은 손에 든 서류를 꽉 쥐고 있었다. 배당표였다. 경매에서 받을 수 있는 금액 옆에는 선명하게 '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1억 1천만 원. 그의 전 재산이었다.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설명을 들으셨을 텐데요?"
"네, 들었어요. '선순위가 다수 있다'고요. 그런데 그게 7억이 넘을 줄은..."
그는 말끝을 흐렸다.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를 다시 펼쳤다. 거기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임대인의 자료 제출 불응으로 선순위 '다수' 있음을 구두로 설명함'
"'다수'요. 그냥 '다수'라고만 써있어요."
사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임대인이 자료를 주지 않았다고. 다른 세입자들의 계약서를 볼 수 없었다고. '선순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했다고.
그래서 이 사건은 어려웠다. 법은 '알려줬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다. 법은 '얼마나 정확하게 알려줘야 하는가'를 물었다.
"변호사님 생각은 어떠세요?"
의뢰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전문가의 책임이란 무엇인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인가, 위험을 가늠하게 하는 것인가.
"중개사님도 힘드셨을 거예요. 임대인이 자료를 안 주면 정확히 알기 어렵죠."
의뢰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 건물의 크기는 보셨을 거예요. 몇 가구가 사는지, 그 동네 전세가 얼마인지도 알 수 있었겠죠. 대략이라도 짐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선순위가 '얼마나' 있을지를."
대법원의 판단은 명확했다.
중개업자는 단순히 등기부등본만 확인해주면 되는 사람이 아니다. 임대인이 자료를 주지 않더라도, 그 건물의 규모와 세대수, 주변 시세를 보고 선순위 임대차보증금이 '대략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조사하고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임차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순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다수'라는 막연한 표현으로는 그 위험을 가늠할 수 없다. 1억일 수도, 7억일 수도 있는 '다수'. 전문가라면, 그 숫자의 무게를 헤아려 전해줘야 한다.
"그럼 이길 수 있을까요?"
의뢰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원도 같은 생각이에요.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다시 심리하라고 했어요."
설령 임대인이 관련 자료제공을 거부하여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더라도 이 사건 다가구주택 규모와 전체 세대수, 인근 유사 부동산의 임대차보증금 시세 등을 확인하여 이 사건 다가구주택에 선순위 임대차보증금채권이 얼마나 있을 수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이를 조사ㆍ확인하여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개업공인중개사로서 준수하여야 할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였다고 볼 수 없다
의뢰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망이 스쳤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판결이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돈이지만, 그가 잃은 것은 돈만이 아니라는 것을.
집을 구하며 느꼈을 설렘. 새 보금자리에 대한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가를 믿으면 안전하겠지'라는 신뢰.
변호사의 메모
공인중개사법 제25조, 제29조, 제30조
중개업자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진다
임대인의 자료 제공 거부가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
건물 규모, 세대수, 주변 시세로 선순위 보증금 '추정'도 의무다
'다수 있음'이라는 추상적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문가의 책임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위험의 가시화에 있다.
2024다283668 판결을 읽으며 때로는 말하지 않은 숫자가 말한 단어보다 무겁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