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과 시리얼. 윤진을 설명할 수 있는 발견과 수집의 두 세계
아침 챙겨 드시나요? 누군가는 밥으로, 누군가는 빵과 과일 몇 조각으로 또는 주스 한 잔으로 때우는 것처럼, 모두의 아침은 저마다 다르게 채워집니다. 그런 점에서 매일 아침을 시리얼로 다채롭게 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에서 채집한 영감들을 정갈하게 담아내는 매거진 <Achim>의 발행인이자 시리얼 애호가인 윤진. 끈기 있게 부지런히 수집한 시리얼 패키지 300여개에 대해 기록한 책 <CEREAL BOOK>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가 백과사전 같은 시리얼 북을 한 장씩 넘기며 소개한 시리얼만 해도 16개 남짓. 깊이 좋아하고 탐구해온 무언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의 눈빛은 망망대해에서 더욱 번뜩이는 항해사의 그것처럼 반짝였습니다. 윤진은 수집의 묘미에 대해 "어드벤트 캘린더(Advent Calendar)처럼 내가 몰랐던 세계의 문을 하나씩 열어 보는 데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시리얼 모험가가 불러일으킨 호기심에 이끌려 그 발견과 유희의 여정을 따라가봤습니다.
오늘 아침으로는 뭘 먹었나요?
엄마가 만들어주신 약식을 먹고 왔어요. 전형적인 아침과는 달랐죠. 평소에는 그래놀라, 시리얼, 요거트 그리고 사과 반쪽을 먹는 편이에요.
시리얼을 즐겨 먹는 나름의 방법은 뭔가요?
볼에 시리얼과 우유를 깔고, 요거트를 올린 다음 그래놀라를 덮어요.
우유와 요거트를 같이 먹는다니, 좀 다르네요.
그렇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먹냐고 의아해했어요. 시리얼은 우유에, 그래놀라는 요거트에 먹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먹으면 한 그릇에 모든 걸 맛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시리얼의 눅눅한 식감을 좋아하는데요. 바삭한 그래놀라와 요거트를 먼저 먹고, 충분히 불어난 시리얼을 먹어요. 그 다음 시리얼의 단 맛이 밴 우유로 마무리하는데 그 우유가 진짜 맛있어요. 치밀한 계획이죠.(웃음)
와, 좋은 정보네요. 우유를 고르는 기준도 있나요?
경험상 유지방 함량이 높은 우유일수록 시리얼 맛을 잘 흡수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묵직한 유지방 우유를 마시면 속이 살짝 불편해져서, 라이스 밀크나 오트 밀크 같은 식물성 우유를 먹어보고 있어요.
그나저나 시리얼 패키지는 언제부터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모으기로 마음 먹은 건 스물두 살 때였어요. 미국의 Trader Joe’s라는 마트에 PB 상품으로 나온 시리얼이 있는데 오직 매장에서만 살 수 있었어요. ‘이렇게 예쁘게 디자인된 상자를 어떻게 버리지?’ 싶었죠. 통통 튀는 시각적 요소가 제게 활력처럼 와 닿았어요.
패키지를 보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겠죠?
여행지에서 시리얼을 사 올 때 캐리어에 그냥 넣으면 모서리가 구겨지기 때문에 상자를 일일이 분해해 납작하게 만들었어요. 시리얼이 담긴 봉투는 따로 챙기고 집에 와서 상자를 다시 조립했죠. 그래놀라는 대부분 비닐 지퍼백에 담겨 있어서 물로 씻어 바짝 말린 다음 보관해요.
시리얼의 어떤 매력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시리얼은 보고, 맛보고,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을 모두 갖고 있어요. 평소 엽서나 종이 쇼핑백도 모으는데, 이것들은 평면적인 반면 시리얼은 입체적이죠. 시리얼 상자를 뜯고, 시리얼이 도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듣는 게 무척 재밌어요. 패키지 뒷면을 많이 보는데, 인간미가 엿보인다는 점도 좋아요.
어떤 점에서요?
우리나라 시리얼에는 제품 설명이 대부분인데 외국에서 생산된 시리얼은 만든 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어요. 어느 농장에서, 누가 몇 대째 이어서 만드는지 알 수 있죠. ‘이거 어디 여행하면서 샀지?’ 추억을 곱씹는 경우도 있고요. 그렇게 시리얼과 함께하는 일련의 과정과 시간이 즐거워요.
컬렉터에게 짖궂은 질문일 수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시리얼은 뭐예요?
음, ‘Nature’s Path’를 좋아해요. 그래놀라, 시리얼을 두루 만들고, 수익금의 일부를 지역 푸드 뱅크나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는데 쓰는 브랜드예요. 맛으로 따지면 시나몬 맛, 고소한 맛을 선호해요.
그럼 어떤 이유로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리얼도 있나요?
성경의 예언서들 중 하나인 <에제키엘서>에 이런 구절이 기록되어 있어요. ‘거친 곡물, 콩, 스펠트 밀(고대 밀의 일종)을 섞어 먹어라'. 여기에 착안해 만든 시리얼이 있는데, 브랜드 이름도 ‘에제키엘(Ezekiel) 4:9’예요. 단맛은 거의 없고 곡물 그대로의 맛이 전부라 할 수 있어요. 기본에 아주 충실한 시리얼이죠. 제 스타일이긴 한데, 처음 먹었을 때 한국 사람들은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시리얼을 종종 선물하기도 하나요?
그럼요. 소규모 가게에서 나온 생소한 패키지 디자인의 시리얼을 선물하면 여행 기념품 같아 다들 좋아해요. 선물은 상대의 입맛을 고려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시리얼을 추천할 때 크게 과일 맛, 고소한 맛, 초코맛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요. 그다음 견과류를 좋아하는지, 초코는 화이트와 다크 초콜릿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물어봐요.
개인적인 아카이브에 머무르지 않고 <CEREAL BOOK>을 낸 것도 인상적이에요.
엄마가 상자 버리는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안돼요!”하면서 열심히 사수했는데, 헛되지 않았네요.(웃음) 콘텐츠가 되긴 할 텐데 어떻게 만들지 계속 고민을 하다 보니까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러다 서울 아트북 페어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가 신청을 하고 데드라인이 다가오니까, ‘되든 안되든 내 스타일대로 만들자!’는 심정으로 책을 냈어요. 결과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걸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했어요.
시리얼를 모으면서 스스로 달라진 점도 있을까요?
탐구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좋아서 모았다면, 지금은 “왜 모아요?”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하려니 행위에 대한 고찰로 이어져요. 수집이 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중 하나가 되었죠.
시리얼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지금까지는 맛있게 먹거나 콘텐츠를 만드는 데 그쳤다면, 조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갈 것 같아요. 제가 먹어보고 좋았던 시리얼과 로컬 브랜드를 온라인에서 소개할 거예요. 맛있는 시리얼을 더 많은 분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문득 궁금하네요. 시리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내추럴 와인, 커피처럼 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생소했던 내추럴 와인이 보편화됐고, 커피의 원두와 맛도 세분화되어 소비되는 것처럼요. 실제로 비건, 키토식(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 곡물 없는 그레인 프리(Grain Free) 시리얼까지 나오고 있어요. 시리얼도 개인의 취향에 맞춰 즐길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어요.
시리얼 말고 관심을 쏟는 대상이 있을까요?
생산성 툴에 관심이 많아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인 것 같아요. 시간과 영감을 어떻게 다 붙잡을지, 보기 좋게 정리할 수 있을지 너무 고민이에요.
뭔가 좋아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를 실행으로 옮기긴 쉽지 않죠.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해요.
‘살아있다는 느낌’이 아닐까요? 퇴사 후 매거진 <Achim>에 집중하고 제 일을 하니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스스로 벌린 일이니까 누구한테 변명할 것도 없고, 기뻐도 슬퍼도 내 몫인 거죠. 그게 되게 살아있는 느낌을 들게 해요. 일본 가전 브랜드인 발뮤다 창업가의 강연에서 인상 깊은 말이 있었어요. “매력적인 브랜드의 비밀은 자연에 가장 가까운 생기를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살아있는 것과 가장 가까운 게 매력을 만든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반대의 것에 본능적으로 끌린다고 해요. 죽음과 가장 멀리 있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요. 그래서 저는 어둠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살아있는 아침 시간을 사랑해요.
수집을 통해서도 삶에 생기를 가득 불어넣고 있죠? '수집의 맛’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요?
진짜 매운맛! 수집은 호기심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게 해주는 최대치의 자극이에요. 호기심이 강해지면 강해지지, 절대 약해지진 않으니까요.
Editor 안명온
Photographer 김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