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반항기 1
가끔 내 인생의 방향키를 부모님이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세상 풍파가 없는 곳으로 딸을 인도하려 고 하는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분들이 향하고자 하는 곳이 내가 원하 는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기숙사를 나오려고 했을 때가 그랬다. 회사 복지 차원에서 제공되던 기숙사는 다섯 평 남짓한 원룸을 성인 두 명이서 나눠 써야 하는 곳이었는데, 가운데 달려있는 커튼으로 두 사람의 공간을 대충 나눠놓은 데다가 각자가 내는 소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게다가 우리 회사에는 다른 도시에서 들어오는 어린 직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숙사는 늘 만실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회사 사람들과 마주쳐서 어색하게 인사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퇴근 후에도 다시 회사에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든지 다른 사람들의 눈이 나를 따라다녔으니 기숙사는 휴식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판옵티콘에 더 가까웠다. 나는 기숙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취를 하고 싶어 했지만, 부모님은 거의 공짜로 제공되는 기숙사를 왜 나오려 하냐며 나를 반대했다.
기숙사를 탈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곳을 나오는 데에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모두 엄마의 반대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기숙사를 나가고 싶어 할 때마다 내 마음을 쉽게 돌려놓았다. 부동산 복비 문제와 이사 문제, 관리비, 부동산 사기 등 자취를 하면 따라오는 최악의 상황들만 내 앞에 나열해 놓았다. 엄마는 내가 약간의 불편만 참으면 이런 모든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하지만 기숙사에는 엄마가 나열한 공포들 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이 판옵티콘 기숙사의 백미, 사감 의 불시점검이었다. 기숙사 시설 점검을 핑계로 책상 서랍, 옷장, 이불 밑 어느 것 하나 확인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내 또래 사감들이 들어와 검사랍시고 내 물건을 뒤적이는 일을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내가 직장인이 아닌 죄수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기숙사 생활은 나에게 여러모로 괴로운 것이었다.
2년을 끌어오던 기숙사 탈출 문제는 내가 가져온 허리 찜질기를 사감에게 뺏긴 날 이후에 너무 쉽게 종결되었다. 회사에 8시간이 넘게 앉아있다 보니 나에게는 약한 허리 디스크가 있었다. 사라졌던 통증이 다시 나타나서 앉아있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바람에 회사에서 쓰려고 작은 찜질기 하나를 샀는데 기숙사에서 하루 시험 삼아 사용했던 게 문제가 되었다. 성능 시험도 해볼 겸 하룻밤만 깔고 자 보는 게 무슨 큰 대수일까 싶어 사용하곤 기숙사에 그대로 두고 나온 것이었다. 회사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을 때,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잔뜩 짜증 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번뜩 기숙 사에 두고 온 찜질기 생각이 났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코드를 뽑아 놓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내가 나오기 전에 퇴실 조치되었을 것이다.) 상대방은 기숙사 사감에게 나의 불법 소지품을 전달받았고 압수 품목이니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곤 화기 위험이 있는 찜질기를 왜 이불 밑에 숨겨놓았냐고 몇 번이고 따져 물었다. 인사팀 과장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잘못을 한참 반성해야 했고, 전화를 끊고 나서는 내 기분이 한없이 나 빠졌다. 물론 규칙을 어긴 내 책임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감이 내 침대 이불 밑을 걷어내고 내 물건을 들고 간 것도, 그런 일이 업무시간에 일어난 것도, 30대 중반이나 되어서 소지품 검사를 당해야 한다는 것도 짜증스럽지 않은 것 이 없었다. 나는 그날 당장 아무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집을 찾아봐 달라고 했다. 그렇게 큰 단위의 돈이 걸려있는 일을 부모님과 상의 없이 저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도 2년 동안 기숙사를 나가보려고 자취방 구하는 팁, 자취방 계약할 때 주의할 점 등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것들로 나는 의외로 자취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다만 실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장기화된 조선 불경기로 인해 거제에 비어있는 집들이 많아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조건의 집들이 나와있었으니 차라리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엄마, 나 집 보러 가
혼자서 부동산을 방문하러 갈 때가 되어서야 덜컥 무서워져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엄마, 나 기숙사 나오고 싶은데 나올까?”라고 물었을 텐데 이번에는 의문문이 아니었다. 통보였 다. 엄마는 잠시 놀래더니 다급하게 나를 만류했다. 다시금 여러 번 들어왔던 문제들을 꺼내며 겁을 주었다. 그렇지 만 내 퇴근시간에 맞춰 집을 보여주기 위해 기다리는 부동산 사장님과의 약속을 깰 수도 없었다. 그러자 엄마는 내 의지가 확고해 보일 때마다 꺼내 드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문제 생기면 다 감당할 수 있겠냐? 엄마는 못 도와준다.” 확신을 해야 하는 것, 이 것이야말로 내가 그 어떤 문제보다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자취를 원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고, 엄마는 나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응! 내가 다 감당할게” 가끔 충동적인 행동은 강한 의지를 만들어내 주고 그것은 확신까지 이어진다. 이 것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좋은 경우라고 생각했다. 기숙사에서 매번 소지품 검사를 당하며 얻는 안정보다는 약간의 위험 이 있는 자유가 훨씬 나아 보였다. 그런 위험마저도 부동산 복비와 깔끔한 서류처리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터였 으니, 감당을 못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엄마는 매번 넘지 못하던 문턱까지 넘어버린 나에게 더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네 마음대로 혼자 살고 싶다면 한번 혼자 살아봐라!” 하시고는 집을 볼 때 내가 놓치지 않아야 되는 것들을 빠짐없이 알려주셨다.
나를 기숙사로 돌려놓은 공포와 불안요소들이 이제는 집을 볼 때 중요한 요소들로 바뀌어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 동안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몇몇 집들을 둘러보고, 생각보다 너무 순조롭게 건물 등기부 등본과 계약서를 들고 집주인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는 그렇게 확신을 해놓고도 이삿짐을 옮길 때까지도 사실 나는 불안했었다.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게 맞을까? 정말 잘한 일일까? 다시 기숙사로 들어가야 하나? 새로운 집에서 보낸 일주 일동 안은 이사 후 어수선했던 집만큼 내 마음도 복잡했다. 짐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것들을 사 넣으면서 자취방이 집다 운 모습으로 갖춰지자, 자취생활에도 차츰 적응이 되고 만족스러워졌다. 주말마다 룸메이트를 피해 밖으로 돌아다 니지 않아도 되었고, 허리가 아프면 따뜻한 찜질을 하며 잠들 수도 있었다. 그동안의 공포가 허무할 만큼 아무 문 제가 없었고 오히려 기숙사에서 왜 더 빨리 나오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그동안 자취방을 구할 돈이 부 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내가 기숙사에 머물러주길 바랐기 때문에 그곳에 남는 것인 척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기숙사를 나왔을 때 내가 지게 될 책임이 무서워 버틴 것뿐이었다. 나는 기숙사를 나옴으로써 처음으로 내 인생의 키를 내 마음대로 크게 한번 꺾어보는 데 성공했고, 책임과 함께하는 자유가 주는 달콤함 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 너무 과감했다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