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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자고루이첸코 (1)

못하는 게 없어서 다 잘하는... 그냥 천재

by 마봉 드 포레

시작하기 전에, 느끼한 룸바 영상 하나 보고 가자. 1996년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일본 영화 쉘 위 댄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가발 쓴 아저씨 덕분에 라틴댄스에 대해 뭔가 느끼한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러던 내가 라틴댄스를 배우고 있는 걸 보면 참 인생은 알 수 없다.

영화 Shall We Dance? (1996) 아오키의 기가 맥힌 룸바 연습 동영상. 영상출처 유튜브 paul19411

11살에 이미 남들을 가르치고 있던 천재

율리아 자고루이첸코(Yulia Zagoruychenko, 1981년 러시아 벨고로드(Belgorod) 태생)는 아마도 댄스스포츠 역사 다 뒤집어 까도 두 명도 없을, 그냥 설명도 필요 없는 최고, 천재, 챔피언, 그냥 니가 다해먹어라, 의 인물이다. 이 사람에게 따라붙는 타이틀은 'Ten-time Latin World Champion'이다. 월챔을 10번이나 해 먹었다. 그냥 '해 먹었다'라는 표현이 딱이다. 이 사람이 은퇴하고 나서야 다른 선수들이 챔피언 딸 수 있었을 정도로 진짜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율리아는 4살 때 러시아 민속무용을, 7살 때 볼룸댄스(모던)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1살 때는 이미 다른 아이들을 가르쳐서 돈을 벌고 있었다(천재니까...). 12살 때 러시아 주니어 내셔널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챔피언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16살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볼룸과 라틴 둘 다 배울 수가 없어 라틴을 선택했다. 이것은 매우 잘한 선택으로 보인다. 물론 율리아는 볼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챔피언을 먹었을 것이다(천재니까...). 그러나 율리아는 키가 작은 편(159cm 정도)이다. 러시아에 장신의 여자들이 그토록 많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작다. 근데 라틴댄스에는 몸이 작고 날랜 여자들이 조금 더 유리하다. 표로롱 돌고 잽싸게 움직이고 턴과 화려한 동작이 많은 라틴댄스는 키 큰 여자들보다 다람쥐처럼 작고 잽싼 여자가 기량을 발휘하기 더 좋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보통 댄스스포츠 시작하면 키 크고 팔다리 길어서 쭉 뻗었을 때 선이 잘 뽑히는 애들은 모던으로, 작고 날랜 애들은 라틴으로 보내면 더 효율적(?)이다.


막심 코제브니코프와의 파트너십

율리아는 21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막심 코제브니코프(Maxim Kozhevnikov)와 파트너가 되었다. 두 사람은 곧 미국 내셔널 프로페셔널 챔피언이 되었다. 막스(막심)와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파트너를 유지했는데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은 불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추구한 방향이 달라서였다.


우선 막스는 쇼댄스나 공연 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막스와 파트너일 때 공연 영상을 보면 전통적인 라틴댄스에서 벗어나 실험적이고 테크니컬 한 퓨전 댄스에 가까운 것들이 꽤 있다(가끔 보면 좀 도라이 같기도 함). 안무가로서, 그리고 공연 디렉터적으로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라틴 댄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탱고, 살사, 컨템퍼러리 요소를 섞어 스토리텔링까지 들어가 진짜 재밌고 통통 튄다. 설명 길게 해 봐야 지겹고 이걸 보면 된다. 2008년 아메리카 볼룸 챌린지에서 공연한, 매트릭스를 차차차 - 룸바 - 파소도블레로 표현한, 마봉피셜 세기의 걸작이다.

America's Ballroom Challenge 2008 - Max Kozhevnikov and Yulia Zagoruychenko 영상출처 유튜브 Systomaton

난 처음에 이 공연 영상을 봤을 때 얘네 도랐다 싶었다. 그냥 이야 미친놈들이구나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때 율리아는 아직 짱짱한 20대라 몸도 가볍고 텀블링까지 훌쩍 넘고 구르고 돌고 날아다니고 아주 난리다. 물론 40대인 지금도 기량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다음 파트너이자 남편인 리카르도 코키(Ricardo Cocchi)하고 출 때는 저렇게 구르고 넘는 건 잘 안 한다. 그리고 젊을 때라 그런가 20대 때 영상을 보면 새파랗게 독기마저 느껴진다(개인적인 소감이다).


동영상 해설에서도 Very still bodies(안정적인 몸)이라고 나오는데, 이전에 올린 조안나 레우니스처럼 도라 버린 스핀은 아니지만 율리아는 모든 동작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흔들림이 없다. 그러면서도 빠르고 파워풀하다. 아마도 율리아 이후로도 율리아 같은 선수가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냥 다 잘함 - 못하는 게 없으니까

보통 그래도 댄스스포츠 선수들이라면 다섯 종목들 중에 그래도 얘는 이게 주종목이라거나 이건 좀 약하다 싶은 것들이 있는데, 율리아는 그냥 다 잘한다. 그 다 잘하는 것들 중에 자이브를 제일! 잘한다는 평이라 자이브의 여왕이라고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이브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는 풍문이다.


막스와 같이 한 공연으로 내가 좋아하는 다른 영상은 이거다. 위의 동영상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공연한 것인데 삼바 - 차차차로 이어지는 춤이 빨리 감기 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날래고 정확하고 아름답고 잽싸다. 얘네 표정을 좀 봐주기 바란다. 아주 자신감이 넘친다. 이 두 사람이 공연하는 걸 보면 댄스를 그냥 씹어먹으면서 즐기고 갖고 논다.

America's Ballroom Challenge 2008 - Max Kozhevnikov and Yulia Zagoruychenko 영상출처 유튜브 Systomaton


다음으로 볼 동영상은 2007년 월드 수퍼 스타즈 댄스 페스티벌(WSSDF)에서의 공연인데,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수퍼맨으로 등장해서 라틴이 아니라 모던인 퀵스텝으로 시작한 다음 왈츠 잠깐 보여주고 광란의 자이브를 춘다(이거 보면 율리아가 이것저것 다 잘 해도 역시 자이브가 최고인것 같다). 종목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

2007 World Super Stars Dance Festival Latin, 영상출처 유튜브 afrobot2007


확실히 나중에 리카르도랑 공연한 거랑 비교해 보면 막스랑 출 때가 막스의 똘끼(?) 때문인지 더 재밌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리카르도하고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진짜 오래 해 먹었기 때문에 정통파 라틴 공연도 실험적인 공연도 숫자로 치면 그쪽이 훨씬 많다. 리카르도와의 영상은 다음 편에 갖고 오겠다. 라틴댄스 역사상 가장 완벽한 커플을 보고 싶으시면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시라.


율리아 사진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 팔과 어깨와 가슴 근육이 너무 멋져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출처 WDC(World Dance Council)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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