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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괴물과의 싸움

오델 몽테 (2)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기대와 걱정과 불안과 감사의 말로 아우성을 치는 통에 세라비는 겨우 촌장 노인에게 플로르 왕자를 부탁하고 나올 수가 있었다. 세라비와 레이는 괴물을 물리치러, 그리고 레이첵은 그 장면을 기록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괴물이 무섭다고 따라오지 않을 줄 알았던 사촌에게 세라비는 처음으로 두려운 감정을 품게 되었다.


북쪽 산기슭을 향해 떠나는 세라비와 레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오델 몽테의 어르신들은 저마다 알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으며 산과 언덕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일부는 집으로 돌아가 이들이 괴물을 무찌르고 돌아오면 성대한 잔치를 열기 위해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실패하면 잔치가 아니라 장례식을 치러야 할 텐데 그런 생각들은 전혀 하지 않고 있군.’하고 세라비는 복잡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 북쪽 산이라고 부르는, 오델 몽테와 이어지는 산등성이는 오래된 튼실한 나무들이 많고 경사가 완만한 데다 햇빛도 잘 들어 화전민과 나무꾼들이 띄엄띄엄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이 북쪽 산에 터를 잡고 살게 된 이후로는 모두 집을 잃고 오델 몽테에 쫓겨와 있었다. 괴물에 의해 무너지고 짓밟힌 오두막과 울타리 옆에는 괴물이 먹고 버린 돼지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광경과 돼지뼈 썩는 역겨운 냄새로 세라비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그곳을 지나갔다.


“괴물의 키는 집 두 채 정도 되고,”라고 촌장 노인은 세라비에게 설명해 주었다. “몸 색깔은 곰팡이처럼 푸르딩딩한데, 손바닥은 또 어찌나 큰지 저 우물 뚜껑만 하다네. 쾅하고 한번 내리치면 소도 돼지도 그냥 한방에 납작해지고 마는데…”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레이는 브뤼메 산맥에서 수련할 때 그런 괴물 따위 아침저녁으로 보았던 사람처럼 여유 있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윽고 세라비가 괴물을 잡으러 간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아우성치는 통에 세라비는 도망칠 기회를 놓치고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레이를 따라 북쪽 산으로 향한 것이었다.


레이는 그런 세라비를 돌아보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세라비 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근처까지 가서 괴물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너무 위험하면 다시 돌아오도록 해요.”


“그걸 꼭 가까이 가서 보고 결정해야 하니?” 세라비가 땀이 흐르는 손을 옷자락에 닦으며 말했다. “설명만 들어도 이미 사이즈에서 얘기 끝난 것 같은데?”


“그렇군요.” 레이는 웬일로 순순히 세라비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럼 다시 마을로 내려가도록 하죠.”


세라비가 이 말에 아이고 신령님 감사합니다, 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안 돼요 세라비 누나!”


기록에 집착하여 무서운 괴물이 있다는데도 좋다고 따라온 레이첵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고 있었다.


“누나가 이미 괴물을 향해 용감하게 가고 있다고 썼는데, 그다음에 무서워서 돌아갔다고 쓸 수는 없어요!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될 거예요!”


“야, 그럼 네가 할래?” 세라비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고대의 검을 땅바닥에 패대기치며 말했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기 싫으면 네가 이거 갖고 가서 괴물 잡아. 내가 적을게. 그럼 되지!”


“기록 담당은 저예요! 오기 전에 약속했잖아요!”


“포르트메르에서는 무서워서 울고만 있더니 사람은 무섭고 괴물은 안 무섭냐?”


“여기까지 왔으면 괴물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비겁하게 중턱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비겁?” 세라비는 혼미해지는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괴물 잡으러 왔다가 중간에 돌아가면 비겁하지. 왕명을 어기고 다시 돌아가도 비겁하지.” 어쩌다 보니 밀사에, 도망에, 예정에도 없던 괴물을 죽이러 가고 있는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생각하니 세라비는 명치 속 깊은 곳에서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비겁하면 좀 어때서? 다들 정정당당하게 사나 본데 난 원래, 태생부터가, 천성도, 생긴 것도, 하는 짓도 모두 비겁하다구!!!”


세라비의 분노에 찬 외침은 조용한 산골의 아직 데워지지 않은 아침 공기를 뚫고 마을과 숲과 산너머까지 메아리쳤다. 레이첵은 누나가 그렇게 진심을 담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바로 그때.


“우우우워어어어어어!!!”


쿠쿵 쿵! 하고 나무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산 안쪽 깊은 곳에서 맹수의 것이 아닌, 천둥소리보다 더 크고 깊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괴물이다!”




괴물은 오늘따라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날 오델 몽테로 돼지나 좀 잡아먹으러 갈까, 하고 내려가던 괴물은 가는 길에 살찐 다람쥐 서너 마리를 발견하고 잡아먹었다. 그런데 병든 다람쥐가 그 속에 섞여 있었는지 속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물이라도 마시려고 샘으로 가는 길에 예전에 북쪽 산에 살던 나무꾼들이 괴물 때문에 미처 회수해가지 못한 도끼를 밟아 발바닥을 베었던 것이다. 괴물은 배도 아픈데 발까지 다쳐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오델 몽테와 북쪽 산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괴물은 브뤼메 산맥 안쪽에 살고 있는 얼마 안 남은 괴물족의 일원이었다. 브뤼메 산맥에는 바깥세상에서 인간들이 국가를 이루고 번성하게 되자 살 곳을 찾아 숨어 들어온 괴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보다는 자기들 덩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생물들이 갑자기 개체수가 확 늘어나며 모든 땅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산으로 숨은 소심한 생물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을 피해 산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후 산짐승을 사냥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괴물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긴 세월을 인간과 접촉 없이 숨어 살아온 괴물들이었으나,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아주 오래전, 땅에 인간과 괴물과 요정과 기타 정의되지 않은 생물들이 다 같이 살던 시절에는 한때 괴물족의 왕국도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그때에는 평평한 땅의 작은 종족(괴물들이 인간을 일컫는 말이다)도 괴물들을 두려워하여 공물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괴물들 사이에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북쪽 산의 괴물은 그런 수줍은 괴물 족의 일원이었다. 그는 어쩌다 동족을 떠나 혼자 인간의 마을 곁에 살게 되었을까?


이 괴물은 성질이 포악한 편인 데다 게으르고 머리도 매우 나빴기 때문에 열심히 사냥을 해서 먹고사는 동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동족들은 팀워크가 필요한 사냥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따돌림을 당한 괴물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산속에서 인간의 농가와 축사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한두 마리씩 훔쳐 먹었다. 애써 뛰어다니며 사냥하지 않아도 이렇게 쉽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니! 게다가 인간들은 자기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달리 두려워하며 도망칠 뿐이었다.


괴물은 더욱더 대담해져서 북쪽 산까지 왔을 때에는 인간을 위협하여 쫓아버리며 외양간과 돼지우리를 부수고 가축을 잡아먹는,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자신감에 차 있는 괴물이 하필이면 심기도 불편한 상황에서 세라비들이 괴물을 처치한다고 산을 오르고 있었으니 상황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세라비는 괴물의 울부짖음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의 휘황찬란한 광채는 오전의 햇빛을 받아 숲 속을 불태울 듯이 뜨겁게 타올랐다. 검을 들고 있던 세라비조차도 눈이 부셔서 앞을 똑바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편 괴물은 이상한 빛이 숲 속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괴물은 빛이 나오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쿵! 쿵! 하고 울리며 대지와 바위와 나무가 흔들렸다.


세라비와 레이는 숨을 죽이고 나무 뒤에 숨었다 (레이첵은 기록을 위해 이미 더 안전한 곳으로 숨어 있었다). 그러나 나무 뒤에 숨어도 이미 고대의 검에서 엄청난 광채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괴물은 세라비를 금방 발견하고 말았다. 쿵! 괴물의 무지막지한 발에 밟혀 우지끈하고 나무가 또 부러지더니, 이윽고 괴물의 모습이 세라비와 레이의 눈앞에 나타났다.


푸르딩딩하고 억세고 거친 피부에, 촌장의 말대로 이층 집만큼 큰 괴물의 위압적인 모습에 세라비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괴물은 오델 몽테의 우물 뚜껑만큼 큰 손에 방금 부러뜨린 나무를 둥치째 잡고, 붉고 사악한 눈으로 세라비를 노려보았다.


“누나! 힘을 내요!”하고 레이첵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채 어디선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미 공포에 질린 세라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괴물은 세라비를 발견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동안 민가를 습격하면서 인간들이 전혀 반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 힘없는 노인들이 쇠스랑이나 도리깨 같은 것을 휘두르며 위협만 좀 하다가 도망치는 정도였기 때문에 괴물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들이 실제로는 더 무섭고 영리하며, 작아도 여러 명이 떼로 달려들어 공격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괴물은 언젠가는 인간들 중에서 젊고 덩치도 큰 개체들이 모여 자신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뭔가 무기 같은 것을 갖고 나타난 인간은 덩치도 크지 않고 몸에 사냥하다 생긴 흉터도 없는 약해 보이는 개체였다. 괴물은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우웍웍웍!”하고 괴물은 다시 포효한 다음 나무를 둥치째 마구 휘두르며 세라비에게 돌진했다. 재수 없다, 재수 없어. 감히 산속의 지혜로운 사냥꾼(괴물족이 자신들을 일컫는 말이다)의 일족인 나를 얕잡아보고 저런 약해빠진 인간을 보내다니. 돼지 대신에 먹으라고 보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세라비는 괴물이 달려오자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세라비는 다급히 레이를 불렀다.


“레이!”


그러나 레이첵도 레이도 대답이 없었다. 레이첵은 기록한다고 어딘가에 숨어 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세라비의 뒤에 있던 레이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괴물을 공격하기 위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그러나 괴물이 코앞에 도착했는데도 레이의 공격은 없었다.


세라비는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일어나 검을 손에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는 검의 광채가 눈부셔서, 혹은 괴물이 너무 무서워서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익숙지 않은 검의 무게로 비틀거리며 검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괴물은 검의 눈부신 광채로 잠시 시야를 잃어 세라비에게 제 때 일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라비의 검은 괴물의 넓적다리에 제법 깊은 상처를 입혔다.


뜻밖의 일격에 괴물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괴물이 한발 늦게 휘두른 나무는 세라비에게 빗맞았지만, 세라비는 저만치 떨어진 낙엽더미에 처박혔다.


“세라비 누나!” 레이첵이 처절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라비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을 일으켜 옆에 같이 내팽개쳐진 검을 잡았다. 저 염병할 검만 없었어도 나한테 저 괴물을 없애라고 하지도 않았을 텐데. 세라비는 두려움과 원통함으로 눈물을 왈칵 쏟으며 검을 쥔 손을 괴물 쪽으로 향했다. 검을 한 손으로 잡는지 두 손으로 잡는지도 모르는 내가, 이걸 갖고 괴물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괴물이 휘두른 나무의 날카로운 가지와 나무껍질에 찢긴 세라비의 팔다리와 볼에 피가 흘렀다. 세라비는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아직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괴물의 등 뒤를 향해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괴물도 몸을 일으켜 고통과 분노로 더욱 큰 괴성을 지르며 세라비를 향해 달려왔다. 어린 나무들이 모두 부러지고 땅이 깊이 패였다. 검을 다시 휘두를 틈도 없이 이번엔 괴물의 우악스러운 손에 제대로 맞은 세라비는 다시 멀리 날아가 나무들 사이에 내팽개쳐졌다.


마침내 괴물은 세라비를 발견하였다. 세라비는 오래된 가문비나무의 큰 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레이첵은 바위 뒤에서 공포에 떨며 기록하는 것도 잊고, 괴물이 세라비가 걸려 있는 나무를 손가락으로 톡톡 튕겨 세라비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괴물은 세라비를 한방에 납작쿵을 만들기 위해 문짝만 한 거대한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세라비의 가물거리는 시야에 괴물의 분노로 더욱 붉어진 기분 나쁜 두 눈이 들어왔다. 곧이어 거대한 발바닥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아아, 이제 끝이구나. 세라비는 마음속으로 라를르 마을의 자신의 집에 작별을 고했다. 세라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시퍼런 발바닥이 무언가가 터지는 폭발음과 함께 갑자기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라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얼핏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


아침해가 찬란한 숲 속에서 갈색 망토를 입은 여성이 황금빛 검을 들고 거대한 괴물의 손과 마주 서 있는 장면

안녕하세요,

마봉 드 포레입니다.

요새 제가 몸과 마음이 좀 힘들다 보니

존경하는 작가님들의 글에 놀러가면서

원래는 라이킷 찍고 파이팅 넘치는 댓글도 달고 오는게

나름 하루를 마무리하는 재미였는데

갑자기 연료가 다 떨어진 듯 힘도 의욕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소중한 동료 작가님들의 글은 여전히 즐겁게 감상하고 있습니다.

다시 기운 찾아서 예전처럼 방정 떨며 복습하고 환장댓글 파티하러 갈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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