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델 몽테 (1)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오델 몽테에 간다고요?”
여관 주인 아줌마가 물었다. 세라비와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여관 없는데… 잘 데는 있수?”
세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줌마는 혀를 찼다. “길에서 자면 이런 날씨라도 죽어요 이 양반들아!”
“가서 아무 데서든 좀 재워 달라고 해보려고 하는데요…” 세라비가 자신 없게 말했다. 아줌마는 친절하게도 오델 몽테에 가면 어디어디 가서 묵으라고 얘기를 해주었다.
“근데, 거기 지금 별로 손님을 환영할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두시우! 곰인지 뭔지가 나타나서 가축을 다 잡아먹는다고 하더라구.”
세라비는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하고 여관을 떠났다.
처음으로 마차 없이 걸어서 길을 떠난 세라비 일행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일단 왕자님은 짐을 많이 지게 할 수가 없었고, 레이첵은 허약했으며, 줄이고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사람의 짐은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와 세라비가 네 명 분의 짐을 거의 나누어 들었다. 레이첵은 왕자님만 잘 데리고 따라오면 한 사람 역할로는 충분했다.
레이만 빼고, 하루종일은커녕 잠깐도 산을 올라 본 적 없는 세 사람 때문에 전진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나마 세라비가 비록 매일 집에서 게으름만 피우며 누워 지냈을지언정 체력 자체는 좋았으므로 두 명 분의 짐을 지고도 산행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본격적인 산악지역으로 들어가기 전, 레이가 알고 있는 한 거의 마지막 촌락에 해당하는 오델 몽테였다. 포르텔 몽테에서 하루 종일 걸으면 해 지기 전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세라비들은 해가 지고 나서도 도착하지 못했다.
그나마 오델 몽테와 포르텔 몽테를 오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탓에 산길은 생각보다 고른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겹달의 달’인 9월로써, 첫 번째 달인 카마와 두 번째 달인 로나가 초저녁부터 나란히 떠 있는, 일 년 중 달빛으로 책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시기였다.
세라비들은 환한 달빛에 비친 산길을 걸어 한밤중이 다 되어 오델 몽테에 도착했다.
오델 몽테는 산중턱을 깎아 약초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해서 가죽을 팔거나 해서 먹고사는 산골 사람들 열 두어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촌락이었다. 세라비들이 농가 옆을 지날 때마다 개들만 컹컹 짖었고 그 이외에는 아주 고요했다.
세라비들은 포르텔 몽테의 여관집 주인아줌마가 알려준 통나무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여관 주인 아줌마의 친정아버지인 노인이 혼자 살아서 나그네가 오면 곧잘 재워 준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그 시간에 낯선 사람들을 넷이나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세라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라비는 포르텔 몽테의 여관 주인 아줌마의 이름을 댔다. 노인은 이들을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산속의 밤은 쌀쌀했지만, 노인의 집 안에는 난롯불이 타고 있어 따뜻했다. 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하루 종일 산길을 오른 플로르 왕자는 노인이 끓여준 옥수수죽을 먹다가 앉은 채로 그냥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해도 뜨기 전 어스름한 새벽에 노인이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에 곤히 자던 세라비는 잠이 깼다.
“어르신, 이 시간에… 어딜 가세요?” 세라비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나무 좀 하러 가려고. 자네들은 더 자게나.” 노인이 대답했다.
“아직 어두운데 해 뜨고 가시지 그러세요.”
노인의 얼굴은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요새 마을에 북쪽 산의 괴물이 내려와서 해뜨기 전에 일찍 나가지 않으면 땔감을 못 구한다네. 예전에는 이렇게 아래까지 내려오진 않았었는데, 요새는 산에 짐승이 떨어졌는지 낮이 되면 마을 근처까지 내려오거든.”
아니 그럼 진짜 위험한 거 아닌가? 괴물하고 안 마주치려면 그럼 우린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모아 놓아야 겨울 내내 쓸 땔감을 다 채울 수 있다네. 원래는 가을부터 해도 되는데 괴물 때문에 오래 나가 있을 수가 없어서…”
세라비는 땔나무가 없어서 추운 겨울을 지낼지도 모르는 노인을 동정하기 앞서, 괴물이 나온다는 산을 지나가느니 빨리 포르텔 몽테로 도로 내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제 왔던 길을 하루 종일 걸으면 오늘 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여관에 맡겨놨던 말과 마차를 도로 찾아서 가장 빨리 이카레이유로 돌아가야지. 왕자님을 이런 위험한 곳에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여정에 별 도움 안 되는 사촌 녀석도 도로 이카레이유로 보내버린 다음 삼촌이 찾을 수 없는 섬 같은 곳으로 도망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 참이었다.
세라비의 머릿속에 도망가서 숨어 지낼 장소 리스트까지 다 만들어지는 동안 노인은 나갈 채비를 다 하고 지게를 지더니 어디론가 가 버렸다. 세라비는 귀찮았으나, 하룻밤 신세를 지게 해 준 은혜를 갚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레이를 데리고 노인을 따라갔다.
노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숲의 빈터에는 오델 몽테의 주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하며 땔나무를 만들고 있었다.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그래서 나무하는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오오 당신들은 못 보던 사람들이로군요! 좋은 시기는 아니지만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람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손님들이로군요!”
어르신들을 도와 나무도 나르고 쪼개고 하던 세라비는 노인에게 괴물이 언제부터 나왔는지, 아랫마을이나 도시에 도움을 청하거나 다 같이 가서 괴물을 처치하거나 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세 번째 질문은 노인밖에 없는 주위를 돌아보면 이미 물어볼 필요도 없긴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괴물을 처치해 보려고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네. 북쪽 산기슭에 살던 사람들도 다 이쪽으로 피난을 왔는데, 그놈이 이젠 우리 마을까지 내려와서 가축우리를 부수고 돼지를 잡아먹는 바람에 우리도 마을을 버리고 포르텔 몽테로 피난을 가야 하나 생각 중일세.”
“도시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 보셨어요? 포르텔 몽테에는 마을 경비대도 있잖아요. 아니면 임금님께 괴물을 없앨 병사들을 보내달라고 해보신다던가요.”
“임금님 같은 높으신 분들이 이런 촌구석까지 어떻게 신경 쓰시겠나.”하고 노인이 대답했다. 세라비는 답답해서 가슴을 치며, 플로르 왕자가 이런 얘기를 좀 들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다.
“괴물이 자꾸 내려와서 우리를 부수고 가니 다음 주부터는 일주일에 돼지 한 마리씩 북쪽 산기슭에 갖다 놓으려고 하네만. 그러면 그걸 먹고 여기에는 안 내려오지 않겠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라비는 드디어 폭발했다. “돼지를 미리 갖다 바친다구요? 그럼 괴물 여기 완전히 눌러 살 텐데요? 돼지 다 떨어지면 그땐 어쩌시려구요?”
“그땐 닭을 바쳐야 하나…”하고 다른 노인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닭도 다 떨어지면 그 다음엔요? 무우라도 뽑아다 주시려구요?”
“아니 그럼 당신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겁니까!”라며 어르신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세라비는 깜짝 놀라 톱질을 하던 손을 멈췄다.
“음…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무기를 들고 덤빈다거나?”
물론 세라비는 좋은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실망으로 모두 시무룩해졌다. 세라비는 너무 답답해서 “여기 촌장님 계실 거 아니에요? 촌장님과 상의해서 다 같이 작전을 짜면…”하고 말했으나 어제 세라비들을 재워 준 노인이 “내가 바로 촌장일세.”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다 농사만 짓고 살던 사람들이라 곰이 나타나도 겨우 내쫓는 게 전부인데, 그렇게 크고 무서운 괴물을 어떻게 잡겠나.” 촌장 노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다 같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집을 버리고 피난을 가면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네. 나야 포르텔 몽테에 사는 딸한테 가면 된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갈지…”
“아가씨가 도와주면 안 되겠수?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주 용감하신 분 같은데, 우리 늙은이들 좀 도와주시구랴!”
세라비가 이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마을 사람들이 촌장을 포함해서 모두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이러세요!’” 세라비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기대에 찬 눈으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말을 꺼낸 노파가 다시 한번 간절하게 말했다. “아가씨라면 어쩐지 가능할 것 같아서 그렇수! 우리 마을에 이렇게 씩씩한 젊은이가 있었으면 벌써 괴물 따위 잡아 죽였을 텐데 보시다시피 농사짓는 늙은이들 뿐이라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 거 아니겠수? 부탁 좀 합시다 아가씨! 아가씨가 이 마을에 온 것도 괴물을 없애라는 신의 뜻일 지도 모르잖수!”
사람들이 전설의 용사라도 본 듯 세라비를 둘러싸고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세라비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때 레이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나무랐다.
“도움을 청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드시면 어떡합니까! 마을에 온 손님인데 갑자기 괴물을 잡아달라니요! 이 분은 그냥 목소리만 큰 보통 사람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냥 목소리만 큰 거였구나, 하고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중얼중얼하더니 곧 다시 일하러 흩어졌다. 세라비는 레이에게 감사했지만 왠지 기분은 좋지 않았다.
촌장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세라비는 레이첵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레이첵은 “누나라면 괴물 죽일 수 있죠! 그러면 제가 누나의 멋진 모습을 기록해 드려야겠네요!”라며 이카레이유에서 특별히 준비해 온 다이아몬드 펜촉이 달린 금펜을 꺼냈다.
“괴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노인이 듣고 있다가 희망에 차서 물었다. 세라비는 사촌 녀석을 죽일 듯이 흘겨보았다.
“게다가 우리 레이 형님은 파괴 마법 전문이시니까 괴물쯤은 1초 만에 부숴버릴 수 있을 거예요!”
노인이 가슴이 벅차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데도 레이첵은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그뿐 아니라 누나는 이번에 엄청 멋진 고대의 검도 구했잖아요? 이번에 그 검의 품질도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세라비는 레이첵의 입에 뭐든지 처넣고 꿰매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숨을 가다듬은 노인이 “고대의 검이라니 무슨 말인가?”하고 끼어들었다. 세라비는 떠나려고 이미 싸 놓은 짐에서 두꺼운 천으로 잘 둘러놓은 고대의 검을 꺼내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세라비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자, 검은 수상한 가게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어두운 오두막 안을 훤히 비추었다. 경이로움에 경련을 일으키는 노인의 얼굴도 찬란한 빛 속에 드러나 보였다.
“이거야말로 엄청난 검이 아닌가!” 노인이 외쳤다. “이 검과 파괴 마법이라는 것만 있으면 괴물은 당장 없앨 수 있겠구먼!”
“검을 사용하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세라비 님이시랍니다.” 레이가 친절하게 정정했다. “그리고 전 파괴 마법사이긴 한데, 하기 전에 반드시 관리청에 신고를…”
노인이 이곳은 하도 시골이라 행정구역 구분조차 없다고 반박하려고 하는데, 레이첵이 “하지만 우리 레이 형님은 마법이 없어도 무예로 단련되신…”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방금 전의 세라비와 같은 심정이 되었다.
세라비는 레이첵의 옆구리를 몇 대 걷어차서 한동안 아무 자랑도 할 수 없게 만든 다음 레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해가 가난한 산골 마을의 지붕들을 비추며 숲 위로 떠올랐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밭에 접시꽃이 심어진 안마당에는 노인이 직접 정성 들여 만든 개집과 나무를 파 만든 밥그릇과 물그릇이 있었다.
“세라비 님.”
“왜?” 별로 얘기할 기분이 아닌 세라비가 대답했다.
“괴물 처치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레이가 말했다.
“왜? 또 신의 계시라도 받았어?” 세라비는 매우 불쾌한 기분으로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산골까지 온 것만 갖고도 이미 신도 놀라 기절할 일이야. 그리고 고대의 검인지 현대의 검인지 그건 집에 돌아가면 우리 집 장식으로 쓸 거니까, 행여라도 그거 갖고 괴물 잡으러 가자고 하지는 말아 줄래?”
“세라비 님은 아실 거예요.” 레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항상 세라비 님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요. 이 마을의 괴물을 물리치는 것 역시 세라비 님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으면 포르텔 몽테의 가게에서 갑자기 왜 검 같은 것을 사고 싶어 졌겠어요? 원래 그런 것 사 보신 적 없잖아요.”
“괴물을 잡아야 한다면 네 파괴 마법으로 하면 되지 않아? 검을 샀다고 해서 내가 저걸 쓸 줄 아는 건 아니잖아! 난 이런 데서 죽기 싫어!”
후드 아래 가려진 레이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같은 아첨이나 장난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후드에 가려져서 안 보이는데 세라비가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바람이 숲을 스쳐 지나가며 돌소나무와 가문비나무의 가지랑 잎들을 흔들며 솨아아 소리를 내었다. 이른 낙엽들이 땅에서 원을 그리며 맴돌며 공중으로 휘몰아쳐 올랐다.
“세라비 님은 죽지 않아요. 제가 보장해요. 제 마법으로 지켜 드릴 수 있어요.”
세라비는 바람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숲 너머 눈 쌓인 브뤼메의 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레이의 후드도 세라비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눈 덮인 산봉우리 너머에서 고대의 말을 속삭이는 한 줄기 바람이 다시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을 펄럭였다.
“컹컹!”
노인이 키우는 개가 짖었다.
세라비는 레이를 말없이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