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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레이의 오판

오델 몽테 (3)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가 정신을 잃으면서 본 장면은 꿈이 아니었다. 레이첵이 세라비를 부르며 울부짖고, 괴물의 발바닥이 허공을 가르며 세라비를 향해 내리 찍히던 긴박한 순간, 사라져서 안 보이던 레이가 어디선가 바람과 같이 나타나 손을 내밀며 짧은 주문을 외친 것이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강한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거대한 힘이 괴물을 향해 밀어닥쳤다. 괴물은 곰 스무 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소리로 포효하며 숲 위를 날아 산 위쪽 어딘가에 팽개쳐졌다.


레이는 세라비를 등에 업었다.


“검 주워 와요, 빨리!”


레이첵은 정신을 차리고 세라비의 검을 주워 들었다. 레이는 세라비를 업은 채 마을을 향해 달리며 레이첵에게 소리쳤다.


“뛰어요! 괴물 안 죽었어!”


레이첵은 검과 기록장과 펜을 가슴에 꼭 안고 미친 듯이 레이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두 레이는 정신없이 뛰고 또 뛰어 촌장과 플로르 왕자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공포로 울부짖고 있는 오델 몽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라비가 촌장 노인의 집 난롯가에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삼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온몸이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고,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로 쓰라렸다.


“누나가 깨어났어요!”


레이첵의 눈물자국이 가득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어 촌장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이 부산을 떨며 약이며 수프 같은 것들을 차례로 들고 왔다.


세라비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레이 형님이 누나를 구했어요! 괴물도 날려버렸구요.” 레이첵이 울먹이며 설명했다.


“죽…었냐? 괴물…?”


방 안의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자마자 괴물의 생사여부부터 물어보는 세라비의 영웅적인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누나 검에 상처를 입었어요. 삼일째 마을에 내려오지 않고 있어요!”


세라비는 발바닥이 자신을 향해 내리 꽂히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살아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행복해서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사람들은 세라비가 괴물을 끝장내지 못한 것이 분해서 우는 줄 알고 그 모습을 먹먹히 바라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레이는?”


레이첵은 세라비가 마법사 레이를 찾는 줄 알아차리고 밖으로 나가 레이를 얼른 데리고 왔다. 세라비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나가도록 했다.


“왜 안 도와줬어?” 이제 조금씩 말이 나오기 시작한 세라비가 레이에게 물었다.


“안 죽게 한다고 했잖아… 마법으로!”


레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없이 세라비의 여기저기 상처 입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던 그의 얼굴은 이제 아득한 절망의 빛으로 그늘져 있었다.




시점은 다시 어제 아침으로 돌아가서, 레이는 가기 싫어서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는 세라비와,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이(싸울 생각이 없으므로) 기록장과 펜만 들고 따라오는 레이첵과 함께 괴물이 출몰하는 북쪽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태연한 그였으나 레이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레이는 남풍의 신 쉬드르의 신전에서 계시를 받고, 신께서 지목하신 라를르 마을에 사는 세라비라는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인물일지 상상하며 그랑쿠르를 떠났다.


라를르에 도착하기도 전인 프티 몽텔리의 술집에서 세라비를 만난 레이는 초면부터 자신의 멱살을 잡는 세라비의 기세에 감탄하며 역시 신이 따르라고 하신 인물임을 확신했다.


그 후의 행보를 보면 세라비는 비범한 인물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러나 레이의 경험상 신께서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 틀림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심드렁하고 만사 귀찮은 듯이 행동하지만, 저런 사람일수록 숨은 고수일 확률이 높지.’하고 레이는 생각했다. 세라비의 여유로움은 어릴 때 스승님의 집으로 놀러 오곤 하던 스승님의 고수 친구들의 풍모 바로 그것이었다.


‘젊은 여자가 벌써 고수의 위치에 올랐다면 얼마나 어릴 때부터 단련을 해왔을까?’


젊은 여인은 쉽게 비범함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균적인 인간들보다 더 허술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는 의심하지 않았다. 원래 고수들이란 한 방면에서 특출 난 반면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일반인보다 더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부분은 레이가 보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델 몽테까지 오는 동안 세라비가 아직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으므로, 레이는 이번에야말로 세라비의 숨은 능력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세라비가 아직 고수가 아니라면, 이번에 괴물과 싸우면서 자신의 숨은 능력을 자각하고 각성의 단계를 거쳐 고수의 길로 발을 들이게 될 것이었다. 포르텔 몽테의 신비로운 잡화점 주인조차도 세라비에게 훌륭한 검사라고 했다 하지 않았는가. 고수의 위대한 여정의 시작을 곁에서 목도하게 되다니, 매우 영광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괴물이 나오는 산기슭까지 온 레이는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기 시작하자 재빨리 큰 나뭇가지 위에 몸을 숨기고 세라비가 자신의 힘을 자각하여 괴물을 쓰러뜨리기를 기다렸다. 세라비가 제대로 들 줄도 모르는 고대의 검을 본능적으로 뽑아 드는 것을 보고 레이는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눈을 감고 검을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싸우는 폼이 너무 엉망진창이잖아. 빨리 힘을 자각해라, 자각해…!


레이는 각성의 순간을 기다리며 나무 위에서 세라비가 괴물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지금쯤은 각성을 해야 하는데? 아아 저러다 죽겠네. 저거 맞으면 진짜 죽는다.


레이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괴물에게 일격을 가해 날려버린 다음, 쓰러진 세라비를 업고 냅다 도망쳤다.




레이는 세라비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수련할 때 쓰는 깔개를 가지고 촌장의 집에서 나와 남쪽 땅이 잘 보이는 산중턱으로 가서 남풍의 신 쉬드르를 향해 기도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검은 안개처럼 조금씩 퍼지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을 섬기는 사제와 달리, 마법사가 신의 계시를 직접 듣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스승인 대마법사 라마야나도 신의 계시를 듣고 본 마법사들 중 하나였다. 레이는 들판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일 때부터 스승으로부터 신에게 말을 거는 법, 신의 말을 듣는 법, 신의 신성한 목소리와 산과 들에 사는 장난꾸러기 정령들의 말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레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다. 세라비가 아직 힘을 자각할 때가 아니라는 가설, 세라비가 다른 분야의 힘을 가졌다는 가설, 세라비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가설.


어느 쪽이 맞다 한들, 레이에게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여기까지 일행을 오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아니 당신은 고수가 아니군요! 그럼 전 이만!”하고 도로 가버릴 수는 없었다.


세라비의 엉망진창으로 다쳐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레이의 얼굴은 이런 이유로 매우 어두웠다.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세라비가 거듭 묻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각성하는 거 보려고 옆에서 지켜봤다고? 사실은 숨은 힘을 가진 고수인 줄 알고 기다렸다고?


레이는 필사적으로 이젠 세상에 계시지 않은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스승님,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레이는 마음속으로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세라비 님!”하고 마침내 레이는 세라비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꿇어앉아 흐느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마법을 쓰는 바람에…”


세라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원망스럽게 레이를 쳐다보았다. 레이는 세라비의 부어오른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같이 괴물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마력이 너무 늦게 올라왔어요…”


레이는 곁눈질로 세라비가 납득하는 얼굴인지 아닌지를 확인한 다음, 계속해서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세라비 님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히, 더 늦기 전에 마법이 들어서…! 다음부터는 절대 세라비 님이 다치지 않게 할게요. 약속해요.”


세라비는 눈을 감았다. 레이를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화를 낼 기운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임을 레이는 알고 있었다. 스승님, 하고 레이는 마음속으로 라마야나 스승님을 불렀다. 스승님은 이럴 때 무조건 사과부터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유 같은 건 나중에 때 되면 설명해라. 무조건 사과해라. 아아 스승님, 당신 말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또한 이렇게도 말씀하셨었다. 신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졌다면, 그다음부터는 의심할 필요 없다고. 그래서 레이는 계속해서 가기로 마음먹었다.


숲속에서 세라비가 빛나는 검을 들고 괴물과 맞서는 장면을, 나무 위에 앉은 레이가 조용히 지켜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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