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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들의 도시를 향하여

오델 몽테 (4)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가 왜 도와주지는 않고 기록만 하고 있었냐며 레이첵의 등짝을 두들겨 줄 정도로 회복될 무렵, 촌장의 집으로 단정하게 생긴 한 젊은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젊은이의 이름은 첼레라고 했다. 그는 몇 달에 한 번씩 산에서 내려와 포르텔 몽테의 상점가에 들러 말린 생선이나 고급 직물, 담배, 설탕으로 만든 과자 같은 것들을 잔뜩 샀다. 그리고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델 몽테의 촌장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곤 했다.


첼레는 이번에도 역시 짐을 한 무더기 지고 왔지만, 이번에는 하룻밤 묵는 것만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첼레는 아랫마을에서 어떤 용감한 젊은 여인과 마법사 일행이 오델 몽테와 북쪽 산에 나타나는 괴물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세라비가 괴물을 물리쳤다는 소문은 이미 포르텔 몽테 인근까지 퍼져 있었다. 괴물이 그날 이후로 다시는 북쪽산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위해 괴물을 물리치고 쓰러진 젊은 여인과 마법사를 찬양하며 직접 보지도 않은 그들의 무훈을 서로 이야기했다.


노인의 집에 찾아온 첼레는 세라비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 주었다. 그는 바로 신들의 도시인 ‘템푸스 아르카’에서 온 사람이었다.


템푸스 아르카는 브뤼메 산맥의 깊은 곳에 지어진, 보통 사람들은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는 전설의 도시였다. 사람들은 템푸스 아르카가 실제로 있다고 믿기도 하고 전설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곳은 신들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사제들과 마법사들과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만이 살고 있다고 했다.


레이는 템푸스 아르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몽켈리에 마법 학교의 교수들 중에는 템푸스 아르카에 다녀온 사람이 있을 터였지만, 그들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템푸스 아르카의 존재는 사실로 취급되었다.


마법학교 교수들과는 반대로, 대마법사 라마야나는 레이에게 템푸스 아르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그는 칼베르 왕실을 떠나 이카리아로 넘어오면서 템푸스 아르카에서 지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레이는 첼레가 이들에게 템푸스 아르카에 같이 가자고 권하자 바로 찬성했다.


그러나 세라비는 템푸스 아르카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일정 문제를 들어 반대했다. 괴물이 사라진 틈을 타 빨리 산을 넘어 칼베르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첼레는 세라비가 괴물을 물리칠 때 사용했다는 고대의 검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검을 보고는 세라비에게 “이것은 당신을 위한 검이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전 이걸로 과일도 못 깎아요.” 세라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를 위한 검이라면 굳이 2500년 전에 만들어졌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의 목숨은 유한하지만 검은 그렇지 않습니다.” 첼레가 말했다. “검은 계속 존재하고, 주인이 계속 바뀌는 것이죠. 저와 함께 템푸스 아르카에 가면 당신을 훌륭한 검사로 만들어 드릴 스승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 갈 시간 없어요. 칼베르에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야 해요.”하고 세라비는 자세한 얘기는 빼고 자신들이 급한 일로 칼베르에 가는 중임을 설명했다.


“템푸스 아르카에 들려도 일정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첼레가 말했다. “템푸스 아르카의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산맥을 그냥 넘어간다면 3주는 걸릴 테지만, 템푸스 아르카를 거친다면 일주일이면 칼베르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템푸스 아르카의 시간은 신의 뜻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평균적으로 템푸스 아르카의 1달은 바깥세상에서 하루에 해당합니다.”


“좋은 곳이라는 건 알겠는데 왜 우리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거죠?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 그쪽에 무슨 도움이 되나요?” 세라비가 물었다.


“템푸스 아르카가 아니라 당신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첼레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일정이 더 빨라진다는 말에 세라비는 첼레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험한 산을 넘는 것은 레이첵이나 플로르 왕자에게도 매우 고생스러운 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세라비들이 오델 몽테에 머무르는 며칠간, 플로르 왕자는 레이첵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고구마도 얻어먹고 짚 짜는 것도 배우고 하면서 귀여움을 받았다. 호화로운 생활에 길들여져 매일 집에 가고 싶다고 울 줄 알았던 플로르 왕자가 의외로 잘 적응하는 것을 보고 세라비와 레이는 안심하면서도, 귀하신 분을 이런 곳에 계속 지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빨리 칼베르로 모셔서 이카리아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그렇게 보고 싶다는 게로스 왕도 만나게 해야 했다.


가파른 절벽과 전나무가 늘어선 브뤼메 산맥의 험한 산길, 안개가 깔린 골짜기 너머로 이어지는 외딴 오솔길이 보이는 장면.

세라비가 회복되는 대로 일행은 첼레의 뒤를 따라 템푸스 아르카로 떠났다. 플로르 왕자는 마을 사람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였으나, 곧 게로스 왕을 만날 수 있다며 기쁜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차가운 안개가 내려앉은 고산 지대의 이른 아침 브뤼메 산맥의 골짜기로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완만하던 숲길은 사람의 흔적이 옅어지며 차츰 거칠어졌고 점점 가파르게 위로 향했다. 안개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골짜기도, 첼레는 매우 익숙한 듯이 무거운 짐까지 지고 잘도 걸어갔다.


그들은 첼레가 이끄는 대로, 안개비가 내리는 숲과 계곡과 나무도 없는 바위투성이 언덕들을 지났다. 소리개가 세라비들의 머리 바로 위를 스쳐 날아가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양쪽이 깎아지른 듯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이루어진 좁은 골짜기를 통과하고 나니 다시 앞이 훤하게 트이며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완만한 민둥 언덕이 나타났다.


세라비는 지쳐서 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지나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오델 몽테에서 올려다보던 산들은 이미 세라비의 시선 아래에 있었다. 첼레는 몇 달에 한 번씩 템푸스 아르카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품들을 사러 포르텔 몽테까지 내려와 상점가에 들러 물건을 사고, 다시 같은 길을 걸어 템푸스 아르카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몇 년째 같은 길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지면 묵을 수 있는 장소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일행들(소년 포함)과 동행하는 바람에 밤이 되었는데도 동굴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들은 첼레의 뒤를 따라 어두운 산길을 걸었다. 밤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카마도 로나도 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는 마법으로 불을 밝혔다. 빛으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털실 뭉치 같은 마법의 구체가 일행의 머리 위를 조용히 떠다니며 발 밑을 비추었다.


첼레가 템푸스 아르카로 향할 때 묵는 첫 번째 동굴은 절벽 위에 있었다. 첼레는 익숙한 듯이 동굴 안쪽에 잘 모아둔 장작과 마른 나뭇잎을 모아 모닥불을 지폈다. 첼레의 동굴에는 이미 부싯돌이나 장작 그리고 물을 담는 그릇 같은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차갑고 습한 밤공기로 싸늘해진 몸을 모닥불 곁에서 녹이며 첼레와 세라비들은 오델 몽테의 촌장이 싸준 옥수수가루로 죽을 끓여 나누어 먹었다. 발이 아파서 훌쩍이는 플로르 왕자에게 레이는 포르텔 몽테의 상점에서 산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런 다음 모두 거칠고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모닥불 곁에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세라비가 눈을 떠 보니 동굴 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첼레는 동굴 입구에 서서 폭풍에 큰 나뭇가지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번쩍 하고 번개가 어딘가에 떨어지더니, 바로 이어 하늘을 두 쪽 낼 것 같은 천둥소리가 천지를 찢었다. 높은 산에서 만나는 천둥과 번개는 지상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세라비는 무서워 떨고 있는 플로르 왕자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꼭 안아 주었다.


아침이 되자 폭풍이 그치며 거짓말처럼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첼레는 즉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겼다. 어제 세라비들이 걸어왔던 길은 이제 급한 물살이 흐르는 계곡이 되어 있었다. 비로 질퍽해진 땅바닥에 발이 푹푹 빠지며 그들은 다시 걸었다. 어제도 하루 종일 걸었기 때문에 첼레만 빼고 모두 시작부터 발걸음이 무거웠다. 브뤼메 산맥에서 스승님과 수련을 했다는 레이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간간이 비가 다시 쏟아져 그들은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젖은 옷은 그들의 발걸음을 더욱더 무겁게 만들었다. 오후가 되자 플로르 왕자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레이는 지고 있던 짐을 레이첵에게 지우고 플로르 왕자를 업었다. 일행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세라비는 두 번째 날 묵는 동굴 안에서 첼레에게 브뤼메 산맥을 넘는 길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거냐, 아니면 우리가 템푸스 아르카에 가기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거냐,라고 물었다.


“둘 다입니다.” 첼레가 대답했다. “템푸스 아르카에 가는 중이 아니었다면 당신들은 칼베르까지 이보다 조금 더 수월한 길을 삼 주는 걸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템푸스 아르카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조금 더 힘든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내일까지입니다. 모레면 템푸스 아르카에 도착하니까요.”


레이는 그 말이 맞다고 인정했다. 레이는 라마야나 스승님과 함께 수련을 하며 이카리아에서 칼베르로, 칼베르에서 이카리아로 넘어 다닌 적이 있었던 것이다.


“템푸스 아르카를 통해서 가는 게 더 빠르다면, 왜 스승님은 저를 거기 데리고 가지 않고 그냥 산만 넘었는지 모르겠네요.” 레이는 스승에게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첼레는 대마법사쯤 되시는 분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들이 생각하는 때가 오기 전에는 알 수 없다며 레이를 다독였다.


“대마법사 라마야나 님이라면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첼레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제가 템푸스 아르카로 들어가기 오래전에 떠나셔서 직접 뵙진 못했지만, 아마 그분이 지내시던 집이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다음날 아침은 날이 개어 화창했다. 일행은 전날 내린 비로 아직 촉촉이 젖어 있는 풀밭을 지나, 폭우로 무너진 골짜기를 끼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벼랑 옆길을 조심해서 통과했다.


플로르 왕자가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따라오는 것을 보고 세라비는 감탄하고 또한 기특하게 여겼다. 전날 레이의 등에 업혀 오면서 플로르 왕자는 더 이상 자신이 일행의 짐이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데려가 달라고 애걸복걸해서 겨우 따라왔는데, 그런 자신 때문에 일정이 늦춰지거나 그로 인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면, 왕자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


고귀한 왕자의 옷 대신 세라비가 포르텔 몽테의 상점에서 대충 눈어림으로 사다 입힌 수수한 오트밀색의 상의와 바지를 입은 이카리아의 왕위 계승자는 왕궁 밖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쓸모가 없는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인적 없는 숲길을 걸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동굴 안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입구 밖에는 번개 속에 나무가 휘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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