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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검술사 라그랑쥬

검은 곧 너의 일부이니라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는 백발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그는 늙고 여위었으나 등은 브뤼메의 소나무처럼 곧았고 눈은 매처럼 예리했으며 몸도 재빨랐다. 그러나 너무 잽싸게 행동하면 고수로서의 위엄이 손상되므로, 그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 다니다가 훈련을 게을리하는 제자가 보이면 재빠른 손길로 등짝을 매섭게 두들겨 주곤 했다.


라그랑쥬는 돌려보내 달라고 아우성치며 끌려온 새로운 제자를 바라보았다. 완전 초보인 제자를 받아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템푸스 아르카에 오는 검사들은 적어도 인간 세상에서 실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후에 여러 가지 루트를 거쳐 라그랑쥬에게 찾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은 라그랑쥬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원하다가, 거절당하면 울고불고하며 갑자기 검술장 마당을 쓸거나 물을 길어오거나 해서 라그랑쥬를 귀찮게 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잡혀(?) 온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비장하게 외치기는커녕, 검을 옆에다 내팽개치고 템푸스 아르카의 젊은 사제들(네 명의 남녀)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백발의 노장은 검을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것은 고대의 기술로 만들어져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도 닳지도 않는 검이었다. 어떻게 해서 저런 무례해 보이는 젊은이가 이런 검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고대의 검처럼 오랫동안 존재해 온 물건들은 주인을 스스로 고르는 법이었다. 라그랑쥬는 검의 안목을 믿고 이 젊은이를 가르쳐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검은 자네 건가?” 노장은 젊은이에게 물었다.


세라비는 난동을 부리다 말고 “네? 뭐라고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뭔가 단단한 것이 세라비의 얼굴을 강타했다.


세라비는 너무 아파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눈앞에 번개가 치고 별 같은 것이 돌아다니며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딱딱한 순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코피를 흘리며 세라비가 외쳤다.


“쯔쯧… 얼굴로 날아오는 순무도 못 잡고 그냥 맞고 마는 저 몸놀림으로 어찌 검을 든 적을 상대할꼬…” 노장은 혀를 찼다. 세라비는 너무 아프고 분하고 기가 막혀서 부들부들 떨었다.


“아픈가? 아프면 자네도 나한테 뭔가 하나 던져보게나.” 라그랑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세라비는 태어나서 가장 날렵한 동작으로 아까 그 순무를 노인의 재수 없는 콧잔등을 향해 던졌다. 순무가 공중에 떠오르기도 전에 백발의 검술사는 백색의 광채가 현란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샥샥샥샥! 하고 매섭게 공기를 베어 가르는 소리가 순무와 함께 흩어졌다.


“허…!” 세라비는 감탄의 신음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순무 조각들을 주워들었다. 순무 조각들은 12 변의 길이가 모두 똑같은 주사위 모양으로 잘려 있었다.


“어르신 사람 맞아요? 어떻게 이렇게 하지?” 순무 조각을 든 세라비가 외쳤다.


“내가 보기엔 둔해 빠진 자네야말로 사람이 아닐세. 오늘부터 내 밑에서 검술을 배워보겠나, 아니면 템푸스 아르카를 나가겠나?’


“안 배우면… 여기 못 있나요?”


라그랑쥬는 코웃음 쳤다. “그럼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용무 없으면 당장 내보내는 것이 템푸스 아르카의 법이라네.”


세라비는 망설이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노인의 흰 수염에 덮인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해서, 세라비는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에게 검술지도를 받게 되었다.




고원의 새벽은 시리도록 추웠다. 밤새 내린 서리로 장작광은 입구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세라비는 입김으로 손가락을 불며 검으로 꽁꽁 얼어붙은 장작을 내리쳐 쪼개고 있었다.


“검은 곧 너의 일부이니라.”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무릇 검을 내 몸처럼 다루기 위해서는 검으로 못 하는 것이 없어야 하느니라. 검 한 자루만 쥐어주면 사막에서도, 바닷속에서도, 화산 속에서도 살아남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검사라 불릴 수 없나니.”


라그랑쥬는 이렇게 말하며 세라비에게 검으로 과일 깎기, 요리재료 손질, 헝겊 마름질, 종이 자르기, 장작 패기 같은 생활 훈련부터 시켰다.


그런 까닭에, 세라비는 이 추운 새벽에 얼어붙은 장작광에서 검으로 장작을 패고 있는 것이었다.


템푸스 아르카의 계절과 기후는 템푸스 아르카의 시간과 공간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에 따라 바뀌었다. 다행스럽게도 신의 뜻은 대체로 상춘(常春) 기후였다. 그러나 위대한 검술사 스승께서는 “검사란 몸이 편안해서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니라.”라며 검술 수련관 안쪽은 자연 그대로 유지시켰다. 템푸스 아르카의 날씨가 아무리 맑고 따뜻해도 라그랑쥬 수련관 문만 열고 들어오면 템푸스 아르카 바깥 날씨 그대로였다.


추위로 갈라진 손으로 아무리 검을 내리쳐도 딱딱하게 얼어붙은 장작은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세라비는 장작광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로 지은 싸늘한 생활관의 딱딱한 침대에서 잔 탓에 허리부터 목뼈까지 뻐근했다.


다음 주에는 스승을 따라 산속에서 살아남는 훈련을 하러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생활관에서 만난 라그랑쥬의 제자들 말에 따르면 이 훈련 중에 죽은 제자들의 혼령이 밤마다 템푸스 아르카 성벽 주변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라그랑쥬는 세라비의 담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한밤중에 성벽도 돌게 했지만, 아직 유령을 본 일은 없었다.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는 검술뿐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매우 뛰어났다. 그는 템푸스 아르카로 들어온 이후로는 거의 고수의 경지에 이르기 직전인 상급 제자들만을 받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검 손잡이로 마늘도 빻을 줄 모르는 생 초보 제자도 단 몇 주 만에 훌륭한 도주사(逃走師)로 키워낼 정도로 끈질긴 스승이었다. 그는 세라비가 지독한 훈련을 못 견디고 수련관 담을 넘거나 헛간 지붕을 오르거나 장작 싣는 수레에 몰래 숨거나 생활관 창문을 깨고 달아날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서 도로 잡아오는 끈기의 소유자였다. 그리고는 제자의 머릿속이 잡념으로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한 번 달아날 때마다 훈련 강도를 2배로 높였다. 새로운 제자는 검술은 비록 엉망진창일지언정 끈기만큼은 스승에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훈련의 강도는 금세 중급 수련생만큼 높아졌다.


이카레이유의 삼촌 집에서 살 때 도망치기 위해 안 해 본 짓이 없는 세라비였으나,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검술사의 손에 번번이 잡혀 들어와 훈련만 더 혹독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는 정말 좋은 기회다 싶지 않으면 도주를 시도하지 않았다.


세라비의 추위로 부르튼 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훌륭한 검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대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역시 저 검이 문제였다. 저 검을 산 순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괴물을 잡아달라지를 않나, 검술 훈련을 받으라지를 않나. 험한 산맥을 지나 템푸스 아르카까지 왔더니 딱 하루 편한 곳에서 쉬고 바로 여기 끌려와서 무슨 강제 노역이라도 하듯이 서리가 내린 새벽부터 장작광에서 검으로 나무나 패고 있다니… 세라비는 다시 한번 그 잡화점을 발견하는 날이 오면 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 주인장 노인네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끼이익, 하고 장작광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장작광으로 들어와 세라비 곁으로 다가왔다. 라그랑쥬 스승은 아니었다. 그 인간은 세라비가 나무를 찍다가 자기 다리를 찍었대도 꿈쩍도 안 할 인간이었다.


“아니! 라그랑쥬 님도 너무 하시네요.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훈련을 시키시다니…”


세라비는 고개를 들어보니 레이가 세라비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레이는 세라비의 손에 약 같은 것을 발라 주었다. 감각이 없던 손이 점점 풀리며 약 바른 곳이 따끔거리고 아팠다.


“어떻게 들어왔어? 여긴 제자 아니면 못 들어오는데…”


“여기서 만난 다른 마법사가 라그랑쥬 님한테 약초 좀 물어보러 간다고 해서 따라왔어요.”


검술사 라그랑쥬가 약초학도 가르치는 것은 세라비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생활관에서 약초 전공으로 들어온 제자들을 몇 명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라비가 그쪽은 좀 할만하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당장 죽을 것 같은 파리한 얼굴로 병에 든 물약 같은 것(‘해독제’라고 쓰여 있었다)을 급히 들이킨 다음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래서 세라비는 그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세라비는 레이가 말 꺼낸 김에, 약초 전공은 주로 뭘 배우는지 물어보았다.


“글쎄요, 저도 대충 들었지만 눈 덮인 산에서 일주일 동안 약초만 캐 먹고 살아남기 같은 좀 어려운 훈련도 있고, 독초 덫으로 산짐승 잡기라던가 독초랑 약초 섞어놓고 약초만 가려먹기 같은 좀 재밌는 것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세라비 님 지금 하시는 거에 비하면 그냥저냥 할만할 거예요.” 레이는 이렇게 대답하고 세라비의 손에 약을 마저 발라주었다. 좀 더 편하면 그쪽으로 옮겨달라고 할 생각이었던 세라비는 그냥 몸으로 때우는 검술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라그랑쥬 님의 검술 제자들은 부상당할 경우를 대비해서 약초학 개론도 배운대요. 검술 배우다 그쪽 배우시면 좀 숨 돌리실 수 있을 거예요.”


‘검술 훈련을 무사히 다 마쳐도 막판에 약초학 배우다 죽겠군…’하고 세라비는 절망에 빠져 생각했다.


또 오겠다고 약속하고 장작광을 나서는 레이를 바라보던 세라비는 그가 예전에 못 보던 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세라비는 예전에 레이가 지팡이가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레이는 ‘지팡이는 상급부터 가질 수 있고 아니면 스승한테 물려받기도 한다’고 가르쳐 주었었다.


지금 레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분명히 마법사의 지팡이였다. 그것은 묵직해 보이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몸체 전체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부 꼭대기에는 청백색의 주먹만 한 둥근 돌이 박혀 있었는데, 돌을 둘러싸고 여러 겹의 은빛의 소용돌이 같은 것이 빠른 속도로 맴돌고 있었다.


세라비는 몸의 아픔도 잊고 멍하니 지팡이와 소용돌이들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들은 나선으로 회오리치기도 하고 돌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하고 공중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이건 뭐야? 너… 지팡이 생겼어?”


“네,” 레이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라마야나 스승님의 지팡이를 찾았어요.”


“스승님 집 찾고 싶다더니, 찾았구나?”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라비가 지팡이를 자세히 구경하게 해 주었다.


“나중에 스승님 집도 보여 드릴게요.”하고 레이는 약속하고 장작광을 떠났다. 세라비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장작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개기면 디질것 같은 눈빛의 마스터 라그랑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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