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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마법사 라마야나

레이는 대마법사의 지팡이를 얻었다!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대마법사 라마야나의 집은 20년 동안이나 사람이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지조차 없이 깨끗했다. 마치 레이가 올 줄 알고 방금 청소를 해 놓은 것 같았다. 아마도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대마법사가 집에 걸어 놓은 마법 때문일 터였다. 깨끗함 유지 마법을 20년 동안, 심지어 시전자의 사후인데도 불구하고 지속되게 해 놓았다는 사실에 레이는 속으로 감탄했다.


레이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구조는 그랑쿠르의 집과 비슷했다. 큰 벽난로가 있는 거실과 작은 벽난로가 각각 붙어있는 침실과 서재, 그리고 거실과 문 없이 입구로만 이어져 있는 식당 겸 부엌으로 쓰는 방이 있었다. 침실에는 레이가 예상한 대로 색깔과 문양이 화려한 마법사의 로브들이 걸려 있는 작은 방이 딸려 있었다. 레이는 화려한 로브들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서재는 침실보다 더 컸고 벽 두 개가 온전히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레이는 그중 몇 권의 책등이 희미하게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글씨였다. 실제로 새긴 것이 아니라 책등에 닿지 않을 정도로 띄워서 마법으로 써 놓은 반짝거리는 은빛 글씨였다. 레이는 위아래로 날카롭게 뻗은 글씨에서 스승의 필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중 한 권에는 「이 책부터 볼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레이는 아직 만나지도 않은 제자를 위해 공부할 순서까지 다 준비해 놓고 간 스승에게 감탄하며 그 책을 집어 들어 펼쳤다.




레이가 그랑쿠르에서 라마야나와 살던 집을 떠나 몽켈리에의 마법 학교로 떠날 때 라마야나는 이미 조금씩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 마법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할 나이였고 칼베르에 남았더라면 제자를 수십 명 두어도 부족하지 않을 대마법사였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카리아로 넘어와 그랑쿠르의 산 중턱에 지은 집에서 레이 하나만 데리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레이는 그가 칼베르에서 템푸스 아르카를 거쳐 이카리아로 넘어오던 중에 발견한, 산사태로 폐허가 된 마을에 혼자 남겨져 있던 어린아이였다. 그는 함몰된 집에서 아이를 구해내고, 아이의 부모를 포함한 촌락 사람들을 잘 묻어준 다음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몇 번 거처를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그랑쿠르에 정착했다.


레이는 활기차고 장난꾸러기였지만 기본적으로 애교가 있어 라마야나를 잘 따랐다. 그리고 마법을 쓰는 스승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어떻게든 스승님처럼 되기 위해 마법도 무예도 열심히 배웠다.


라마야나는 대마법사였으므로 종목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마법에 통달했으나 특히 바람을 잘 다뤘다. 그는 바람이든 구름이든 폭풍이든 자연 그대로 발생하게 두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었지만, 바다 건너 동쪽에서 거대한 폭풍이 다가와 그랑쿠르 인근을 모두 휩쓸어버리게 되었을 때는 직접 나서서 마법으로 바람을 잠재웠다. 괴물의 포효 같은 소리를 내며 해안으로 다가오던 폭풍도 라마야나의 앞에서는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온순해져 약간의 비를 뿌린 다음 소멸해 버렸다.


그래서 레이도 바람을 조금은 다룰 줄 알았다. 오델 몽테에서 괴물을 강한 바람으로 날려버린 것도 스승님 어깨너머로 배운 마법이었다.


라마야나는 레이가 너무 집에서만 키워진 탓에 사회성이 떨어질까 봐서 열다섯 살이 되던 날 레이를 몽켈리에의 마법 학교에 보냈다. 라마야나는 이런 걱정은 사실 쓸데없는 것이었다. 왜냐면 레이는 대부분 라마야나와 함께 집에서만 지냈지만 그렇다고 남들과 못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젖 떼자마자 기숙학교에 보내진 학생보다도 더 잘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라마야나는 레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바람 마법을 하기 바랐을지 모르지만, 레이가 파괴 마법을 선택했다고 알렸을 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가 파괴 마법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그게 더 강하고 멋져 보여서였다. 그러나 바람 마법도 학교 졸업하고 나서 집에 돌아가면 스승한테 또 배울 생각이었다.


레이는 휴가를 얻어 집에 돌아갈 때마다 스승님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 눈에 보이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으려고 했다. 라마야나는 그것을 알고 레이를 아예 집에 못 돌아오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져서 레이가 집에 돌아가 보니 라마야나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왜 이제서야 부르셨어요? 돌아와서 스승님 돌볼 수 있게 해 주셨어야죠!”


“네가 오면 뭘 어쩌게? 집이나 어지럽히지.” 스승은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말하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슬퍼하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제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좀 일으켜 주렴.”


레이는 스승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게 했다. 어린 레이에게 마법과 무예를 가르치던 탄탄하던 스승의 몸은 이제 나뭇가지처럼 비쩍 여위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저한테 그럼 바람 마법은 언제 가르쳐 주실 건데요?” 레이가 투정하듯이 말했다.


“나중에 가르쳐 줄게, 나중에.” 라마야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제자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스승님이 남긴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레이의 눈에 문득 서재 한 구석에 놓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템푸스 아르카로 오던 중 꿈에서 본 스승님의 지팡이였다. 묵직한 기다란 나무 끝에 청백색의 둥근 돌이 박힌, 꿈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레이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지팡이는 마치 처음부터 레이의 것이었던 양 레이의 손에 착 감겨왔다.


청백색 돌은 레이가 지팡이를 쥐는 순간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여러 겹의 은빛 소용돌이들이 돌을 둘러싸고 맴도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책을 덮고 이미 아는 주문을 외워 보았다.


“아이테르 스트레페.”


둥근 돌을 맴돌던 소용돌이 하나가 공중으로 빠져나가 방 안 공기를 가르듯이 힘차게 돌더니 천장을 통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레이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같은 마법이라도 지팡이가 있으니 그 힘이 배로 응축되어 한꺼번에 뿜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레이는 이번에는 약간 더 힘을 주어 말해 보았다.


“아이테르… 레베니!”


다른 소용돌이 하나가 튀어 오르더니 방안을 빠르게 휘저었다. 책상에 펼친 채로 놔둔 책이 강한 바람에 파라락 날렸다. 가늘지만 강한 바람은 방안을 돌고 나서 지팡이로 돌아와 다시 구슬 주변을 맴돌았다.


레이는 싱긋 웃고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은 다음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레이는 지팡이가 생긴 것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대현인을 찾아갔다. 대현인 알드바렌은 마법 회당 안에 있는 응접실에서 대마법사들과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알드바렌은 레이가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대마법사들은 레이와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보고 잠시 조용해졌다.


“저건 라마야나의 지팡이가 아닌가!” 한 대마법사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럼 저 친구는 그의 제자겠군.” 다른 대마법사가 말했다.


“저 저, 지팡이에 장식 좀 보게!”하고 처음에 말한 대마법사가 탄식했다. “대마법사 지팡이가 품위 없게시리 저 요란한 무늬가 대체 뭐요?”


희끗한 긴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 대마법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라마야나 그 자는 마법학교 때도 로브를 꼭 파렌베르크까지 가서 맞춰 입었지. 여학생들도 학교에서 주는 대로 입었는데…!”


“허허 참, 그걸 학교에서 그냥 뒀단 말이오?”


“모르겠소. 학교를 무슨 말로 구워삶았는지 라마야나만 졸업할 때까지 그러고 다녔다니까. 게다가 대체 로브가 몇 벌인지 하루도 같은 옷 입은 꼴을 본 적이 없소.” 라마야나와 마법학교 동창임에 틀림없는 여자 대마법사는 이렇게 말하고 레이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제자는 다행히 그쪽 취향은 안 물려받은 모양이로구나.”


대마법사들은 마치 모임에 빠진 동창생 뒷담하듯 끝없이 라마야나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 자는 바람 마법 쓸 때도 꼭 상승기류 한 번 태워서 사람들이 우오오오 하는 걸 꼭 봐야 성에 차는 인간이었고, 학교 졸업하고 연구실에 있을 때도 괜히 멋있는 마법 연구하다가 교수님 방까지 날려먹었고, 그 와중에 깨끗한 건 어찌나 따지는지 파렌베르크의 왕궁에 들어갔을 때도 청소하는 하인들이 왕의 방보다 라마야나 방 청소하는 게 더 힘들다고 불평했었다는 둥… 레이는 청소에 대해서라면 자신도 어릴 때부터 겪은 게 있어서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는 정말 강한 마법사였지.” 머리를 스칼하븐 식으로 땋아 올린 다른 여자 대마법사가 말했다. “좀 이상한 면은 있었어도 좋은 사람이었는데…”


“너무 빨리 갔소. 아직 한참 정정할 나이인데…”라며 다른 대마법사도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대마법사들은 갑자기 모두 침울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대현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직도 레이가 옆에 서있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좋은 지팡이를 받았구나. 축하한다.”


다른 대마법사들도 저마다 레이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레이는 스승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빛나는 청백색 구체가 달린 마법사의 지팡이가 어두운 서재 책장에 기대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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