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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템푸스 아르카

니들두 공부해야지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가 라그랑쥬에게 끌려가고, 레이가 스승의 집으로 가 버린 사이, 이카리아의 왕자 플로르는 레이첵과 함께 숙소에서 세라비와 레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템푸스 아르카 구경을 하고 싶다는 플로르의 희망에 따라 네 명의 남녀는 플로르와 레이첵을 템푸스 아르카의 명소들(?)인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세 수호신을 각각 모신 신전들과 세 창조신들을 상징하는 ‘검은 기둥 광장’, 자신에게 필요한 책을 알아서 건네주는 떠다니는 책장이 있는 ‘보이지 않는 도서관’, 이카리아 방면의 전망대와 칼베르 방면의 전망대에 차례로 데려다주었다.


“세르비카 양과 레이 님은 언제 돌아오실까요?” 플로르 왕자가 레이첵에게 물었다.


“글쎄요. 관광도 다 했으니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누나가 우리 일정 급하다고 했으니까 늦어도 내일쯤엔 돌아오시지 않을까요?” 레이첵이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을 찾아온 네 명의 남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라비 님은 검술사 라그랑쥬 밑에서 속성 3개월 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레이 님은 스승이신 대마법사 라마야나 님의 집을 발견하셔서 당분간 거기서 머무실 것 같습니다.”


“이 집에서 저희하고 안 지내고, 스승님 집에서 지낸다구요?” 플로르 왕자가 놀라서 물었다. “얼마나 거기 있으실 건데요?”


“저희도 모릅니다. 금방 돌아오실 것 같진 않네요.”


“3개월이면 너무 긴 것 아닌가요? 누나 같은 게으른 사람이 검술을 3개월이나 배울 리가 없어요! 누나가 또 뭔가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가둬놓고 저희한테 거짓말하시는 거라면 저희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들 아닙니다!” 레이첵이 격하게 외쳤다.


네 명의 남녀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템푸스 아르카입니다. 저희도 거짓말하면 벼락 맞아요. 세라비 님도 한 달쯤 후에는 아마 휴가를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실 수 있도록 두 분께 알맞은 배움의 과정을 준비했습니다.”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는 세라비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대체 어떤 것이 준비되었을지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Clavine.png 푸른 물결 무늬의 자수가 놓인 로브를 입고 겁나 두꺼운 책을 펴들고 있는 클라빈 선생님

다음날,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가 묵고 있는 집에 네 명의 남녀 대신 중년의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플로르의 어머니 플로렌틴 왕비와 비슷한 연배로, 소매가 길고 헐렁하며 허리를 묶는 하늘색 로브를 입고 머리는 단정히 올려 묶고 있었다. 소매 끝과 로브 자락에는 물결 같은 은빛 자수가 흐르고 있었다.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세 수호신 중 하나인 강과 물의 여신 플레베르 신전 소속의 사제 복장이었다.


사제는 플로르 왕자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플로르 드 클레르몽 전하?”


“네… 그렇습니다.” 플로르 왕자가 대답했다.


“저는 클라빈이라고 합니다. 전하를 가르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제가 톤이 높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쳐요?” 플로르 왕자는 얼떨떨해져서 되물었다. 이카레이유를 떠난 뒤로 당분간 공부를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이제 밀린 공부 따라가야죠!” 이카리아 교과서보다 두 배나 두꺼운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클라빈은 말했다.


“자, 역사부터 볼까요? 학교에서 진도 어디까지 나갔었나요?”


이렇게 해서, 플로르 왕자도 템푸스 아르카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플로르 왕자의 수업은 주로 집에서 했지만 클라빈이 가끔 ‘보이지 않는 도서관’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거기에서는 레이첵의 배움의 과정이 진행 중이었다. 레이첵은 도서관에서 떠다니는 책장이 건네주는 책을 무조건 그날 중으로 필사를 완료해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플로르 왕자가 클라빈과 함께 수업하러 왔다가 집에 같이 돌아가자고 해도 레이첵은 같이 가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레이첵은 글씨 쓰는 것을 워낙 좋아했고 책장이 건네주는 책들 중에는 항상 따분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레이첵은 이 배움의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플로르 왕자 역시, 클라빈 선생님이 까다롭긴 해도 훌륭한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누가 뭐라 해도, 템푸스 아르카까지 노숙하며 산을 타는 것보다는 공부가 더 쉬웠다. 게다가, 클라빈이 칼베르 사람이며 젊을 때 귀족 자녀들이 다니는 왕립 학교에서 게로스 왕자를 가르친 적도 있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클라빈이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날조차 와달라고 졸라서 공부를 했다. 게로스 님이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너무 자주 물어보는 것만 빼고는 플로르는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

공부 안하고 졸면 책장님이 날아오셔서 책을 정수리에 내다 꽂을 것 같은 무서운 도서관(책장이 날아다님)


템푸스 아르카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되던 날, 세라비가 라그랑쥬에게 가까스로 하루 휴가를 얻어 숙소로 찾아왔다. 라마야나의 집에서 먹고 자며 스승님이 남겨놓은 책으로 마법 공부를 하던 레이도 세라비가 온다는 말에 잠시 책을 덮고 찾아와서 네 사람은 한 달 만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오랜만에 세라비를 다시 만난 두 레이와 플로르 왕자는 세라비가 매우 평온하고 심지어 점잖기까지 한 태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네 명의 남녀가 세라비를 데리고 갈 때 그렇게 놓으라고 아우성을 치며 마치 감옥에 갇히러 가는 사람처럼 끌려가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예상과, 그리고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누나…” 레이첵은 이질감과 불안감 등등등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세르비카 양,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플로르 왕자도 어딘가 낯선 세라비의 분위기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죠.” 세라비는 차분하고 어딘지 여유로운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는 이제 라그랑쥬 님의 제자니까요.”


“방금… 뭐라고요?” 레이첵은 마치 세라비의 모습으로 둔갑한 괴물을 바라보듯 세라비를 응시했다. “누나… 정말 누나 맞아요?”


“사람을 볼 때에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하렴.” 세라비는 엄숙하게 사촌에게 이른 다음, 창가로 가서 뒷짐을 지고 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것 같다고 세라비가 생각하는) 시선으로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레이는 아까부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세라비가 뒷짐을 지고 찌푸린 눈빛으로 창밖에 있는 담벼락을 쏘아보는 것을 보고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세라비는 지금 스승님(라그랑쥬)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Lagrange Training.PNG 훈련용 목인과 무기들이 배열된 장엄한 라그랑쥬의 훈련장

레이가 장작광에서 얼어붙은 장작을 쪼개는 세라비를 찾아오고 나서 며칠 후, 세라비는 상급 선배와 라그랑쥬의 대련을 보러 중앙 대전장으로 갔다. 그동안에는 선배들끼리 대련하는 것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세라비는 첫 두 주일 동안은 마늘 빻기나 종이 정확히 똑같은 크기로 자르기 같은 생활훈련을 하다가 3주째부터는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아침에 장작을 다 해 놓고 나면 훈련장에 가서 바람나무로 만든 훈련더미에 나무로 만든 훈련검을 가지고 정확한 각도로 여섯 방향에서 오백 번씩 내리치는 훈련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내리찍기만 하다가 너 그러다 손목 부러진다고 선배들이 주의를 준 다음부터는 선배들한테 배워 가며 연습을 했다.


그러나 라그랑쥬는 세라비가 훈련하는 것을 보러 오지 않았다. 세라비의 훈련은 주로 상급 선배들이 담당했다. 상급 선배들은 세라비에게 아무 때나 번쩍거리며 빛나는 고대의 검의 광도를 조절하는 법을 알려 주고, 검을 드는 자세와 공격을 피하는 법을 가르쳤다.


라그랑쥬는 어쩌다 훈련장에 와서 중급이나 상급 제자들 훈련을 봐주고 제자들끼리 대련하는 것을 보며 몇 가지 지적을 한 다음 세라비가 훈련하는 건 쳐다도 안 보고 나가 버렸다. 그래서 세라비는, 물론 여러 번 도주를 시도했다가 라그랑쥬한테 잡혀 돌아온 것 때문에 꼴 보기 싫기도 했지만, 검술 가르쳐 준다고 템푸스 아르카에 붙잡아 놓고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는 스승에게 불만이 쌓여 있었다.


라그랑쥬와 대련하는 선배는 스칼하븐의 동쪽 끝에 있는 큰 섬에서 라그랑쥬 이름 하나만 듣고 일 년이나 걸려 템푸스 아르카에 찾아온 프레이야라는 이름의 젊은이로, 템푸스 아르카에 오기 전에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 대전장에는 이미 라그랑쥬의 검술 제자들은 물론이고 오늘은 그나마 얼굴빛이 사람 같아 보이는 약초학 제자들까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라비도 어찌어찌 구석에 공간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큰 키에 긴 연한 색 머리를 높이 땋아 올린 프레이야에 이어 라그랑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장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프레이야는 두 손으로 검을 아래를 향해 잡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라그랑쥬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프레이야가 먼저 공격을 가했다. 발이 땅을 디디는지 스치는지도 모를 정도의 빠른 속도로 라그랑쥬와 단숨에 간격을 좁히며 파고들었다. 세라비는 이전에도 프레이야와 다른 선배들의 대련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키가 큰 편인 세라비보다도 더 큰 프레이야는 키가 작고 몸이 다람쥐처럼 날랜 선배들에게 날렵함으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세라비는 ‘큰 키나 긴 팔다리의 장점은 담을 넘을 때뿐’이라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그때 버렸다.


그러나 라그랑쥬는 프레이야를 피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손목을 살짝 꺾거나 칼끝을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프레이야의 모든 공격을 흘려보냈다. 프레이야가 퍼붓는 공격은 모두 허공을 벤 채 사라졌다. 라그랑쥬는 두 걸음도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프레이야는 벌써 숨이 차 보였다.


프레이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찰나의 순간, 라그랑쥬가 검을 움직였다.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 프레이야는 이미 자신의 목에 닿은 검날을 느꼈다.


프레이야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라비는 대체 뭐가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홀린 듯이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날 저녁, 세라비는 템푸스 아르카에 온 지 처음으로 선배들이 나와서 연습하라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발로 훈련장에 나가 연습용 검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얼어붙은 장작광에 갔을 때에는, 장작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듯이(물론 움직임은 없었다) 지그시 쏘아보다가 검을 내리쳤다.


라그랑쥬가 세라비의 이런 변화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장작광에서 세라비가 장작과 눈싸움하는 광경을 보고 기가 차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라그랑쥬는 세라비가 훈련더미 오백 번씩 여섯 번 내리치기나 돌 던져 표적 맞추기 등의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러 오곤 했다. 그리고는 세라비가 제대로 치지도 못하면서 괜히 엄숙하게 훈련더미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으면 눈 깜짝할 새 다가와서 세라비의 등짝을 갈기며 “멋있는 척하면 더 꼴사납게 죽는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그리고 스승과 둘이 ‘눈 덮인 산에서 검 한 자루 갖고 살아남기’ 훈련을 다녀온 이후로는, 세라비는 ‘망할 놈의 영감탱이’라고 부르던 라그랑쥬 스승님을 진짜로 멋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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