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거 가져가서 그 다음에 뭐 해요?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레이는 자신이 어릴 때 스승님을 따라 하느라 온갖 이상한 폼을 잡았던 것을 떠올리며 세라비가 뒷짐을 지고 담벼락을 지그시 쏘아보며 담벼락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읽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레이첵이 이 사람은 세라비 누나가 아니에요! 하며 세라비를 집 밖으로 내쫓으려 했고, 세라비가 사촌의 등짝을 후려갈김으로써 세라비의 짧은 라그랑쥬 놀이는 끝나고 말았다.
세라비와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는 레이를 따라 대마법사 라마야나의 집이자 레이의 새로운 집을 보러 갔다. 플로르 왕자와 레이첵은 템푸스 아르카의 두 전망대보다도 이 집의 전망이 더 좋다고 칭찬했다.
“스승님은 집을 고를 때 전망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거든요.” 레이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번 옮겨 다녔지만 전망은 하나같이 다 좋았죠.”
레이는 현관문의 문고리에 달린 묵직한 쇠장식에 손을 대고 문을 열기 시작했다. “XXXX년 칼베르 어린이 마법경시대회 최연소 대상, XXXX년 파렌베르크 시장 배 청소년 마법대회 자연계열 특별상, XXXX년 칼베르 국제 마법대회 청소년부문 최우수상…”
“뭐지…?” 세라비는 레이첵에게 속삭였다. “왜 문에 대고 저래?”
약 5분가량 이어진 주문이 끝나자 문이 사라락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렸다. 레이는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레이, 방금 한 게 뭐야?”
“‘보안 마법’이에요. 스승님은 보안에 철저하셔서 주문을 정확히 다 외우지 않으면 집 문이 절대로 열리지 않게 해 놓으셨답니다.”
“정말… 아무나 들어오지는 못하겠구나.” 세라비가 중얼거렸다. 누가 들어도 그것은 대마법사 라마야나의 과거 수상 경력일 터였다.
“대회 이름이나 상 이름을 하나라도 잘못 말하면 횟수가 한 번씩 늘어난답니다.” 레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전 10번이나 연속으로 외운 적도 있어요.”
세라비는 대체 어느 부분이 자랑스러운지 알 수 없어서 혼란에 빠졌다.
세라비는 집 안을 둘러보면서 깨끗함에 감탄했다가, 침실 안쪽에 연결된 작은 방에 걸린 온갖 무늬와 색깔의 로브들에 경악했다. 플로르 왕자도 “와! 진짜 예쁘네요. 그런데 레이 님은 이거 왜 안 입으세요?”하고 물었다.
“전 그냥도 너무 눈에 띄어서 저런 옷은 좀 부담스러워요.” 레이가 대답했다. 플로르 왕자가 “아 그렇네요.”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그동안 같이 다니면서 다들 레이의 이런 말에 익숙해진 듯했다.
플로르 왕자가 세라비와 레이에게 클라빈 선생님을 보여 주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들은 라마야나의 집을 나와 템푸스 아르카의 플레베르 여신의 신전으로 갔다. 플레베르 신전은 신전들이 모여 있는 구역에서 세 창조신의 신전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신전 안에는 네 방향으로 물이 떨어지는 큰 폭포가 있었다. 클라빈은 다른 사제들과 함께 폭포 밑에 서 있다가 플로르 왕자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왕자님, 오늘은 쉬는 날 아니었나요?”
플로르 왕자가 달려가서 매달리는 걸 보니 그동안 클라빈과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뭐 하고 계셨어요?” 플로르 왕자가 클라빈에게 물었다.
“폭포에 글귀를 쓰고 있어요.” 클라빈이 대답했다. 네 개의 폭포 밑에 신전 사람들이 서서 물줄기를 향해 손으로 크게 글씨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다.
“이 폭포에서 나온 물이 칼베르와 이카리아의 네 개의 강으로 이어진답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폭포에 여신의 말씀을 새겨 넣고 있어요.”
플로르는 클라빈에게 세라비와 레이를 소개했다. “이쪽은 저와 함께 칼베르로 여행 중인 세라비 세르비카 양이고, 그 옆에 계신 분은 레이 님이에요. 레이 님은 대마법사 라마야나의 제자랍니다.”
“지팡이를 보니 알겠네요.” 클라빈이 웃으며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분 취향은 변함없네요.”
“스승님을 아시나요?” 레이가 물었다.
“여기서는 뵌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로멜리 쉬르쿠젤의 플레베르 신전에서 일할 때 가끔 오신 적 있어요. 그때는 라마야나님이 슐로스 루와얄에 계실 때였거든요.”
클라빈은 레이가 스승 얘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라마야나가 신전에 찾아와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쿠젤 강 위에 용오름을 솟구치게 해서 사람들을 기절초풍하게 하고 의기양양해서 돌아간 얘기를 해 주었다.
세라비는 폭포수가 네 갈래의 물줄기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줄기 옆에는 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플레베르 여신상이 조각된 기둥이 서 있었다. 세라비는 라를르에 있을 때 강에 이는 물보라 속에서 기둥에 조각된 것과 같은 여신의 옷자락이나 여신의 미소를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클라빈이 세라비 곁으로 다가와 상냥하게 웃었다. 세라비가 자기 집이 카론 강 옆에 있다고 얘기하자, 클라빈은 매우 기뻐했다. “강 옆에 산다는 것은 플레베르 여신과 항상 가까이 있다는 뜻이에요.”라고 클라빈은 말했다. “여신은 자애롭고 인간을 좋아하신답니다.”
“신이라면 원래 다들 자애롭고 인간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요?” 레이첵이 물었다.
“세 수호신들은 적어도 그렇답니다.” 클라빈이 대답했다. “하지만 창조신들은 좀 달라요. 창조신 신전에도 가 보셨나요? 안 가 보셨으면 오늘 같이 가볼까요?”
세라비는 플레베르 신전을 떠나면서 아직도 폭포에 글씨를 새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뭐라고 쓰는 건가요?”
“여신의 말씀이에요. ‘강은 물길을 막아도 흐른다. 강은 모든 것을 품는다. 강은 모든 것을 씻어낸다.’” 클라빈은 이렇게 대답하고, 플레베르 신전에서 템푸스 아르카 꼭대기로 향하는 길로 세라비들을 안내했다.
창조신들의 신전은 템푸스 아르카의 중심이자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바람도 도시의 다른 곳보다 더 거세게 불었다.
신전은 넓고 크고 장엄하고 으리으리했다. 검은 기둥들이 거대한 신전의 앞부분을 받치고 있었고 기둥들 사이에는 사람 키의 세 배쯤 되는 커다란 창조신의 석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태양과 하늘의 신 솔레르, 산의 신 몬테르, 바다의 신 라메르였다.
그들은 남신도 여신도 아니었다. 그들은 성별로 구분되는 신이 아니었다. 이곳의 사제들 역시 남녀 구별 없는 검은 옷을 입고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가린 채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 다녔다.
“어휴… 삭막하기도 해라!” 클라빈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뭐 여기가 일단 템푸스 아르카 신전들 중에서는 제일 커요!”
“엄청나네요! 진짜 크다… 이런 걸 어떻게 지었을까요?” 플로르가 석상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창조신들의 석상은 플레베르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차가웠다. 표정은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데 웃고 있어서 더 무서운 미소였다.
세 석상들의 발치에는 고대 알티스 문자로 똑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세라비는 레이에게 무슨 뜻인지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심판한다.’라고 쓰여 있어요.” 레이가 대답했다.
“오… 무섭다. 심판한대…” 이제까지 살면서 저지른 여러 가지 못된 짓들을 떠올리며 세라비는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누나 진짜 큰일 났다…” 레이첵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라비는 사촌을 평소대로 한대 치려다가, 왠지 여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손을 내렸다.
플로르 왕자는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품속에 넣고 다니던 뤼넬을 꺼내 보았다. 포르트메르에서 스칼하븐 병사들에게 쫓기던 그날 이후로 뤼넬은 항상 왕자가 지니고 다녔지만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플로르가 상자를 꺼내 열자 뤼넬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와… 보셨어요? 빛이 나는데요?”
“역시 창조신 신전이라 땅의 기운이 강한가 보다!”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꺼졌다. 뤼넬은 다시 카마의 무늬를 한 둥글고 납작한 돌로 돌아갔다.
클라빈이 다가와서 물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이건…” 플로르는 자신들의 비밀 임무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 망설이며 세라비를 쳐다보았다.
“제 펜던트입니다.” 세라비가 나섰다. “평생 펜던트만 만든 펜던트 외길 장인에게 의뢰해서 특별히 만든…”
“이건 뤼넬입니다.” 레이첵이 갑자기 끼어들며 말하는 바람에 세라비는 화들짝 놀랐다.
“아시죠? 솔렌이랑 뤼넬 전설이요. 이게 그 뤼넬입니다.”
“너 미쳤어? 이거 국가 기밀이잖아!” 세라비는 사촌에게 속삭였다.
“누나, 그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그러는데 여기서 거짓말하면 벼락 맞는대요.” 레이첵도 세라비에게 속삭였다.
“나 방금 거짓말했는데 벼락 안 맞았잖아!” 세라비는 이렇게 말했지만 혹시나 싶어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클라빈은 플로르가 손에 들고 있는 뤼넬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진짜 뤼넬이구나! 이걸 갖고 뭘 하시는 건데요?”
“저희는…” 하늘을 다시 흘끗 쳐다본 다음 세라비는 클라빈에게 자신들이 칼베르로 가는 목적을 말해 주었다.
“역시 이카리아의 왕자님이라 신들이 왕실에 준 선물을 직접 갖고 가시는 거군요.” 클라빈은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플로르 왕자는 몰래 사신단을 따라왔다는 말은 안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칼베르의 솔렌은 칼베르의 창조신 신전에 보관되어 있을 거예요.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전쟁을 피해서 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 빨리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왕자님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날 저녁, 오랜만에 다 같이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플로르 왕자가 갑자기 물었다.
“우리, 뤼넬 가지고 칼베르 가서 뭐 하면 되는 걸까요?”
삼촌이 그냥 물건만 갖다 주면 된다고 해서 사신의 길을 떠난 세라비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게로스 폐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계시는 거겠죠?”하고 게로스 폐하라는 단어에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플로르 왕자가 다시 말했다.
“삼촌은 갖다 주면 된다고 하셨고, 뤼넬을 건네준 사제도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세라비는 마르셀 왕을 알현하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레이는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프티 몽텔리에서 세라비를 만나 여기까지 온 이래 처음으로 머리를 벽에 부딪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르비카 경이 ‘일단 칼베르 땅에 발을 디디는 것만 생각해라’라고만 했기 때문에 레이도 그동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칼베르에 가면 이걸 갖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다들 알고 있을까? 마르셀 왕은 게로스가 뤼넬을 받기만 하면 알아서 신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할 거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세르비카 경도 너무 급하니 일단 가지고 가보라고 세라비와 레이의 등을 떠밀어 보냈지만, 막상 게로스도 이걸 갖고 뭘 해야 할지 모르면 어떻게 할까?
세라비는 뤼넬을 갖다주고 빨리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고 레이첵은 기록할 생각뿐이었으며 플로르 왕자는 칼베르에 가서 게로스 얼굴 볼 생각뿐이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세라비나 레이첵 그리고 플로르 왕자에겐 미안하지만) 자신이 찾아내야만 했다.
‘세라비 님만 따라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따라다니면서 내가 다 챙겨야 되는 거였네.’ 레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다음날, 네 명의 남녀가 와서 세라비를 다시 라그랑쥬에게 데리고 가자(이번에는 순순히 따라갔다), 레이는 플로르 왕자한테 뤼넬을 받아서 마법 회당으로 갔다.
대현인 알드바렌을 만난 레이는 뤼넬을 보여주고 칼베르로 가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대현인은 뤼넬이 든 상자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나 그가 뤼넬에 손을 대지는 않는 것을 레이는 알아차렸다. 전날 클라빈도 신기하다면서 구경은 했지만 뤼넬에 손을 대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2천 년도 더 전에 창조신들이 이카리아와 칼베르의 왕실에 준 선물이다.” 대현인이 말했다. “무서운 물건이지만, 만약 지금 이카리아와 칼베르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이걸 써야 할 때가 맞을 거다.”
“이걸 가져가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솔렌과 함께 ‘사용’ 한다니 어떻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아무도 모른다.” 대현인은 대답하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앉아있는 레이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이런 물건은 굳이 사용법을 몰라도 저절로 알게 된다. 창조신들도 인간들이 사용법 따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었을 거야.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인간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면 왜 이걸 준 걸까요?”
대현인 알드바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레이는 그가 먼 기억을 더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전에 오스틴에서 왔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스칼하븐과 사이가 나빴고 주변국인 티르윈이나 리스코바는 힘으로 찍어 눌렀지. 하지만 이카리아와 칼베르는 국경을 접한 이웃인데도 고대 왕조 이후로는 다툼 없이 사이가 좋았다. 심지어 칼베르가 이카리아를 테라 칼베리아 남쪽으로 몰아낸 이주민들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국경을 접한 두 나라가 사이가 좋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신들은 아마 전쟁 중이던 두 나라에 경고의 의미로 솔렌과 뤼넬을 주었을 거야.”
“언젠가는 우리와 스칼하븐도 신들의 경고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하고 대현인은 말끝을 흐렸다.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뤼넬을 가지고 뭘 하게 될지는 일단 가져가 봐야 아는 거로군요.”
“그렇다.” 대현인은 짧게 대답했다.
레이는 대현인에게 깊이 숙여 인사하고 회당 밖으로 나왔다. 답답함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레이는 대현인이 자기 나라인 오스틴과 스칼하븐에 대해서 마치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은 모든 마법사들 중 가장 강하고 현명한 대현인인데 왜 바깥세상에서 수년째 전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템푸스 아르카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냐’라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현인과 같은 높은 사람에게 그런 당돌한 질문을 할 마법사는 없었다.
저 아무 생각 없는 작자들을 데리고 칼베르까지 가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레이도 그냥 안전한 템푸스 아르카에 머물며 스승의 집에서 마법 공부나 하며 조용히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러기는 다 틀렸다. 세라비를 따라가라고 한 것은 신이었으니, 레이는 가야만 했다.
레이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는, 플로르 왕자에게 뤼넬을 돌려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