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 템푸스 아르카를 떠나다

세라비, 뒤늦게 정신 차리다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캐릭터 소개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레이가 라마야나가 남긴 책을 거의 다 읽고, 지팡이를 맴도는 바람에게 부채질을 시킬 정도로 바람 마법에 익숙해져 갈 무렵, 세라비도 라그랑쥬에게 등짝을 안 맞으며 훈련을 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마침내, 세라비에게도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스승과의 대련의 날이 왔다. 훈련생이 입소 3개월 만에 라그랑쥬와 대련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라그랑쥬의 제자들은 세라비를 매우 부러워했다. 게다가 가끔 수련관을 드나들며 레이가 사람들한테 뭐라고 떠들어댔는지 세라비가 전설의 검사의 후예라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세라비의 훈련을 담당했던 상급 선배들이나 세라비가 도주하다 라그랑쥬한테 잡혀 들어오는 꼴을 본 다른 훈련생들은 소문을 듣고 펄펄 뛰는 세라비를 도리어 위로했다.


세라비와 라그랑쥬의 대련은 지난번 프레이야 때와는 달리 수련관의 작은 개인 훈련장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공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다는 의미였지만, 세라비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프레이야 때처럼 모든 제자들이 다 지켜보는 곳에서 대련을 하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떨리는데 더 긴장되기만 할 것이었다.


프레이야를 비롯한 상급 선배들 몇 명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라비는 침착하자 침착… 하고 천 번도 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라그랑쥬가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제자들은 모두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세라비도 프레이야가 했던 것처럼 검을 아래를 향해 잡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라비는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3개월 동안 힘들게 훈련을 했으니 프레이야처럼은 못 하더라도 한 번쯤은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세라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 스승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탁.


무언가가 목에 가볍게 닿았다. 라그랑쥬의 목검 끝이 세라비의 목에 와 있었다.


라그랑쥬는 검을 거두며 무심히 말했다.


“끝났다.”


세라비는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세라비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미 라그랑쥬의 검은 세라비의 목을 찍고 있었다. 이건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제자들의 입에서도 감탄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련이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렸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저 예상했던 결과일 뿐.


세라비는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의 방. 이미지 설명은 본문 그대로임.

그날 저녁, 세라비는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의 방 앞에 서서 면담을 청했다.


라그랑쥬의 방은 추웠다. 벽난로가 있긴 했지만 언제 피웠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용감이 없었다. 벽에는 오래된 실전용 검과 목검들이 종류별로 빽빽하게 걸려 있었고, 큰 책상 위에는 뭔가를 기록한 노트들이 정확히 각을 맞추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검이 걸려있지 않은 다른 한쪽 벽은 검술과 약초 관련 책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세라비는 그 안에 ‘고산지대 약초로 만드는 요리책’ 이라던가 ‘나만의 약초 정원 가꾸기’와 같은 책들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약간 당황했다.


문 없이 아치로 연결된 작은 옆방 안에는 똑같은 크기로 잘린 나무토막들이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순무나 여러 가지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와 일정한 크기의 주먹만 한 돌들이 가득 담긴 나무통도 보였다.


“스승님, 왜 이렇게 방이 추운가요?”


“훈련이 부족하면 춥다고 느끼지.” 라그랑쥬가 답했다. 세라비는 더 물어보면 훈련이나 더 하고 오라고 할까 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세라비는 스승에게 자신이 칼베르에 가는 도중에 템푸스 아르카에 들른 것이며, 3개월의 훈련 과정이 거의 끝나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정이 끝나 가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라그랑쥬가 말했다.


“스승님, 3개월이 너무 짧아서 전 제가 뭘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뭔가 배우긴 한 걸까요?”


라그랑쥬는 훈련하기 싫어서 도망만 다니다가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린 듯한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걸음마 떼자마자 검을 잡은 제자들도 너보다 겨우 몇 초 더 버티는 게 고작인데, 넌 겨우 3개월 배우고 오늘 대련에서 좀 실패했다고 뭔가 배우긴 한 거냐고 묻는 거냐?”


세라비는 스승의 뼈아픈 말에 고개를 숙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뭔가를 오랫동안 진득하게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3개월의 검술 훈련이면 세라비 나름으로서는 굉장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기간이 짧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라그랑쥬 같은 대가에게 배웠으니 조금은 성장했을 거라고 기대했던 세라비는 마늘 빻기나 종이 정확히 같은 크기로 자르기 같은 거나 배우고 템푸스 아르카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승님, 제가 할 일 다 마친 다음에 다시 돌아와도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 제가 다시 여길 찾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첼레의 뒤를 따라 겨우 템푸스 아르카에 들어온 것을 떠올리며 세라비가 말했다.


“템푸스 아르카를 한 번 와 본 사람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세라비, 걱정하지 마라. 넌 프레이야 같은 검술 천재는 아닐지라도, 너만의 재능이 있다. 없었다면 나도 제자로 받지 않았을 거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너라.”


세라비는 스승의 따뜻한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제가 가진 저만의 재능은 어떤 것인가요?”


“끈기와 근성.” 스승이 말했다. “너처럼 끈질기게 도망치는 놈은 처음 봤다.”


라그랑쥬는 세라비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세라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그게 없어서 검술 배우다 실패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네가 가진 걸 높이 평가할 줄도 알아야지.”


세라비는 진심으로 스승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려다 문득 생각나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그래도 불은 좀 때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그랑쥬는 미소를 지었다. 세라비는 다시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세라비 일행이 템푸스 아르카를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세라비는 훈련과정을 마치고 라그랑쥬 수련관에서 나왔고, 레이는 라마야나 스승의 집을 다시 걸어 잠그고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가 머무르는 숙소로 돌아왔다.


클라빈이 작별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종이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는 오자마자 플로르 왕자보다 세라비를 먼저 찾았다.


“세라비 양,” 클라빈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왕자님 지금 여기 있는 거, 이카리아에서 알고 있나요?”


세라비는 찔려서 아무 말도 못 했다. 포르트메르 통과 실패 때, 이미 왕자를 찾는 포스터를 보았기 때문에 왕자의 가출은 팔레 에클라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었다. 왕자가 세라비를 따라온 것을 아는 사람은 코토란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삼촌인 세르비카 경이라면 코토란을 회유해서 왕자의 행방을 알아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세라비가 포르텔 몽테에 왕자의 옷가지까지 실어놓은 마차를 두고 세르비카 경한테 찾아가라고 했으므로 설령 코토란이 입을 열지 않더라도 세르비카 경은 왕자가 세라비를 따라간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삼촌은 왕자의 행방을 마르셀 왕에게 알렸을까? 코토란은 플로르 왕자가 칼베르에 가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 말하지 말아 달라고 세르비카 경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촌은 왕자의 행방을 적당히 숨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당히 숨겼다 하더라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만약 왕자의 실종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면, 모두 세라비의 책임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클라빈은 들고 온 종이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왕자님이 없어진 걸 알게 되면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실지는 생각 안 해 보셨나요? 지금이라도 편지를 씁시다. 왕자님 빨리 불러오세요.”


세라비는 플로르 왕자와 함께 클라빈이 들고 온 바람나무로 만든 종이에 편지를 썼다. 바람나무 종이는 템푸스 아르카에서만 제작되는 특수한 종이였으므로, 템푸스 아르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왕실 마법사가 하나라도 있다면 세라비와 왕자의 편지의 진위 여부를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왕자는 인장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지만, 마르셀 왕과 세르비카 경은 그의 서명을 알아볼 것이고, 세라비의 필체 역시 세르비카 경이 알아보리라고 세라비는 믿었다.


클라빈은 첼레를 불러 편지를 건네주었다. 첼레는 아래쪽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편지를 전하러 내려갔다. 원래 첼레가 물건을 사러 갈 때는 포르텔 몽테보다 더 멀리 가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편지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이카레이유까지 가기로 했다. 세라비는 어디를 가야 삼촌을 만날 수 있을지 첼레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클라빈은 꾸러미 하나와 편지 한 장을 세라비에게 주었다.


“파렌베르크로 가는 거라면, 브레스부르를 거쳐서 가세요. 브레스부르의 수도원에 내 친구가 있답니다. 거기서 쿠젤 강을 따라 며칠만 가면 파렌베르크예요.”


세라비는 감사하며 클라빈이 브레스부르의 친구에게 보내는 선물과 편지를 받아 들었다. 클라빈은 그 외에도 브레스부르까지 가는 길에 산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었다. 그리고 플로르 왕자를 안아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세라비와 두 레이, 그리고 플로르 왕자는 템푸스 아르카로 들어왔던 입구의 반대편인 칼베르 쪽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흰 옷을 입은 네 명의 남녀가 성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올 때에는 첼레를 따라왔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지금부터는 오로지 자신들의 감각으로 방향과 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첼레처럼 칼베르 쪽으로 물건을 사러 다니는 사람이 찾아와 칼베르 쪽으로 가는 길과 자기가 묵는 동굴의 위치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렇게 세라비들은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들 사이의 골짜기를 지나고 돌과 이끼뿐인 평평한 고원을 가로질러 칼베르로 향했다. 말라비틀어진 덤불에 가로막히면 고대의 검으로 잘라내어 길을 만들고, 밤이 되면 템푸스 아르카에서 알려준 동굴을 찾아 불을 피웠다. 가을이 시작된 고산지대의 날씨는 낮에도 서늘하고 밤에는 혹독했다.


출발할 때는 모두 눈높이 밑에 있던 산들은 이제 높은 벽처럼 등 뒤로 밀려났다. 이젠 낮에는 꽤 따뜻했고 점점 평지가 늘어나며 걷기 편해졌다. 플로르 왕자는 이제 불도 잘 피우고 나무뿌리 같은 것도 곧잘 구웠다. 세라비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출발했을 때보다 키도 좀 큰 것 같았다. 그러나 템푸스 아르카에서 설령 1달이 아래쪽 세상의 1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상보다 빨리 성장하거나 노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템푸스 아르카에 들어온 사람들이 밖으로 잘 나가려 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모닥불 옆에서 나무토막을 뒤적거리면서 플로르 왕자가 말했다.


“브뤼메 산맥에는 요정 같은 다른 종족들도 많이 산다고 했는데 왜 하나도 안 보이는 걸까요?”


“괴물이라면 하나 확실하게 봤죠. 왕자님은 못 보셨지만.”하고 레이첵이 말했다.


“난 괴물이고 요정이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그냥 빨리 사람을 보고 싶어. 얼마나 더 가야 칼베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올까?” 세라비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늦어도 3일이면 브레스부르에 도착할 거예요.” 레이가 말했다. “그리고 요정이라면, 원하신다면 볼 수 있어요.”


“정말요?” 플로르 왕자가 솔깃해서 물었다. “어디서요?”


“제가 좀 발이 넓잖아요. 알고 지내는 요정 정도야 하나쯤은 있죠.”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의 부러움에 찬 시선을 받으며 레이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어디 사는데? 가까운데 있으면 구경 좀 해보자.” 세라비가 말했다.


“안될 말씀이죠.” 왠지 거만한 태도로 레이가 말했다. “요정은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라 구경거리 따위가 되려고 하지 않아요.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요정이 하나 살고 있으니 가는 길에 한번 들러볼까요? 오랜만에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자고 싶네요.”


다음날 요정이 산다는 곳으로 향하면서 레이는 어쩌다가 요정하고 알고 지내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라마야나 님은 요정족하고 친분이 있으셨는데 요정족 마을에서 깨끗함 유지 마법으로 샘물을 영구 정화해 주셨답니다. 지금 가는 곳은 요정 마을은 아니지만 요정이 살고 있는 집이에요. 예전에 라마야나님이 수련할 때 지내시던 집을 요정 가족이 받아서 살고 있어요.”


세라비는 어느덧 감자밭 한가운데로 난 고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밭이잖아 여긴!”


“네, 여기서는 뭐든지 자급자족하거든요.”


“그럼 신선한 채소도 먹을 수 있겠군요.” 레이첵도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감자밭과 채소밭 너머로 요정이 산다는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돌담에 둘러싸이고 마당에 허브가 자라는 작은 집이었다. 레이는 돌담 안으로 들어섰다.


“욘도로케! 나 왔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집 안쪽 어딘가에서 문이 덜커덩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쏜살같이 뛰어나와 레이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레이! 정말로 돌아왔구나!”


세라비와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는 드디어 나타난 요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요정은 초록빛이 도는 은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허리에 단검을 찬 몸집이 작은 소녀였다. 머리색과 귀만 제외하면 산악 지방에 사는 여느 소녀나 다름없어 보였다.


초록빛 머리와 뾰족한 귀를 가진 요정 소녀가 돌담을 두른 집 앞에 서 있는 모습
keyword
화, 목, 토 연재
이전 25화24. 솔렌과 뤼넬의 사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