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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요정과의 결투 (1)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1!!1!@2!1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마침내 날이 밝아 세라비들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요정은 아침부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세라비나 레이첵한테는 말도 걸지 않고 플로르 왕자는 처음부터 그랬지만 거기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계속 레이만 애절하게 쳐다보며 눈물이 넘쳐흘러 개울이 되도록 울고 있었다.


“돌아올 거지? 반드시 돌아올 거지?” 요정은 흐느끼며 계속 물었다. 이럴 때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이라도 좀 잡아 주면서 “그래, 너를 위해 반드시 돌아올게.”라고 해야 대화가 좀 될 텐데, 이 냉혈한 놈은 바쁘다는 둥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둥 도움 안 되는 대답만 하고 있었다. 요정은 아마도 돌아오겠다는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저러고 있을 텐데, 세라비는 요정이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게 지겨워서 레이가 빈말이라도 해 주기를 바랬으나, 레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욘도로케는 묻다가 지쳐서 부엌의 불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쟤 저러다가 우리 쫓아오면 어떡해?” 세라비가 레이에게 물었다.


“못 쫓아와요. 쟤네 가족들은 이 집이랑 계약으로 묶여 있거든요. 쟤가 집에서 나오려면 최소한 아버지나 오빠들 중 하나가 집에 돌아와야 돼요.”


세라비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안 됐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혼자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생물이고 간에 혼자 오랫동안 지내면 머리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드디어 세라비 일행은 붙들고 늘어지는 요정의 힘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오두막을 둘러싼 돌담 입구에 다다랐다. 세라비의 발이 돌담 밖으로 막 내디뎌지려는 순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욘도로케가 입을 열었다. 레이를 부르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요정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레이가 아닌 세라비였다.


“세라비 양!”


어제까지만 해도 저기요, 이봐요 라고 불렸던 세라비는 깜짝 놀라서 “나 말이에요?”하고 되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말해줘요! 당신 혼자도 아니고 동행자도 둘이나 더 있으니까, 우리 레이는 같이 안 가도 된다고 말해줘요!” 욘도로케는 말을 마치고 고상하고 수준 높은 요정족의 체면도 잊고 땅바닥에 쓰러져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쩌죠, 누나?” 레이첵이 속삭였다.


세라비는 난감했다. 갈 길은 먼데 우는 요정 냅두고 휙 가버릴 수도 없고,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요정의 통곡 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가서 온 골짜기와 밭두렁 위로 메아리쳤다.


그러나 종족을 초월한 애틋한 사랑의 대상인 레이는 요정이 목이 쉬도록 울고 있어도 위로는커녕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세라비는 레이를 쿡 찌르면서 “뭐 해! 네가 어떻게 해봐야 할거 아냐!”하고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레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세라비 님을 모시고 임무를 수행하는 몸이에요. 제 거취는 세라비 님의 결정이죠.”


요정은 귀도 밝아서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그래? 세라비 양이 허락만 해주면 되는 거였어? 세라비 양! 제발 나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서 레이를 데려가지 말아 줘요!”


“아니, 댁이랑 내가 언제 친분이 있었수?” 세라비는 기가 막혀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요정의 분노만 일으킬 말이었으므로 세라비는 곧 후회했다.


생각했던 대로 요정은 금방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솔직히 레이가 같이 안 가도 되는데 나를 농락하기 위해 레이가 꼭 필요한 척하면서 데려가는 거지!”


세라비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댁을, 농락해? 자기 힘으로 레이를 붙잡아 두지 못하니까 이제는 멀쩡한 다른 사람 탓을 해? 정말 둘이 좋아 죽는 사이면 말로 해서 잡던지 기둥에 묶던지 둘이 좀 알아서 해!”


요정은 욕을 먹더니 약간 이성을 찾은 것 같았다. 욘도로케는 통곡하느라고 흐트러진 초록색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기둥에 묶어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드나 보지? (세라비는 너무 억울해서 현기증이 났다) 숭고한 사랑을 무력으로 짓밟는 당신 같은 인간에게 우리 레이를 보낼 수는 없어!”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언제 그렇게 했대?” 세라비는 마주 외쳤으나 요정의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레이첵은 이미 필기도구를 꺼내서 이 아수라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괴물과 싸울 때도 그랬지만 레이첵은 이런 순간조차도 도와줄 생각은 않고 기록에 여념이 없었다.


레이첵이 그러는 것은 투철한 직업정신 때문이라고 치고, 이 소란의 원흉인 레이는 딱 한 마디, “돌아오겠다” 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고 즐거운 여행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을 왜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인지 세라비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왜 그 모든 것의 결정을 다 세라비에게 뒤집어씌우기까지 하는 걸까.



잠시 동안 요정과 세라비 사이에 불꽃 튀는 시선이 오갔다.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는 멀찍이 비켜섰다.


“레이를 지켜달라는 약속을 하게 할 땐 댁이 대장부답게 깨끗이 포기한 줄 알았지.” 세라비가 말했다.


“누가 포기해? 당신의 무식한 손아귀에서 레이를 내 힘으로 되찾고 말겠어!” 욘도로케가 엄숙히 선언하였다.


“맘대로 하시지. 기둥에 묶던가!”


요정의 초록색 머리카락 끝에 불길이 확 붙는 것처럼 보였다. “숭고한 사랑을 모욕하는 더럽고 추악한 소리를 요정족인 내 앞에서 또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욘도로케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자기가 지닌 고대의 검이 척 봐도 세 배는 길어 보였으므로 코웃음 치고 있던 세라비는 요정이 뽑아 든 짜리몽땅하던 단검이 일순간 쭉쭉 펴지면서 라그랑쥬의 장검만 한 길이로 늘어나는 것을 보고 경악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세라비의 고대의 검은 순식간에 보잘것없는 부엌칼처럼 보였다. 세라비는 요정의 눈 속에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쯤 되면 레이가 끼어들어서 뜯어말려야 할 텐데, 세라비가 흘끗 보니 레이는 열심히 필기 중인 레이첵에게 매달려 “언젠가는 저를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어요…”라며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세라비는 요정보다도 저 놈부터 먼저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요정은 무기를 빼 들었고, 세라비가 레이를 살려 놔도 덤빌 거고 죽이면 더더욱 덤빌 것이 뻔하니 다른 선택은 없었다. 스승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며 세라비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빨리 사람, 아니 요정을 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세라비는 고대의 검을 검집에서 뽑으며 중얼거렸다. “스승님의 제자로써 부끄럽지 않게 싸우겠습니다!”

Duel_Scene_Zoomed.png 내일 팀장님이 왜 지각했냐고 물어보시면 결투장면 그리다가 늦게 잤다고 말씀드릴 것이다

공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아직 아침이라 밝은 햇빛이 산골짜기를 내리쬐고 있었으나 세라비와 욘도로케가 검을 뽑아 든 그 순간부터 심상치 않은 검고 짙은 구름이 골짜기 위 상공을 에워쌌다. 마른번개가 구름 아래쪽에서 번쩍거렸다.


“비도 오게 할까요?” 레이가 묻는 바람에 세라비는 이 먹구름이 레이가 불러온 것임을 깨달았다. 어깨에 들어갔던 긴장이 풀리며 분노가 치솟았다.


요정 욘도로케는 이런 심각한 순간에도 불구하고 “어머나 레이, 먹구름을 불러오다니 정말 대단하구나!”하고 칭찬을 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싸움에 대한 긴장은 풀렸다. 세라비는 잠시 어깨 힘을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템푸스 아르카에서 라마야나 책으로 바람 마법 독학을 하더니 이젠 이런 것도 할 줄 알게 되었네, 하고 세라비는 감탄했다.


“마음에 안 들면 가라고 할까요?” 레이가 다시 물었다. 세라비는 잠시 풀린 머리로 생각해 본 결과 먹구름 정도는 있으면 그런대로 멋있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 그냥 둬. 그치만 비는 안돼. 젖으면 몸동작이 둔해지니까.”하고 레이 쪽을 바라보고 말하는 순간 세라비 앞으로 요정의 날렵한 몸이 장검과 함께 날아왔다. 세라비는 순간적인 반사신경으로 검을 들어 막았다. 하마터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할 뻔했다.


“비열한 것!” 세라비가 소리쳤다. “말하고 있는데 덮치다니, 너는 싸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냐!”


“예의?” 욘도로케는 코웃음 쳤다. “열등한 인간 주제에 요정인 내 앞에서 예의를 입에 올리다니, 더욱더 용서할 수 없다!”


“열등하다니, 나는 템푸스 아르카에서 라그랑쥬 님께 검술을 배운 몸이다!” 세라비는 스승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자랑스러움으로 어깨가 펴졌다. 저 정신이 이상한 요정이 위대한 검술사 라그랑쥬의 이름을 알기나 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요정은 미소를 머금은 채 침착하게 자세를 유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라그랑인가 뭣인가 하는 네 스승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검술을 배웠다니 그럼 나도 제대로 상대해 주마. 한쪽이 죽을 때까지 가는 시합이다!”


“결투라고 하는 거다, 이 멍청아!” 세라비는 외친 다음 싸울 자세를 취했다.


서로를 팽팽하게 노려보던 세라비와 욘도로케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요정의 날렵한 몸이 기합소리와 함께 갑자기 하늘로 튀어 오르더니 아찔하는 순간 장검의 예리한 날이 세라비의 코앞으로 내리 닥쳐왔다. 세라비는 황급히 검을 들어 방어했다.


고대의 검과 욘도로케의 검의 두 날이 묵직하게 부딪치는 순간, 이제까지 훈련용 목검만 가지고 연습해 온 세라비는 이것이 진짜 싸움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쥬가 마늘 빻기와 종이 자르기, 장작 패기 등 온갖 하찮은 훈련들을 꾸준히 시킨 덕에 고대의 검은 세라비의 손에서 매우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욘도로케의 손은 더 빠르고 민첩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검이 불꽃을 튀겼고, 세라비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세라비는 라그랑쥬의 제자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친 요정 하나 이기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여기고 있다가 처음부터 밀리자 당황했다. 언제 검 연습을 했길래 라그랑쥬의 제자인 나를 제압한단 말인가? 세라비의 드높던 콧대는 순식간에 꺾였고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던 손의 힘도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요정의 장검은 눈이 빙빙 돌도록 날쌔게 회전하며 세라비를 안마당 건초 무더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니, 욘도로케 님 잘하네요? 누나는 템푸스 아르카에서 검술을 배운 몸인데 저렇게 몰아넣다니!” 레이첵이 놀라워하며 말했다. 세라비가 결투에 지면 요정의 검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욘도로케는 요정족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가로부터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애랍니다.”하고 레이가 흐느끼다 말고 말했다.


건초더미에 내몰린 채로 이 말을 듣는 세라비의 속은 뒤틀렸다. 그런 건 좀 미리 말을 하지!


그러나 정신없이 지고 있던 세라비는 그 분노의 힘으로 고대의 검을 다시 휘둘러 건초더미에 처박히는 신세를 겨우 면했다. 요정이 약간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분노의 일격을 가한 세라비는, 저 말끝마다 고귀한 요정족이라며 인간인 자신을 모욕하는 짜증 나는 요정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욘도로케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세라비가 요정보다 키가 훨씬 컸기 때문에 요정도 세라비에게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줄 수 있다.” 세라비는 위엄 있게 들리도록 이렇게 말했다. 옆에서 누가 적고 있으면 아무래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웃기지 마라,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어!” 요정은 소리치더니 자신의 멋진 모습에 취해 잠시 방심한 세라비에게 덤벼들어 확 밀쳐버렸다. 세라비는 검을 손에서 떨어뜨리며 나가떨어졌다.


“누나!” 기록만 하고 있던 레이첵이 외쳤다. “괴물과도 싸워 이긴 누나가 여기서 질 수는 없어요! 우리 집안의 명예를 걸고 일어나 싸워요!”


요정의 어린 소녀 같았던 얼굴은 승리의 미소로 일그러졌다. 세라비는 욘도로케의 차가운 검날이 목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끝장이었다. 칼베르에 다 도착해 놓고 이딴 곳에서 요정의 손에 죽게 되다니. 세라비의 꼴은 비참했다. 스승님이 “멋진 척하면 더 꼴사납게 죽는다.”라고 하신 건 아마도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 서비스 컷 >

제가 최종샷 뽑으려고 사용한 이미지들인데 너무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위에 올린 샷들은 원거리샷이라 이 퀄리티가 제대로 안 보여서요.

배경을 나중에 합성하느라 스튜디오샷으로 뽑았습니다.

이짓만 세시간째 하고 있다 보니 이젠 너무나 힘이 드네요.

Seravi_Sword.png
Yondoroke_Sword.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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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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