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수도원장 페르카

파렌베르크에 가요, 게로스 폐하 만나러요.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숲 속에 이따금씩 나무가 베어진 흔적이나 사람이 지나다닌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칼베르였다. 세르비카 경이 “무조건 칼베르 땅에 발을 디디는 것만 생각하거라.”라고 한 바로 그 칼베르에 마침내 도착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은 약초 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촌락에서 머물렀다. 촌락 사람들은 브레스부르의 수도원으로 가는 길을 세라비에게 알려 주었다. 브레스부르는 브뤼메 산맥의 입구에 있는, 포르텔 몽테보다 좀 더 큰 마을이었다. 수도원은 브레스부르 마을을 내려다보는 조용한 언덕 위에 있었다. 수도원을 끼고 흐르는 큰 계곡의 물은 브레스부르 마을을 지나 루쉐 강과 쿠젤 강으로 이어져 칼베르의 수도인 파렌베르크까지 흐른다고 했다. 모두 클라빈이 말한 대로였다.


수도원은 세 수호신을 모시며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세라비가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종탑에서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이 댕그렁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문을 지키는 수도사가 달려 나와 세라비를 맞이했다. 세라비는 클라빈이 알려준 이름을 댔다.


문지기 수도사는 기다리라고 하고 수도원 안으로 사라졌다. 세라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도원의 넓은 안마당 안에는 잿빛, 갈색 그리고 푸른색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말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쉬드르, 퀼테베르, 플레베르를 모시는 수도사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옷 색깔도 여러 가지였던 것이다.

Perka_Scar.png 페르카 이모님도 왕년에는 미인이셨던 것 같습니다 ⓒ 마봉 드 포레 / AI-assisted illustration

이윽고 클라빈의 친구인 페르카가 문지기의 뒤를 따라 나타났다. 이 수도원의 원장인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여위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다리가 불편한지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한 쪽 뺨에는 희미하게 흉터가 보였다.


페르카는 세라비에게서 클라빈의 편지와 꾸러미를 받아 들고 잠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클라빈이 편지에서 세라비 일행을 부탁해 놓았기 때문에, 페르카는 문지기 수도사에게 이들이 머물 곳을 준비하도록 했다.


세라비는 페르카에게 마을에서 의사를 불러줄 것을 청했다. 플로르 왕자가 어젯밤부터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템푸스 아르카를 떠난 후 산길도 이제는 제법 잘 따라온다고 생각했었는데, 약초 농사꾼의 촌락부터 밤에 열을 내며 앓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도원까지 겨우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당장 의사에게 보여야 했다.


페르카는 세라비와 함께 플로르 왕자를 보러 갔다. 그녀는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수도사들이 아플 때는 직접 치료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플로르 왕자를 보고는 문지기 수도사를 불러 브레스부르에서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왕자님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세라비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페르카에게 물었다.


“피로가 많이 쌓여서 그럴 거예요. 의사를 불렀으니 괜찮을 거예요.” 원장이 말했다.


페르카는 플로르 왕자에게 몸을 굽히고 찬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이카리아의 왕자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다 오셨어요?”


플로르 왕자는 페르카가 클라빈의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안심이 되었는지 페르카에게 웃어 보였다.


“파렌베르크에 가요. 게로스 폐하 만나러요.” 플로르 왕자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피로가 쏟아졌는지 잠이 들었다.


페르카는 플로르 왕자의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세라비와 레이와 레이첵에게는 푹 쉬라고 하고는, 의사가 돌아간 다음에도 자청해서 플로르 왕자 곁에서 밤을 새워 간호했다.


다음날 아침 세라비가 플로르 왕자에게 가 보니 다행히 열은 많이 내린 상태였다. 자기네 나라 왕자를 원장에게 맡겨놓고 퍼질러 잤다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세라비는 두 레이들을 두들겨 깨워 왕자 곁을 지키게 한 다음, 자기 처소로 돌아가는 페르카를 뒤쫓아갔다.


페르카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수도원 안마당을 지나 수도원 뒤쪽으로 가고 있었다.


“원장님, 제가 뭐 도울 일은 없을까요?“ 세라비는 페르카를 따라가서 이렇게 물었다.


페르카는 수도원 뒤쪽의 정원으로 들어가더니 지팡이로 화단 안쪽에 있는 하얀 꽃을 가리키며 꽃을 좀 따달라고 했다. 세라비는 꽃을 들고 페르카의 뒤를 따라갔다.


정원 안쪽의 비탈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수도사들의 무덤이 줄지어 선 묘지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 죽은 수도사들의 무덤이었다.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부는 풀밭에는 납작하고 큰 돌로 무덤 위치를 표시하고 잘 다듬은 나무판에 수도사의 이름과 출생, 사망일을 새겨 세워 놓은 무덤들이 여러 줄로 늘어서 있었다.


페르카 원장은 그중 한 무덤으로 가서 이미 놓여 있는 꽃을 치우고 세라비가 들고 온 꽃을 바친 다음 풀을 정리했다. 그 무덤에는 다른 수도사들의 무덤들과 마찬가지로 무덤 주인의 이름이 고대어로 쓰여 있었다. 원장은 다른 무덤들에도 남은 꽃을 바친 다음 정원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따라 다시 돌아갔다.


페르카는 여러 모로 친구인 클라빈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클라빈은 수다스러운 동네 아줌마 같았는데, 페르카는 마치 말을 하면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라비는 페르카 원장을 대하는 것이 좀 어려웠다.


수도원 뒤뜰의 정원에서 흙을 부리고 있던 문지기 수도사에게 세라비가 이런 얘기를 하니, 그는 “수도 생활은 원래 침묵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는 세 신을 섬기는 수도사들이 모두 침묵 속에 조용히 신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다 같이 농사도 짓고, 책도 만들고, 의식에 사용하는 그릇이나 잔을 만들기도 하고요. 노동과 침묵이 이 수도원에서의 수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안마당으로 나온 세라비와 문지기 수도사는 한 무리의 수도사들과 레이가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레이는 잿빛 옷을 입은 쉬드르 신의 수도사들과 함께 쉬드르 신이 얼마나 강하고 힘세고 멋있는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이 친구 정말 제대로 알고 있구만!”하고 적어도 3년 정도는 풀벌레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해 본 적이 없는 수도사가 레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법사가 쉬드르 신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고 있다니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바람 마법도 결국 쉬드르 신의 힘 아니겠습니까?” 레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바람 중에서는 남풍이 제일 강하죠!”


수도원 안마당은 동네 술집 같은 호탕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여기에 누군가 술만 가지고 오면 술집과 다름없게 될 터였다. 세라비는 수도원에 신세 지고 있는 처지인 자신들이 수도원을 이렇게 어지럽히고 있는 것을 페르카가 보면 클라빈의 부탁이고 뭐고 들고 다니는 지팡이로 후두려 패서 쫓아내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제발, 입 좀 닥쳐 줘… 하고 세라비는 마음속으로 레이에게 애원했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카 원장은 그 난장판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쉬드르 신 찬양은 페르카가 안마당을 들러 자기 처소로 돌아간 후로도 계속되었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큰 소리로 말한 탓에 수도사들은 목이 아파 오랫동안 떠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쉬드르 신 수도사들과 레이 사이에는 두터운 우정이 싹텄고 그 이후로도 레이를 만나면 속삭이는 소리로 쉬드르 신 찬양을 하곤 했다.


플로르 왕자는 오랫동안 앓았다. 열이 일시적으로 내렸다가도 밤이 되면 다시 올라 한밤중에 브레스부르에서 의사가 다시 오는 일도 있었다. 세라비는 너무 오랫동안 왕자가 낫지 않자 욘도로케가 혹시 왕자 도시락에 독이라도 탔었나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페르카 원장과 의사는 플로르 왕자가 장거리 여행을 하느라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난 것이라고 했다. 세라비는 이카레이유에서 왕자가 아무리 앞치마를 붙들고 매달려도 안된다고 거절했었어야 한다고 깊이 자책했다.


수도원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플로르 왕자는 겨우 밤에도 열이 나지 않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앓는 동안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탓에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세라비는 플로르가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황급히 왕자의 방으로 가 보았다. 수척하고 창백해진 왕자의 얼굴을 보고 세라비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고열로 앓을 때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왕자가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르비카 양,” 플로르 왕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불렀다. “저 때문에 일정이 너무 지연되고 있어요. 저는 여기 있을 테니 먼저 파렌베르크로 가 주세요. 저는 나중에 데리러 오시면 돼요.”


“왕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왕자님을 여기다 두고 가라고요? 그렇게는 못합니다. 다 나으셨으니까 같이 가요.”


“열은 내렸지만, 아직 여행은 무리예요. 의사도 원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벌써 여기에 일주일이나 있었는데, 여행할 수 있을 때까지 더 기다리면, 일정이 너무 늦어져요.”


세라비가 아무리 안된다고 해도 왕자는 강경했다. 세라비는 그렇다면 두 레이들 중 한 명을 남기고 가겠다고 했지만, 왕자는 그것도 거부했다. 레이는 여행길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고, 레이첵은 우리 사신단이 브뤼메를 넘어 마침내 게로스 왕을 만나는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라비가 계속해서 안된다고 하자, 왕자는 마침내 세라비에게 말했다.


“세르비카 양, 명령이에요.”


이놈의 고집불통 왕자는 이럴 때 보면 마르셀 왕하고 하나도 안 닮았다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어쨌든 세라비는 왕자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페르카 원장은 플로르 왕자를 자기 옆방에 데려다 놓고 하루 종일 직접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세라비는 파렌베르크에 도착하는 대로 브레스부르로 플로르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혹시라도 두 주일 내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 테니 게로스 왕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고 페르카에게 부탁했다.


세라비와 레이, 레이첵은 수도원 안마당에 세워진 마차에 몸을 실었다. 플로르 왕자가 페르카의 부축을 받으며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세라비는 왕자를 혼자 남겨두는 것이 너무나 불안해 자꾸자꾸 뒤를 돌아보며 파렌베르크를 향해 마차를 몰았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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