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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요정과의 결투 (2)

레이가 장난치지 않을 때는 진짜로 진심이다

by 마봉 드 포레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Duel_Scene_Zoomed.png 힘들어서 전 회차 이미지 다시 우려먹고 있다

“레이를 내놔, 이 열등한 인간아!” 요정이 손의 힘을 늦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언제는 레이가 내 거였나? 레이는 자의로 세라비에게 왔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몸이었다. 레이는 항상 저 골짜기를 스치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러나 아까 레이가 모든 책임과 권한을 세라비에게 넘겼기 때문에, 지금 세라비가 항복한다면 레이는 자기 입으로 요정에게 남아있겠다고 선언한 꼴이 되고 만다. ‘내가 만약 여기서 진다면 말이지.’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세라비는 이를 악물었다. 예리한 요정의 검날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세라비의 목을 노리고 파 들었다. 요정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지금 레이를 포기하면 목숨은 살려줄 수 있어. 당신이 맡은 그 중대한 임무도 끝까지 마치려면 목숨은 부지해야 하지 않겠어?”


“레이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세라비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너는 레이를 좋아한다면서 사실은 너한테 잡아두려고 하는 거잖아, 이 집착광아!” 세라비는 증오심을 담아 내뱉었다.


욘도로케는 흥 하고 코웃음 치면서 “그럼 그 집착광한테 한번 죽어 봐라. 누가 누구보고 집착광이라는 거야?’하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검을 내리쳤다. 레이첵도 플로르 왕자도 모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검을 내리치기 위해 검을 뒤로 뺀 찰나의 순간 세라비는 몸을 옆으로 날쌔게 굴려 피하고는 안뜰에 굴러다니던 큼지막한 감자를 집어 들어 요정을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요정이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땅에 떨어져 있던 세라비의 검이 이쪽이라고 부르듯 스르릉 소리를 내며 빛을 발했다. 그러나 세라비가 고대의 검을 다시 집어들 새도 없이 요정이 몸을 일으켰으므로 세라비는 맨손으로 요정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칼싸움이 주먹싸움으로 바뀌었다.


먹구름으로 쌔까매진 하늘 아래 잠시동안 두 사람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날으는 소리와 레이첵의 쓱싹쓱싹 펜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요정은 말없이 격렬한 싸움을 계속했다. 칼싸움에서는 요정이 더 날렵하고 날카로웠으나, 몸싸움에서는 요정보다 키가 큰 세라비가 더 유리했다. 욘도로케가 주먹을 휘둘러도 세라비에게 결정타를 먹이기가 어려웠다.


세라비는 요정에게 마지막으로 힘껏 한 방 먹였다. 요정은 비틀거리면서 땅에 쓰러졌다. 세라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기의 검을 재빨리 집어와 요정의 목에 겨누었다.


“항복해라, 이 날강도 같은 요정족아!” 세라비가 외쳤다.


“죽여라, 어서.” 욘도로케가 체념한 듯이, 그러나 기죽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정족은 결투에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스승님께서는,” 세라비는 템푸스 아르카에서 수련을 계속하고 계실 스승을 생각하며 외쳤다. “함부로 피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게다가 너는 레이의 오랜 친구니까 죽이지는 않겠다.”


“친구가 아니고 애인이야, 이 산적 같은 인간아! 그리고 그런 명분 같은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어서 죽여라!”


레이가 먹구름 보고 가라고 시켰는지 골짜기를 뒤덮고 있던 구름들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밝은 햇빛이 다시 나타나 남의 속도 모르고 명랑하게 골짜기를 내리비추었다.


욘도로케는 눈을 내리깐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라비는 검을 거두었다. 요정은 뭉개진 자존심과 상실감으로 눈물을 쏟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너는 아직 어리니까, 네가 아무리 명예롭게 죽고 싶어도 나는 너를 살려둘 수밖에 없다. 낚시를 할 때도 새끼는 다시 놓아주는 법이다.”


말하고 보니 별로 마음에 드는 비유는 아니었지만 세라비는 검을 다시 검집에 찔러 넣고 뒤로 물러났다. 레이가 “쟤 세라비 님보다 훨씬 오래 살았는데요…”하고 중얼거렸지만, 세라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결투는 끝났다. 세라비는 아직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요정을 뒤로하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오두막을 나와 감자와 채소밭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고 있는 세라비 일행을 향해 갑자기 요정이 소리쳐 불렀다. 세라비는 요정이 다시 싸우자고 부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때 나랑 약속한 거,”하고 요정은 소리쳤다. “그거 절대로 잊지 말고 반드시 지켜줘야 해! 맹세했다! 맹세했어!”


세라비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또한 그런 욘도로케를 흐뭇하게 생각했다. 세라비는 욘도로케가 두려워하는 북쪽나라 공주들의 눈에 절대로 레이가 띄지 않게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욘도로케에게도 맹세한다고 다시 한번 외쳤다. 욘도로케는 멀어져 가는 세라비 일행의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서 있었다.




요정의 오두막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세라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실전을 처음 겪었다는 사실과 결투에서 이긴 스스로에 대한 놀라움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카 저택에 살 때 도망치는 자신을 쫓아오는 저택의 하인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십 대 때였고, 누군가를 두들겨 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지 못하게 무작정 휘두르는 정도였다.


세라비는 방금까지 요정을 힘껏 때려눕히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래쪽 시간 기준으로 바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자신은 강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왕자님을 모시고 거친 산을 걸어서 넘고 검술 훈련을 받고 요정과 결투를 하고 있었다. 세라비는 강가에 누워 있던 시절이 마치 전생 같이 느껴졌다.


한낮이 되자 레이첵이 쉬어가자고 하며 큰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불쌍한 요정 욘도로케가 떠나는 레이를 위해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오두막의 텃밭에서 키운 채소와 감자와 오리고기 등이 예쁘게 담겨 있는 도시락이었다. 세라비는 자기 도시락에 독이라도 들었을까 싶어서 레이에게 먼저 먹여 보았다. 다행히도 괜찮은 것 같았다.


방금 자기가 뿌리치고 온 요정이 싸준 도시락을 천천히 비우는 레이를 바라보며 세라비는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음이 없어도 그렇지 요정이 그렇게까지 울고불고하는데 위로 한 마디 없는 것을 보면 의외로 굉장히 냉정한 놈이 틀림없었다. 결투가 끝나고 욘도로케가 땅에 쓰러져 울고 있어도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까지 같이 여행하면서 본 바로는 레이는 허세와 자만이 가득한 것 이외에는 다정하고 의리도 있어 보였는데, 세라비는 이 온도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레이가 세라비를 향해서 경탄의 눈길을 보내며 말을 꺼냈다.


“세라비 님, 정말 훌륭한 싸움이었어요. 요정족의 검사에게 검술을 배운 욘도로케와 싸워 이기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 세라비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누군가가 칭송해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싸움은 뭐 하러 한단 말인가?


“저는 언젠가는 세라비 님이 저를 위해서 싸워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물론 이제까지 저를 두고 많은 여자들이 질투의 싸움을 벌였지만 실제로 결투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죠.” 레이는 감동에 차서 말을 이었다. “전 세라비 님이 욘도로케를 살려주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욘도로케가 이겼다면 세라비 님을 살려두지 않았을 걸요!”


“하지만 나에게 패배란 없지!”라고 세라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찜찜했다. 세라비는 레이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레이를 욘도로케의 집요한 손에서 구해내기 위해, 그리고 훼손된 자신의 명예 때문에 결투를 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까 결투 때, 특히 검을 배제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주먹싸움 직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세라비는 욘도로케의 예리한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레이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라고 말했던 것이다.


세라비는 레이첵한테 기록한 것 좀 내놔 보라고 해서 그 부분을 읽어 보았다. 아 맞네, 나 그렇게 말했네. 이렇게 되면 누가 보아도 세라비와 욘도로케가 레이를 차지하기 위해 치정싸움을 벌인 꼴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세라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가 농간을 부려 욘도로케와 세라비를 싸우게 만들고 자기는 옆에서 눈물이나 짜면서 유치촌극을 연출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라비는 부끄러움(갖고 놀아졌다는 데 대한)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세라비는 결투에서 승리했지만, 자존심에는 큰 상처를 입었다.


레이는 세라비의 이런 심경을 눈치채고 칭송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이튿날, 울긋불긋하게 물들어가는 숲 속을 지나고 있을 때 세라비의 옆으로 다가왔다.


“세라비 님,” 레이가 말했다. “어제 욘도로케를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내가 욘도로케를 돕다니? 나 걔 때려눕혔는데?” 세라비는 우울하게 말했다. “네가 걔한테 너 떠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 하는 바람에 처음 보는 애한테 주먹질까지 하게 된 거 아냐?”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레이는 설명했다. “욘도로케는 그렇게 납득하지 않으면 영원히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애예요. 하지만 결투에 패배했으니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내가 졌으면? 나 걔한테 죽기 직전이었어. 너도 봤잖아!” 세라비는 화가 나서 말했다. “욘도로케가 이겼으면 너도 거기 남았어야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세라비 님은 죽지 않는다고요. 제가 마법으로 지켜드린다고 했잖아요.” 레이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물론 이번에는 제가 뭘 할 기회가 없었네요. 세라비 님이 주먹싸움도 그렇게 잘하실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


그것은 세라비 자신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레이가 평소처럼 장난치지 않고 진지하게 굴 때는 진짜로 진심이라는 뜻이었으므로, 세라비는 화가 아직 다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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