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던 짓을 하면 망한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페르카가 준비해 준 마차는 수도원 사람들이 브레스부르나 근처 다른 마을로 식재료를 사거나 팔러 갈 때 쓰는 수송마차가 아닌 말 두 마리가 끄는 작은 여행용 마차였다. 파렌베르크까지는 강을 끼고 5일 이상 달려야 했으므로, 세라비와 레이는 문지기 수도사와 함께 수도원 마차를 타고 브레스부르로 가서 마차를 받아오고 필요한 물건도 샀다. 플로르 왕자가 멀쩡하다 갑자기 앓아눕는 것을 보았으므로 약도 좀 챙기고(레이나 세라비는 안 아플 것 같았지만 레이첵은 필요할 수도 있었다), 예비 편자도 준비해 두어야 했다.
마을의 약초상에는 약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이카리아의 포르텔 몽테 같은 시골 마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지혈 연고조차도 이곳에는 없었다. 약초상 주인은 못 본 지 꽤 되었다고 말했다.
“이게 지혈연고랑 같은 성분이니까 이거라도 빻아서 상처에 붙이면 효과는 같을 거요.”
주인이 건네준 약초는 이카리아에서는 흔해 빠진 약초였지만 가격은 몇 배나 비쌌다. 주인의 말로는 그나마 이 동네가 산동네라 구할 수라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했다.
예비 편자를 구하기 위해 들른 대장간에서는 다 쓴 편자를 녹여 만든 재활용 편자밖에 없었다. 대장간 맞은편 빵집에서는 밀 값이 갑자기 뛰었다며 빵집 주인이 불평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자가 부족한 시골 마을의 수도원에 플로르 왕자를 남겨 두어도 되는 건지 걱정하며, 세라비는 여행용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루쉐 강에서 쿠젤 강 상류까지 이어진 완만한 구릉들이 내려다보는 길을 달렸다. 수확이 끝나 가는 포도밭과 소가 풀을 뜯는 목초지와 너도밤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브레스부르를 지나자 멀리 지평선에 큰 도시가 희미하게 보였다. 칼베르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인 데종이었다.
데종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긴 마차 행렬이 지나갔다. 덮개가 없는 마차도 있고 포장이 달린 마차도 있었다. 모두 짐을 가득 싣고 있어 느릿한 속도로 데종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차 옆과 뒤로 말을 탄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세라비는 마차 행렬을 피해 길에서 빠져나와 풀밭으로 마차를 몰았다.
레이는 길게 이어진 마차 행렬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프티 몽텔리에서 세라비를 만나 여행길에 오른 후 이카리아는 오스틴이나 스칼하븐의 압박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레이처럼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아도 마르셀 왕은(플로르 왕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무능하고 심약한 왕이었고 세르비카 경이 모든 치다꺼리를 다 하고 있었다.
레이는 칼베르가 이웃나라 공격을 받아서 망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지만, 그 후에 이카리아도 같이 망하는 것이 수순이므로 온전히 남의 일로만 여길 수는 없었다. 이카리아는 고작 반년 전 포르트메르와 마르벤을 통한 교역이 막히는 바람에 그제서야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세라비를 밀사로 보냈다. 그러나 이카리아보다 훨씬 전부터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압박을 받아왔고 이카리아처럼 옆에 기댈 형님 같은 나라도 없는 칼베르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을까? 레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얘네들, 전쟁 준비를 하고 있구나…!’
레이는 옆에서 “와 마차 진짜 많다!”하고 태평하게 웃고 있는 저 세르비카 사촌 남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레이, 왜 그래?”
평소에는 둔해 빠진 세라비가 웬일로 레이의 표정을 보고 뭔가를 느꼈는지 이렇게 물었다.
레이는 세라비에게 설명했다. 농사짓는 동네에 빵 만들 밀이 부족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흉작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올해 이카리아의 작황은 좋은 편이었다. 같은 테라 칼베리아에 있는 칼베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야 했다. 게다가 쇠나 의약품은 왜 모자란단 말인가? 길게 늘어선 짐수레는 뭘 나르고 있는 것인가? 물론 레이가 짐수레에 가서 뭐가 실렸는지 덮개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뭘 나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차 행렬을 호위하며 따라가는 말 탄 사람들은 분명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세라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갑자기 마차를 돌려 데종 방향이 아닌 옆으로 빠져나가는 길로 몰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누나?” 레이첵이 물었다.
“우리나라가 그새 망했을지도 모르는데 마차로 한세월 걸려서 갈 수는 없어.” 세라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강가에 있는 마을로 말을 달리게 했다.
쿠젤 강의 지류인 루쉐 강 옆에는 마손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세라비는 마손에 들어서자 사람을 사서 마차를 브레스부르 수도원으로 돌려보내더니, 갑자기 강가의 나루터에 가서 배를 보여달라고 했다.
“어디까지 가시려고요?” 주인이 나와 물었다.
“파렌베르크까지 급히 가야 하는데, 배로 가면 얼마나 걸리나요?”
뱃사공이기도 한 나루터 주인은 세라비를 훑어보았다. “가까운 동네도 아니고 파렌베르크까지는 배 좀 타보신 분 아니면 힘드실 텐데요! 지금 수위도 높고 물살도 좋아서 날씨만 좋으면 이틀이면 도착하긴 할 텐데…”
“오, 배 타면 진짜 빠르네요.” 레이첵이 레이에게 속삭였다.
세라비는 주인의 말에 코웃음 치며 “이틀 거리라면 뗏목만 타도 충분하지만, 적당한 걸로 보여주세요.”라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세라비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레이조차 놀랐다.
주인은 이 눈이 땡그란 젊은 여자가 뭔 놈의 자신감이 저리 넘치는지 의아해했지만, 아무튼 보여달라는 대로 배를 보여주었다. 세라비는 단단해 보이는 4인용 나룻배를 선택했다.
“그런데 누나, 우리 돈은 있어요?”
“우리 출장비 거의 하나도 안 쓰고 다 갖고 있잖니.” 세라비가 말했다. “포르텔 몽테랑 브레스부르 말고는 돈 쓸 일이 없었어.”
오델 몽테에서는 촌장 노인이 돈을 받지 않았고(괴물을 물리쳐 주었다며 오히려 돈을 주려고 했었다), 템푸스 아르카는 아래쪽 세상의 돈이 의미가 없는 곳이었으며, 하룻밤 묵게 해 준 욘도로케는 인간의 돈 따위는 취급도 하지 않았으므로 세라비가 이카레이유에서 받아온 출장비는 사실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루터 주인은 갑자기 나타난 큰 손 고객님이 배를 빌리는 것도 아니고 사겠다고 하자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좋은 배 사신 겁니다! 방수포도 드릴게요. 그리고 덮고 주무실 양털 담요랑 철제 화로랑…”
주인은 세라비가 달라고만 하면 자기 마누라도 내어줄 기세였다. 레이는 “저걸 진짜로 사버리네…”하고 놀라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주인은 배에 이상은 없는지 여기저기 살핀 후 세라비에게 배를 내주었다. 레이와 레이첵은 세라비가 자연스럽게 배에 뛰어올라 조타 노를 잡는 것을 보고 서로 마주 보았다.
“세라비 님, 원래 배 타셨어요?”
“내가 강가에서 물멍만 때리는 줄 알았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라를르가 아닌 프티 몽텔리에서 세라비를 처음 만나는 바람에 세라비가 고향에서 뭘 하고 살았는지 몰랐던 레이는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세라비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 이때 알게 되었다.
세라비가 강가의 라를르에 살면서 배에 익숙한 것은 사실이었다. 18살에 성인이 되어 세르비카 저택에서 나와 라를르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 정착한 후, 마을 나루터에서 뱃사공 아저씨들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배를 자주 얻어 타다 보니 배 다루는 법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란시(카론 강 상류의 마을)에서 라를르까지 배로 이틀 걸리거든.” 세라비가 느긋하게 말했다. “거길 몇 번이나 배로 오갔어. 처음에는 보조로 탔지만 나중엔 내가 몰고 다녔지.”
세라비는 오래간만에 자기가 잘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강 맞은편 마을까지는 혼자도 타고 다녔지. 마을 사람들 건네도 주고…”
“근데 누나, 우리 이렇게 배 사버리면 돈 모자라지 않아요? 파렌베르크 도착한 다음엔 어떡하려구요?” 레이첵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넌 대체 뭐가 걱정이니? 파렌베르크 도착하면 게로스 폐하 만날 거니까 그다음부턴 궁 안에서 지내게 될 거잖아! 우리는 이카리아의 사신인데 돈 받고 재워 주겠어?”
레이첵은 안심하고 파렌베르크 도착해서 어떻게 양국 간 정상회담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뒤에서 조타 노를 잡고 있던 세라비가 레이첵에게 노를 왜 그렇게 못 젓냐고 잔소리를 시작했으므로 더 이상 떠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를 거의 젓지 않아도 배는 강물을 타고 빠르게 흘러갔다. 세라비는 레이들에게 큰소리친 것과는 달리 루쉐 강에서의 배 몰기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세라비가 배를 타던 카론 강은 강바닥도 깊고 평탄한 데다 물살도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수도원을 출발하기 이틀 전에 비가 왔던 터라 평소보다 물살은 더 빨랐다.
레이가 그나마 보조를 잘해 준 덕분에 배는 해질 무렵 겨우 루쉐 강을 빠져나와 쿠젤 강으로 들어섰다. 쿠젤 강은 파렌베르크까지 흐르는 강이므로 이제 멈추지 않고 계속 가기만 하면 되었다.
레이가 배 앞뒤에 세워진 장대와 좌우 난간에 방수포를 둘러 단단히 비끄러매어 천막을 만드는 동안, 레이첵은 나루터 주인이 준 양털 담요를 펴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세라비 님, 저랑 교대해요. 좀 쉬세요.”
세라비가 “너는 배 못 다루잖아.”라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레이는 “제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강에서는 처음이지만 저도 원래 배 좀 탔어요.”하고 세라비의 손에서 노를 빼앗았다.
레이에게 조타 노를 건네주고 세라비는 천막 안에 들어가서 담요를 두르고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어두워져 강물이 보이지 않아 레이는 산에서 했던 것과 같이 마법으로 불을 밝혀 이물 위로 떠올렸다. 레이첵은 배를 잘 다루는 세라비 누나와 뭐든지 잘하는 레이 형님이 같이 있어서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운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새벽에 습한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라비와 교대해서 잠깐 눈을 붙이던 레이첵은 세찬 비가 천막을 때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거센 비바람에 천막 한쪽이 뒤집히며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빠른데… 이러다가 배 뒤집히겠다.”
강 양쪽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배를 댈 곳도 없었으므로, 세라비는 배가 뒤집히거나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배의 방향을 조정하려고 애썼다. 레이가 닻을 내렸다. 그러나 배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떠내려온 큰 나무 하나가 배를 옆에서 들이받는 바람에 배는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리며 뒤집힐 뻔했다. 방수포로 친 천막은 미친 듯이 펄럭거리더니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레이첵은 천막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배에서 떨어질 뻔했다.
“저리 가서 앉아있어!” 세라비는 배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짜증이 나는 와중에 사촌마저 허우적거리고 있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배가 옆으로 크게 회전하는 바람에 세라비는 배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근처의 아무거나 붙잡아야 했다. 레이는 지팡이를 잡은 손을 높이 들었다. 지팡이 끝에 달린 푸른 구슬이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구슬 주위를 도는 소용돌이들이 공중으로 빠르게 날아올라 우산살 모양으로 펼쳐졌다. 바람을 잔잔하게 하기 위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비바람은 잠깐 잠잠해질 뿐, 다시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라마야나 스승님은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폭풍도 잠재웠는데, 자신은 아직 강 위에 부는 비바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책을 보고 독학했는데, 역시 실습이 모자랐던 것일까. 레이는 템푸스 아르카에서 읽다 말고 가지고 온 마법책이 품 안에 잘 있는지 손으로 더듬어 보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순간, 꽝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배 바닥이 뭔가 커다란 것에 부딪쳤다. 우현이 부서지며 나무조각들이 튀었다.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세라비가 제일 먼저 물속으로 떨어졌다. 레이는 손을 뻗어 세라비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레이는 부서진 배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판자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저만치 세라비가 물 위에 떠올랐다 다시 잠겼다 하며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떠내려가던 레이는 절벽에서 강가로 삐져나온 큰 나뭇가지를 낚아채 붙잡고 지팡이를 지렛대처럼 삼아 위로 올라갔다. 나뭇가지가 약해서 오래 버텨줄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세라비가 시야에 있는 동안 붙잡아야 했다. 레이는 우르릉거리며 요동치는 강물에 생각을 집중했다. 파괴 마법을 물에 쓰면 어떻게 될까?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다. 제발 물에도 들어야 할 텐데,라고 마음속으로 빌며 레이는 강물을 향해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한 파괴 마법 주문을 외쳤다.
엄청난 힘이 강물을 때리며 물을 밀어냈다. 높은 물기둥이 절벽 끝까지 솟구쳤다. 저만치 떠내려가던 세라비도 물의 반동으로 물기둥과 함께 흐름의 반대 방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물기둥이 무너지면 오히려 아까보다 더 빠른 힘으로 순식간에 멀리 떠내려갈 것이었다. 레이는 물기둥이 무너지기 전에 세라비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세라비가 아직 의식이 있기를 바라며 지팡이를 세라비 쪽으로 내밀었다.
“잡아… 제발!”
지금 잡지 못하면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멀어질 것이고 그때는 희망이 없었다. 다행히 세라비가 지팡이 끝을 겨우 잡았으므로 레이는 지팡이를 끌어당겨 세라비를 단단히 붙잡았다.
“세라비 님, 저 잡으세요!”
세라비는 레이에게 매달렸다. 강가의 절벽들 틈에 움푹 들어간 공간이 보였다. 레이는 강의 가장자리로 헤엄쳤다. 절벽 틈에 물살이 비교적 잠잠한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폭우로 절벽이 조금 무너져 물 위에 흙과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레이는 그쪽으로 겨우 기어올라가 세라비를 내려놓고 자기도 털썩 쓰러졌다.
세라비는 땅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는 세라비가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하고 세라비를 옆으로 뉘어 물을 토하게 했다. 세라비는 물을 다 토해내고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는 어디 있지?” 세라비가 헐떡이며 물었다. 레이는 그것이 레이첵을 뜻하는 것을 알고 말문이 막혔다. 세라비도 간신히 구해낸 터라 레이첵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기로는 레이첵은 아직 배에 타고 있었지만 그 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부서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레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을 한꺼번에 구조할 수는 없었다. 레이는 강물 저편을 바라보았지만 배도 레이첵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세라비는 절망해서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세라비 님, 우리 여기 오래 못 있어요. 올라갈 방법을 찾아야 해요.” 레이가 말했다. 절벽이 더 무너지면 거기 깔리거나 물속으로 다시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는 마법으로 불을 밝혀 절벽에 짚고 올라갈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나무뿌리가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잘만 하면 딛고 올라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문제는 비바람이 계속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에 절벽도 나무뿌리도 미끄럽다는 점이었다. 올라가다가 손이 미끄러진다면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이 다시 강물에 빠질 것이었다. 담이나 울타리 넘는 것은 자신 있는 세라비도 막막한 눈으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절벽 위에서 말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밝힌 불빛을 보고 다가온 이 근처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레이와 세라비를 발견하고 자기들끼리 뭔가 외치더니 급히 밧줄을 내려보내 주었다. 레이는 세라비를 먼저 올려 보냈다. 절벽 위로 올라온 세라비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