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수가 없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세라비 님, 얘가 제가 얘기한 요정 욘도로케에요.” 레이가 욘도로케를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욘도로케, 이분은 내가 지금 모시고 다니는 세라비 님이고 이쪽은 사촌 되시는 레이첵 세르비카 군이야. 그리고 이쪽은 우리나라의 플로르 왕자님이셔.”
레이가 소개를 마치자 요정은 정중히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든 요정은 경계가 풀리지 않은 눈초리로 일행을 훑어보았다. 특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음을 세라비는 느꼈다.
“돌아온 게 아니야 그럼? 어디로 가는 중인데?” 요정이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세라비 님이 무사히 칼베르로 여행하실 수 있도록 모셔다 드리고 있어. 마침 이 근처를 지나게 돼서 이렇게 왔지.”
욘도로케는 여전히 불신에 찬 표정으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세라비는 자기가 오는 길에 감자라도 밟아 뭉그러뜨렸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딱히 잘못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먼 길을 왔으니 쉬도록 해.” 욘도로케는 아까의 호들갑과는 반대로 차갑게 돌변해서 이렇게 말하고는 집안으로 싹 들어가 버렸다.
“요정들은 경계심이 많아서요.” 레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쟤가 저를 좀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아마 질투가 나서 그럴 거예요.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다시 브레스부르로 출발하기로 해요.”
세라비는 한숨을 쉬었다. 저 요정이 혹시라도 자신과 레이의 사이를 의심해서 저러는 거라면 얼마든지 안심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이나 들어먹을지 의문이었다. 여기서 레이하고 조금만 친한 척했다가는 머리를 쥐어뜯기고 감자밭 한가운데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세라비는 라마야나가 살던 오두막 한켠의 작은 방에 짐을 풀고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를 푹 쉬게 했다. 템푸스 아르카를 떠난 후로 동굴에서만 잤기 때문에 초라한 방이라도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요정의 기분 나쁜 눈초리 때문에 세라비는 마음이 불편했다.
“더 잘생겨졌네! 키도 많이 크고!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왔어?”하는 욘도로케의 목소리에 세라비는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방 안에 세라비 혼자 누워 있었다. 방에서 나가 보니 부엌에서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가 감자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레이와 욘도로케는 안뜰에 갖다 놓은 벤치에 앉아 얘기 중이었다. ‘손님들한테는 감자껍질을 벗기게 해 놓고 집주인은 수다나 떨며 놀고 있다니.’하고 세라비는 분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저분은 우리나라 왕위 계승자인 왕자님이란 말이다!’
“그동안 진짜 바빴거든. 그 후로 마법 학교 들어갔다가 졸업하고 나서는 이런저런 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이쪽으로 넘어올 시간이 없었어.”
“하긴 그래! 여기가 좀 멀긴 하지. 칼베르 가서 할 일 다 끝나면 인제 여기 와서 살아라, 응?”
“그치만 세라비 님 일이 언제 끝날지 몰라.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레이는 자신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요정의 손을 적당히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시 안 오는 거야? 난 네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면서 10년도 넘게 이런 산골짜기에서 살아왔는데 정말 너무해!” 요정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런 것도 기록해야 되겠죠?”하고 레이첵이 묻는 바람에 세라비는 정신을 차렸다.
“요정 만난 얘기는 반드시 기록을 해야겠죠?” 레이첵이 다시 물었다. 세라비는 “니 맘대로 해라. 적든지 말든지…”하고 무심하게 대답했고, 레이첵은 필기도구를 찾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세라비는 창문 너머로 다시 눈을 돌렸다. 애교를 부리며 욘도로케를 달랠 줄 알았던 레이는 세라비의 예상과는 달리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너네 아버지랑 오빠들은 다 어딜 가시고 너만 있는데?”
“술이 다 떨어져서 요정 마을에 다녀온다고 나갔어. 당분간은 안 올 것 같아! 그러니까 오빠들 돌아올 때까지 나랑 있어주면 안 돼?”
“너희 아버지 원래 마을 가면 다 잊어버리고 최소 반년은 있다 오시잖아! 내가 지금 가는 건 굉장히 중요한 임무라서 지체되면 안 돼.”
레이가 설명하자 요정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세라비는 너무 시끄러워서 제발 레이가 아무 말이라도 해서 울음만 그치게 해줬으면 하고 바랬다. 레이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욘도로케? 너는 요정이니까 내 도움이 필요 없겠지만 세라비 님은 인간이라서 나처럼 유능한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야. 이해하겠지?”
레이첵이 필기하느라 내버려 놓은 감자 껍질을 깎으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세라비는 감탄했다.
“레이 형님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말솜씨도 뛰어나군요!”하고 레이첵이 말했다. 이카레이유에서 레이를 처음 만난 이후로 레이첵은 레이의 충실한 추종자였고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네 말이 옳아, 레이.” 요정은 금방 눈물을 거두고 말했다. “나처럼 고도로 발달한 종족의 일원이 하찮은 인간 여자에 대한 질투로 이성을 잃다니 정말 실수였어. 어차피 비교해 봤자 나의 고귀함만 손상되는데 말이야!”하고 욘도로케는 말했다. 듣고 있던 세라비는 저도 모르게 고대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레이첵은 깜짝 놀라 세라비를 뜯어말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세라비 누나… 템푸스 아르카에서 검술까지 배웠으니 이제 뵈는 게 없겠구나…’
아무튼 요정은 울음을 그쳤고 감자도 모두 깎았으므로 일은 모두 해결되었다. 그러나 세라비는 요정이 한 말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언젠가는 갚아주겠다고 생각했다.
레이에게 가지 말라고 울부짖던 요정은 그날 저녁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세라비는 레이와 단둘이 얘기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러나, 저녁식사 후 잠시 돌담 앞에 서서 밭과 그 너머의 산들을 바라보고 있는 세라비에게 욘도로케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었다.
“흠흠.”하고 요정은 세라비 앞에 가서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돌렸다. “거기… 지금 하고 있다는 그… 중요한 일이 도대체 뭐죠?”
“레이가 얘기 안 해요?” 세라비는 대답하기 싫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 안 해주니까 지금 댁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요!” 욘도로케도 톡 쏘았다.
“레이한테 제대로 다시 물어보지 그러슈.”하고 세라비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줘요.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비밀로 해요?” 욘도로케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세라비는 자신이 칼베르에 밀사로 가는 일이 엄청 대단한 일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닌 다른 종족이 자신의 임무를 비하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여기서 인간하고 얼굴 마주 보고 이런 얘기하는 거 싫다고요!” 요정이 다시 말했다.
“레이랑은 말만 잘하시던데?”
“레이는 보통 인간들하고 다르니까요!” 요정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그 애는 정말 특별한 애라서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우린 레이가 열네 살 때 여기서 만났는데 이미 봐서 아시겠지만 우리는 특별한 사이거든요.” 요정은 상기된 얼굴로 특별한 사이라는 단어를 무척 강조했다.
세라비는 레이가 욘도로케의 손을 적당히 뿌리치고 품에서 떼어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아니던데…’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욘도로케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레이가 특별히 모시는 분이니까 나도 더 이상 당신을 열등한 인간들하고 같이 취급하지는 않겠어요. 당신 사촌이랑 그 왕자라는 사람도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무슨 일로 가는 건지 말해줘요!”
“그게 댁한테 왜 중요해요?”
“그거야 당연히!” 욘도로케가 외쳤다. “우리 레이가 그 일 때문에 나를 떠난다는데 당연히 알고 싶지 않겠어요? 그 애와 나의 사랑이 깊은 건 사실이지만 레이는 공과 사가 분명한 애라서 그 일 때문에 곧 여길 다시 떠날 거란 말이에요.”
요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당신,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세라비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없는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연애도 해본 적 없는 인간인 당신이 종족을 초월한 우리 사랑을 이해할 리가 없죠. 그 애가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얼마나 지나야 돌아올지 레이의 반려자로서 내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십 년 동안 연락도 안 한 것 같구만 뭔 놈의 반려자야!’ 세라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붕 없는 곳에서 자도 좋으니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이보세요, 요정씨.” 세라비는 마침내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댁이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라 할지라도 국가 기밀을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는 신분이에요.”
요정은 예상대로 노발대발했다. 세라비는 요정이 마구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 알고 싶다면, 지금 현재 우리 이카리아를 대표하는 사신 일행의 대표로서 내가 레이의 상관이라는 사실도 존중해 주길 바래요. 그리고 당신이 아까 감자껍질 깎게 한 저 어린 왕자님도 장차 우리나라의 국왕이 되실 분으로써 나와 레이의 최고 상관이 되시는 그런 분이시죠.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갖추고 우리를 대해 줘야겠어요. 그러면 나도 우리나라의 기밀이 누설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댁한테 그 사명을 알려줄 테니까요.”
“더러운 계급사회로군.” 욘도로케가 투덜거렸다. “우리 레이 같은 출중한 애가 당신의 부하라니, 보나 마나 레이의 겉모습에 끌려서 어떻게 좀 해볼까 하고 데리고 다니는 거겠죠!”
세라비는 너무나 억울했지만 반박하면 얘기가 길어질까 봐 꾹 참고 욘도로케에게 지금 오스틴과 스칼하븐이 벌이고 있는 전쟁과 칼베르와 이카리아가 처해 있는 상황을 최대한 심각하게 불려서 얘기해 주었다. 욘도로케는 산골짜기에 살면서 그동안 전쟁 소문도 못 들었는지,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잘생긴 남자 하나 때문에 치고받고 싸우는 한심한 인간들의 소굴로 나의 소중하고 청순한 레이를 내보내야 한다니…”하며 요정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퍼했다. 그 모습이 진짜로 너무나 가슴 아파 보여서 세라비는 잠시나마 요정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정이 체념한 표정으로 세라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이봐요, 나하고 약속 하나만 해줘요.”
“뭘요?”
“그 잘생긴 남자 때문에 전쟁까지 한다는 무서운 인간 여자들의 눈에 우리 레이가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해 줘요. 게로스라는 인간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우리 레이가 더 특출 날 것이 확실하니까요. 레이는 잘생긴 것만큼 강하기까지 해서 자기 몸 하나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당신이 얘기한 그 북쪽나라의 무서운 공주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도 있죠. 변덕스럽고 의심 많은 인간인 당신에게 이런 일을 맡기는 게 그다지 미덥지는 않지만, 어쨌든 약속해 줘요.”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세라비는 어차피 다음날 떠날 것이었으므로 꾹 참았다. 레이에 대한 사랑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은 저 요정한테 그런 걸 따져 봤자 얘기만 길어질 뿐이었다. 세라비는 그 자리에서 고대의 검을 들어 가슴에 대고 요정과의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