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델 몽테 (5)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낮의 태양은 뜨거웠지만, 해가 지자 온몸을 스산하게 하는 찬 공기가 산 위로 내리 덮였다. 지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세라비들의 발걸음은 점점 발에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지고 느려졌다. 마치 한 걸음씩 발을 뗄 때마다 땅에서 무언가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어스름이 지는 숲 속에는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점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여러 명이 같이 있지 않았다면 무서워서 혼절했을 광경이었다. 레이는 마법으로 불을 밝혔다. 도깨비불들은 레이의 불 곁으로 날아와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듯 한 바퀴 맴돌다 다시 허공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템푸스 아르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첼레가 일행을 안심시켰다. “일반 사람들은 설령 길을 잃어 여기까지 왔다 해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날 밤 레이는 꿈을 꾸었다. 레이는 대마법사 라마야나의 집 거실의 벽난로 옆에 스승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스승님은 레이가 어렸을 때처럼 젊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스승님의 손에는 위쪽 끝에 푸르게 빛나는 큰 구슬이 박힌 기다란 나무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레이는 스승님이 지팡이를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지팡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승님도 강력한 바람을 다루는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갖고 다니지 않았었다.
“스승님, 그건 어디서 나신 건가요?” 꿈속의 어린 레이가 물었다.
“레이야,” 스승님이 레이에게 대답했다. “이건 이제 네 거다.”
대마법사는 레이에게 지팡이를 내밀었다. 레이는 지팡이를 소중하게 받아 들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첼레는 이상한 꿈 역시 신들의 영역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날 중으로 템푸스 아르카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므로 그들은 아침을 빨리 먹고 동굴을 정리한 다음 길을 나섰다.
보통 전나무보다 키가 2배는 큰 브뤼메 전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는 숲을 통과하자, 저 멀리 어제도 분명히 북쪽을 향해 걷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비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산이 갑자기 나타났다. 산의 끝은 뾰족했으며 어찌나 높은지 끝이 하늘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높은 산이 있다면 오델 몽테나 포르텔 몽테처럼 먼 곳에서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왔네요.”하고 첼레가 산을 가리켰다. “템푸스 아르카입니다.”
세라비는 넋을 잃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산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였다. 하늘로 치솟은 도시는 거대하고 기묘한 구조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비현실적인 빛을 내며 우뚝 서 있거나 흔들리거나 흐릿해졌다. 이 도시는 결코 인간에 의해 세워진 것일 수가 없었다.
레이첵이나 플로르 그리고 레이조차도 믿을 수 없는 도시의 모습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비가 가장 먼저 침묵을 깼다.
“나 같은 사람이 저기 들어가도 되는 걸까? 왠지… 입구에서 번개 맞을 것 같아…”
첼레는 “그럴 리가요.”하며 웃었다. “템푸스 아르카에 와서 번개에 맞을 만한 사람이었으면 이미 어제쯤 맞았을 겁니다.”
그들은 기운을 내어 산줄기를 타고 뻗어 있는 가파르지 않은 길을 마저 걸었다.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이 발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템푸스 아르카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의 성벽은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일그러지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하였다.
성벽 밑에서 도착해서야 세라비는 템푸스 아르카의 웅대함과 장엄함이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팔레 에클라 입구 아치 게이트의 열 배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성문에 다다랐다. 그것은 돌인지 금속인지 알 수 없는 물질로 되어 있었으며 거대하고 무거워 보였지만 첼레의 손짓에 비단처럼 매끄럽게 열렸다.
세라비와 두 레이 그리고 플로르 왕자는 첼레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는 찰나, 하얀 백열광의 화염과도 같은 것이 첼레를 제외한 일행들을 둘러쌌다. 마치 번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플로르 왕자는 불타 죽는 줄로만 알고 레이첵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그 레이첵도 공포로 얼어붙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화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화염은 세라비들을 둘러싸고 한 사람 한 사람 훑어내리며 번쩍였다.
“아, 걱정 마세요, 그냥 입장 전에 검사받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첼레가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화염이 사라지자, 세라비들의 눈앞에는 눈부신 흰 옷을 입고 은백색 긴 머리를 늘어뜨린 네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템푸스 아르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맨 앞에 선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사람이 인사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고 여기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우선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첼레는 “그럼 잘들 지내고 또 만나요.”라고 인사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가 포르텔 몽테에서부터 무겁게 지고 온 물건들은 그의 어깨에서 내려와 혼자 공중에 떠서 첼레의 뒤를 따라갔다.
눈부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세라비 일행을 도시 안쪽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세라비는 그들을 따라가며 템푸스 아르카의 거리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넓은 거리와 광장에는 네 명의 남녀와 같은 흰 옷이나 푸른색 등 여러 가지 색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바닥도 건물도 모두 돌로 만들어진 도시는 전체적인 색조가 어두운 편인데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리 위 허공에는 레이가 밤에 숲을 밝히기 위해 띄웠던 것 같은 색색가지 마법의 불빛들이 떠다니기도 하고 새처럼 날아다니기도 하고 있었다. 레이가 만든 부드러운 공 모양도 있었고 별 모양이나 꼬리가 눈부신 새의 모양을 하고 있기도 했다. 도시는 인간의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하러 다들 걸어 다니는 걸까요?” 아까 첼레의 짐가방이 공중에 떠 가는 것을 생각하며 플로르 왕자가 말했다.
“글쎄요. 신성한 사람들도 평소에는 걸어야 체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라비가 대답했다.
네 명의 남녀는 세라비들을 숙소로 안내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역시 돌로 지은 아담하지만 네 명이 지내기에는 충분히 큰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따뜻하고 충분한 식사와 편안한 침대 그리고 목욕물도 제공되었다. 네 명의 남녀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플로르 왕자는 팔레 에클라를 떠난 후 처음으로 푹신한 침구에서 잘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세라비도 레이첵도 브뤼메 산맥에서 한 달이나 노숙해 본 경험이 있는 레이조차도 이에 공감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그날은 다들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세라비들이 일어나 보니 식당과 부엌으로 쓰는 큰 방에는 누가 다녀간 흔적도 없는데 이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너무 편하고 좋은데, 우리 인제 뭐 하면 되는 걸까요?” 아침을 먹으며 레이첵이 말했다.
“오래 있을 수는 없어. 산맥을 빨리 지나갈 수 있다고 해서 온 거니까.” 세라비가 대답했다.
레이는 스승이 살던 집에 가보고 싶어 했고 레이첵과 플로르 왕자는 도시 구경을 좀 더 하고 싶어 했다. 하루이틀 더 머무르다가 나가면 그곳이 바로 칼베르 땅일까,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식사를 끝내고 나자 어제 왔던 네 명의 남녀가 다시 찾아와 세라비보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라고 했다. 세라비는 당황했다.
“왜요? 저 쫓겨나나요?”
입구를 통과할 때 백열의 화염은 내 머릿속에서 뭔가 사악한 것을 본 것일까, 하고 세라비는 생각했다. 뭔가 신성한 곳에 들이면 안 되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이제야 발견한 템푸스 아르카의 신들이나 신성한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내기로 결심한 것일지도 몰랐다.
“검 챙겨 오시구요!” 남녀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저 어디 가는데요? 템푸스 아르카에서 쫓겨나는 건가요?” 세라비가 물었다.
“라그랑쥬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녀들 중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오늘부터 검술을 배우실 겁니다.”
“아니 왜요? 전 아무것도 안 배워도 돼요!” 세라비는 절망해서 외쳤다. “머리도 나빠서 이카레이유에서 학교도 겨우 졸업했어요. 얘 레이야, 내가 얼마나 학교에서 형편없었는지 이분들한테 얘기 좀 해줘!”
레이첵은 세라비가 공부를 잘하면 할수록 자꾸 선생님들이 뭔가 더 시키려고 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빵점짜리 답안지를 내곤 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흰 옷을 입은 남녀는 세라비가 짐을 챙겨 나올 때까지 문 앞에서 독촉하다가 세라비를 거의 끌고 나가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세라비의 아우성치는 소리는 그들의 모습이 레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길 위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