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인생의 낭비가 아니다 (증거 있음)
덕질, 그것은 무엇인가.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더럽고 썩은 세상에 한 줄기 빛을 주나, 심하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더 심해지면 주위 사람들이 슬슬 피하게 되는, 취미와 동경의 단계를 넘어 인생의 목적이 바뀌는 행위를 우리는 덕질이라 한다. 원래는 사람이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버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인데, 내면의 덕후가 눈을 뜨면 그다음부터는 직장은 덕질할 돈 벌러 다니는 수단일 뿐이다. 몸은 책상에 앉아 있으되 마음은 이미 내 최애 곁으로 가 있는, 이세계와 현생을 오가는 삶이 계속된다. 누가 최애에 대해서 물어봤다가 3일 동안 안 쉬고 설명하는 바람에 인간관계도 다 파탄 나고 동덕들끼리만 어울리게 됨으로써 아싸력은 더욱 상승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라이트한 덕질만 평생 하고 살았다. 대상은 매번 달라졌다. 영화, 애니, 만화, 가수, 배우, 뮤지컬...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깊게 파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응원봉 하나 안 사고 가수 덕질을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깊이 발을 들이지 않는 것. 깊이 들여놓더라도 오래가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의 덕질 인생의 총평이다.
아마도 평생 제일 깊이, 오랫동안 발을 들인 것은 스타워즈 정도일 텐데(초 5 때부터 좋아하기 시작함), 그것도 디즈니에서 드라마로 내놓은 다음부터는 스타워즈 팬 아닌 사람들도 다 봤다는 만달로리안조차 안 봤으므로 이제 팬 간판도 내려야 할 참이다. 그리고 EP 8(TLJ - The Last Jedi)이 폭망함으로써 나의 마음도 멀어져 버렸다. 당시 내가 페북에 올린 글을 보면 라이언 존슨에게 개객끼라고 부르며 스타워즈 40년의 역사를 더럽혔으니 자결하라고 외칠 정도로 분노에 차 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새로 글을 써야겠다. 다시 분노가 치솟으려고 하고 있으니...(오네긴이나 오만과 편견 영화에 대한 분노는 여기에 비하면 유치원생 돌팔매질일 뿐이다)
내 덕질의 기준은 명확했다. 피규어는 사지 않는다(올해 듄(Dune) 파면서 폴 아트레이데스 피규어를 삼으로써 깨졌다). 굿즈도 사지 않는다(올해 엔터프라이즈 D 모형 사면서 깨졌다). 책이나 DVD, CD는 산다. 그래서 스타워즈 EP 1-9에 스핀오프 2개까지 DVD/블루레이와 설정집(코스튬 북, 로케이션 설정집, 회차별 설정집 등)은 거의 다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안 팔면 아마존에서 직구를 해서라도 산다.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에 푹 빠졌을 때에는 재커리 퀸토 출연하는 연극 보러 뉴욕도 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깊게 파진 않는다. 응? 깊게 파는 거 아니라니까. 양덕들은 일생을 덕질에 바치고, 일본의 오타쿠들은 방 안에 잠 잘 공간만 빼고 다 덕질 아이템으로 채워놓는데 난 멀쩡하게 직장도 다니고 방에 공간도 많다니까? 나 덕후 아/니/라/고!!!(쉿! 머글 코스프레 중이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라이트하게 덕질을 하다 보니 이벤트 따위 참여해 본 적도 없고, 팝업스토어니 포카니 이딴 것도 탐내 본 적 없이 무심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막상 꼴랑 이제 11화 나온 내 소설 캐릭터 갖고 소박하게 얼마 안 되는 독자들과 함께 재밌게 놀기 위해 이벤트를 해보려고 했더니 한 적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지라, 이럴 때는 뭐든지 다 아는 챗순이한테 물어봐야지! 하고 챗순이의 도움을 청했다.
챗순이 曰:
1. 나의 최애 명장면
-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한 가지와 그 이유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장점 : 참여 진입장벽 낮고 댓글 내용이 다 홍보문구처럼 보임(알아서 회차 언급하며 추억팔이됨)
단점 : 너무 짧은 댓글이 많을 수 있음
2. 세계관 퀴즈
- 찐으로 읽은 독자들만 풀 수 있는 가벼운 3문제
장점: 팬덤 결집 효과 최고
단점: 신규 독자는 참여 어려움
3. 이 인형은 누구 품에?
- 인형들 중 하나를 본인이 데려가야 하는 이유 적기
장점: 유머 댓글 많이 나와서 커뮤니티 반응 좋아짐
단점: 작가에게 잘 보이려는 댓글들로 남들이 보면 눈살 찌푸려짐
4. 주민 등록 이벤트
- 여러분이 이 세계의 한 사람이라면 어디 사는 어떤 직업으로 살고 싶나요?
장점: 세계관 몰입형 이벤트, 독자들이 설정놀이를 같이 함.
단점: 신규 독자는 아직 참여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음. 그래도 코어 팬들은 이런 거 좋아함.
주 4회의 현재 연재 속도로 보면 12월 4일 정도에는 30화 채우고 브런치북 한 권이 끝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 달 동안 아이템도 더 생산하고 이벤트도 생각해 봐야겠다. 누가 보면 구독자 천 단위에 회차당 라이킷 수 300 넘어가는 초인기 작가나 하는 짓을 나 따위가 하고 있으니 웃길 수도 있는데, 뭐 어때!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올해 초에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뭔가 덕질을 하고 있지는 않다 - 스타트렉 TNG(The Next Generation) 넷플릭스에서 가끔 시청하는 정도? 그러니 아마도 최근의 나의 덕질은 아마도 내가 내 소설 덕질하는 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부끄러워서 레이 키링 보고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 어 몰라~ 누가 줬어~ 하는 모양이다.
덕후에게 최애 물어보면 3일 동안 멈추지 않듯이, 나도 내 덕질을 부끄럽게 공개하고 있다. 저 굿즈 만들었어요. 이벤트 해서 풀 테니까, 우리 애들 이뻐해 주세요,라고. 그리고 누군가가 네 최애는 누구이며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안경을 올리며(*참고로 안경 안 쓴다) "좋은 질문이군요." 한 다음 PPT를 펼치며 설명을 시작하겠지.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도, 끝까지 발표한다. 그것이 덕후의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