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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Wraith

개그 판타지 작가로서의 첫걸음

by 마봉 드 포레

● wraith /reɪθ/ — 유령, 망령


생각해 보자.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방구석에서 그만 뒹굴러 다니고 좀 나가 놀라고 할 때도 집에서 책만 봤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종이(당시에는 흰 종이는 없었고 갱지라는 누리끼리한 종이가 있었다)에 연필이나 볼펜으로 책에서 읽은 걸 흉내 내서 글을 쓰거나 만화를 그렸다.


아마 만화가 더 먼저였던 것 같다. 왜냐면 만화가 더 재밌으니까! 그리고 초딩들은 다 만화를 좋아하니까! 근데 나는 그림에 소질이 0.0000001 도 없었다. 아마 부모님이 적성을 나눠주실 때 미술 적성은 동생들한테만 나눠주시고 나한테는 까먹고 안 주신 것 같다. 동생들은 다 미술을 했는데, 나는 아직도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졸라맨밖에 못 그린다. 우표도 똑바로 못 붙일 정도로 똥손이다. 그러면 나만 글을 잘 쓴다거나 해야 형평성이 맞을 텐데, 그것도 아니어서 우리 셋 중에 책 안 내본 사람은 나밖에 없다. 물론 한놈은 일러스트 동화책, 한놈은 학술서지만.


생각해 보니 매우 불공평하고 기분이 나빠서 부모님한테 전화 한 통 하고 와야겠다.


(욕만 처먹고 돌아옴)


아직 내가 그림을 더럽게 못 그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시절,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아, 솔직하게 말하자, 난 초등학생이었던 적이 없다. 국민학생이었지. 아무튼, 국민학교 1학년때, 동네 백화점 옥상에 여름방학 특별 행사로 '귀신의 집'이 생겼다. 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엄마가 아이들은 그런 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보라고 돈을 주셨다. 그 돈 갖고 과자나 사 먹을 걸, 정직한 나는 또 그걸 갖고 귀신의 집엘 갔네.


귀신의 집은 검은 천막을 두른 겁나 허접스러운 가건물이었다. 그래도 이런 촌동네(*인천이다)에 귀신의 집이 생긴다는 소식에 온 동네 부모들과 애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줄을 서서 앞사람 어깨를 잡고 기차놀이 하듯이 들어가면 어두운 데서 왁! 하고 귀신이 튀어나오는, 귀신이 무서운 건지 왁! 소리가 무서운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귀신 때문에 지르는 비명인지 다른 사람 비명에 놀라서 지르는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몇 번 지르다 보니, 나는 앞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앞줄 사람들이 아주 도망치듯이 달려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귀신의 집이다 보니 깜깜했기 때문이다.


내 뒤에는 애들만 있는 게 아니라 어른들도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벽에 달라붙어 다들 여기요 저기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았다.


"여기요~ 여기에요~"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갑자기 귀신의 집 벽(?) 즉 검은 커튼이 열리며 가벽과 문이 나타났다. 직원이 짠! 하고 나타났다. 우리는 다들 "살았다!"하고 그 직원을 따라갔다. 직원은 가벽 사이의 문으로 사람들을 소몰이하듯이 안내했다. 나와 보니 다시 백화점 옥상이었다(당연하지).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오늘 겪은 일을 식구들한테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듣고 엄마가 물으셨다.


"그럼 나머지 못 본 데는?"


"......"


그렇다. 나는(그리고 내 뒤에 있던 사람들도) 귀신의 집 중간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같은 돈 내고 반밖에 못 본 채 나와 버렸던 것이다.


아니 그럼 문으로 안내해 줄 게 아니라 이쪽으로 가시면 처녀귀신이에요! 하고 말해 주면 좋았잖아. 왜 그냥 중간에 빼 준 거냐고. 그렇다고 못 본 구간만큼 환불을 해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행히(?) 나만 돈 날린 게 아니라는 사실(나만 ㅈ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은 인생의 많은 슬픔을 덮어 준다. 초딩의 인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에 안도한 나는 그날 일을 만화로 그렸다(물론 남아 있지는 않다). 우리 어무니는 그 만화를 보고 너무너무 웃기다고 하셨다.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라, 못 그렸는데(물론 못 그렸다고 대놓고 평하진 않으셨다) 표정이 너무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벽에 붙어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모습이. 그리고 갑자기 벽이 열리면서 직원이 나와서 나오세요 나오세요! 하는 장면이.


그리고, 환불해달라고 말도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초딩국딩의 모습이.


아마도, 이때부터 나는 개그 작가 비슷한 것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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