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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님이 뭘 잘못했다고 몰아내려는 거냐 이놈들아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by 마봉 드 포레

시작하기에 앞서, 이 영화 개봉한지도 오래 됐으니 트레일러라도 보고 가자.

(영상 출처: 유튜브 Rotten Tomatoes Classic Trailers @RottenTomatoesCLASSICTRAILERS)

나니아 연대기 1화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C.S. 루이스 원작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연대기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이다.


이 영화를 개봉 당시 두 번이나 영화관 가서 봤으니 누가 보면 내가 이 영화 진짜 좋아하는 줄 알 것 같은데(집에 DVD도 있다. 내가 보려고 산 건 아니다 진짜다) 사실 이 글은 영화 까는 글이다. 왜 까일 만 한지 알아보자.


청빈하고 검소한 여왕님이 다스리는 나니아

시공과 성별을 초월한 훌륭한 올란도를 보여주신 틸다 스윈튼 언니가 이번에도 제대로 여왕님을 해 주셨다. 아무리 봐도 훌륭한 지도자이신데 대체 뭐가 어쩐다고 저분을 몰아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사악한 마녀라고 보기에는 너무 청빈하고 검소하시다. 한 나라를 사악한 얼음의 마법으로 아아를 말아 드신 위대한 여왕님의 행차는 청빈하고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데리고 다니는 하인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맨날 화가 나 있는 난쟁이 하나밖에 없는 데다가(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이것도 저것도 다 자기가 다 해야 하는 중소기업 직원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이 난쟁이가 화가 많을 만하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썰매도 다이*에서 파는 옆나라 제작 주물 맥주잔이 생각나는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여왕님이라면 좀 더 화려한 행차를 하셔야 하는 것이 아닌지...


무서운 마녀가 사는 으리으리한 성 - 검소한데?

castle.jpg 원근감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여왕님의 성. 별로 위압감도 안 느껴진다. 마녀 성이 이정도면 엘사는 대마녀다.

사실 이 장면에서 제일 세트장에 박아놓은 미니어처 티가 났다. 아이들하고 비버가 언덕에 서서 성을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인데 원근감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 무릇 최종 보스급이 사는 곳은 멀찍이서 봐도 대단히 크고 웅장하며 악의 기운이 사방 100미터를 에워싸고 있어 근접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주 견고하고 럭셔리해야 하는데...


여왕님의 성은... 그냥 쭉 걸어가도 아무도 안 막을 것 같이 생겼다.

얼음 궁전 내부는 가장 큰 중앙 홀조차도 휑뎅그렁 가구하나 없이 청빈했다. 상주하며 시중을 들고 있어야 할 시종들도 없고, 모든 일은 난쟁이 시종(아까 걔 맞다) 하나가 전천후로 도맡아 하고 있었다. 사람 쓸 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데리고 오는 족족 다 얼려버려서 그런 것인지 난쟁이 한 놈이 혼자서 마차도 몰고 시중도 들고 궁전 내부 다 돌보고... 진짜 불쌍했다.


게다가 여왕님 옷은 전투복 이외엔 온리 한벌. 망명을 가서도 장면마다 옷을 갈아입으신 아미달라 여왕님(스타워즈 여왕님이다. 모르면 그냥 넘어가자)에 비하면 어찌나 불쌍한지... 나니아를 지배해도 이 정도 살림밖에 못 갖춘다면 애초에 나니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에드먼드가 권력에 눈이 어두워 형제들에게 배신을 때렸어도 얼음 궁전에 들어가서 좀 둘러본 다음에는 마음을 고쳐먹었어야 했다. 딱 봐도 붙어도 뭐 콩고물 떨어질 거 없어 보인다.


초라한 여왕님의 군대

여왕님께서는 전쟁터에도 직접 검 들고나가서 싸우신다!!! 승자의 표시로써 아슬란의 갈기털 갖다 붙여 급조(?)한 전투복, 그것도 불편하게 질질 끌리는 드레스를 입으시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는 듯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것 같은 북극곰들한테 마차, 아니 곰차를 끌게 하신다. 곰이 곰차 몰아 봐야 뭐 얼마나 빨리 가겠는가? 그 정도로 여유가 넘치신다. 그리고 군대를 친히 지휘하시어 근육이 붙은 팔을 휘둘러 아름답고 유연하며 여유 있는 칼놀림으로 적을 제압하셨다.


전쟁씬은 아무래도 박력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아군의 수를 압도적으로 능가하여 헉 하고 숨이 막혀야 할 여왕님의 군대는, 반지의 제왕에서 뉴질랜드 군대까지 풀어 빡세게 화면 꽉꽉 채워 보여줬던 장면과 비교되어 "뭐야~ 저게 다야?" 소리가 나게 했다. 전쟁씬에서 군대가 서 있는 땅바닥이 보이면 이미 틀렸다!


이세계에 갔더니 싼타할아부지가 선물을 주었다

원작자인 루이스는 원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가 나중에 개종한 사람이라 한다. 그리고 나니아 연대기 자체가 성서를 대놓고 표절(?)하고 있는 책이라 '인간 세계도 아닌' 나니아에 사는 툼누스, 옷장이나 악수도 모르는 툼누스가 "벌써 100년째 크리스마스가 없었어요." 하고 얘기할 정도로 크리스마스는 나니아에서도 당연한 명절이었다. 나니아에 종교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세계(異世界)에서 크리스마스는 좀 뜬금없었다.


그런데 선물이 다 중국산인가 봐요.

소품에 돈을 100만 원만 더 쓰지 그랬니. 아이들에게 싼타할아부지가 준 선물들은 아파트 재활용 수거장에서 줏어다 줬대도 믿을 만큼 허접했다. 특히 수잔이 받은 화살은 아무리 봐도 From. 다이* 같았고, 루시가 받은 정체 모를 물약병도 합성피혁 같은 가죽케이스에 들어있었다. 트레일러에서 애들이 몸에 걸치고 있으니 위로 스크롤 올려서 트레일러 다시 한번 보도록 하자.


전쟁 피해서 왔더니 대장 돼서 싸우라고 한다

(이세계물 웹소설 제목 같다)

자, 이제 전쟁 얘기를 해보자.


아슬란이 죽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게스트 넘버원에서 총대장이 되어버린 큰아들 피터.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피해서 집을 떠났어요." 하며 수잔이 강력하게 전쟁에 말려들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피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런던에서 엄마가 헬프더칠드런 미아방지 이름표 달아주고 애들끼리 기차 태워 보낼 때, 자기 나이랑 비슷한데 군복 입고 지나가는 형아들을 보고 피터는 자기도(아버지처럼) 나가서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거다. 총과 대포와 전투기는 없지만 이쪽도 소년의 로망인 말 타고 칼 휘두르는 전쟁. 누이들이 드레스를 입어보고 가슴이 설레는 것처럼 피터와 에드먼드도 말 타고 칼 뽑으며 두근두근했을 테지. 하지만 그것도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느 정도 있을 때뿐이다.


제대로 칼싸움 연습도 못해보고 최종 전투 선두에 선 피터. 예언에 나온 왕이 될 아이이므로 대충 싸워도 주인공 버프 받아 중간은 가겠지. 여왕님은 검을 두 개나 휘두르시면서 분명히 이 어설픈 왕을 죽일 기회가 열 번은 있었지만 마치 애 검술 수련 시켜 주시듯이 여유롭게 대적해 주셨다.


솔선수범, 공명정대한 여왕님

패배해서 죽을 때까지도 표정하나 안 변하고 눈깜짝도 안 하시던 우리 여왕님으로 다시 돌아가서.


여왕이나 왕, 그것도 나쁜 놈 최종보스면 왠지 말도 굉장히 사악하고 목소리도 그렁그렁 울릴 것 같은데, 이 여왕은 말투가 참 특이했다. '빠르고', '가벼운' 말투. 성질은 생각보다 굉장히 급한 것 같으면서도 톡 쏘며 자신감이 넘치고 대중 앞에서 말할 때는 아주 선동적으로 말한다. 전쟁 지휘는 물론이고 아슬란 처형 같은 제일 아랫것(망나니)이나 해야 하는 일도 자기 손으로 직접 하시는, 위아래 안 따지시는 공정하신 윗사람, 내 일은 내가 하는 자립적 정신의 소유자.


이렇게 공명정대하신 여왕님이 뭐 어쩐다고 자꾸 몰아내려는지 모르겠다.


눈과 얼음으로 다 덮어버려서? 백성들 막 얼려버려서?


추운 나라에도 다 사람 살아 이것들아. 항상 기후변화에 대비했어야지.


여왕님의 출신 분석

유일하게 데리고 다니는 하인이 아슬란의 진영에 들어서며 물렀거라~ 할 때 말하기를 '나니아의 군주이시자 론 제도의 황후'라고 한걸 보면 여왕님께서 실은 나니아 말고 다른 데서 오신 외지인 출신이시며 기혼 여성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지금 생각해 보니 황후가 아니라 여황제를 잘못 번역한 것 같다).


자기네 백성을 사냥하는 잔혹한 왕들

어린이용 소설 원작이라 그런지 여차저차 우리 편이 승리하고 아이들은 모두 왕이 된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것 같은 나라를 네 쪽을 내서 나눠 주는 줄 알았더니 한 나라에 왕이 넷이구마. 저 어린것들이 뭘 알고 통치를 할지 모르지만(나라 망하기 딱 좋다), 암튼 일이 다 정리된 후 아슬란은 또다시 떠나버리고, 전쟁의 충격으로 인간 세계의 기억을 잃은 건지 아니면 왕 노릇 좀 해 보니 생각보다 너무 개꿀이라 돌아갈 생각이 안 드는지, 애들은 큰아이인 피터가 애아빠처럼 보일 정도로 나이 먹을 때까지 노니노니 하며 나니아를 다스리고 산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네 명의 왕들이 흰 사슴을 사냥한다.


충. 격.


인간에게 있어서는 동물이 '기르고 타고 먹고 가죽 벗겨 입고 다니는' 생물들이지만 나니아에서는 비버도 말을 하고 타고 다니는 말조차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는 지능생물인데 어찌하여 사슴을 사냥한단 말이더냐? 그것도 여왕 쪽에 붙어서 나쁜 짓 해 먹던 늑대나 코뿔소나 곰 같은 '나쁜 동물들'도 아닌 '흰 사슴'을...!!!


하기사, 잊어서는 아니 된다. 아이들은 이 세계로 들어올 때, '모피코트(인조 아님)'를 입고 왔다는 사실을...

얘네들이 너네 동료 가죽 벗겨 만든 모피코트 입고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나니아의 주민들아. 저놈들은 왕 된 다음에는 백성을 사냥거리로 여기는 놈들이라는 것을.


권력은 돌고 돈다

나쁜(내 눈엔 뭐가 나쁜지 모르겠지만) 마녀 여왕이 다스리던 나니아에 예언의 소년소녀 왕들이 나타나 마녀를 물리쳤다고 해서 새 세상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권력 좀 잡더니 애들 하는 거 봤지? 자기네 백성인 사슴을 사냥하잖아, 아이 끔찍해!


아니면 차라리 여왕님 도로 불러오던가! 그분은 그래도 공평하게 못되게 굴었다고.


이렇듯, 고만고만한 지배자들이 돌아가며 지배하는 나니아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빌며,

이 글을 마친다.


DEC07-lion-witch-wardrobe-TDID1180x600-780x440.jpg 이미지 출처: d23.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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