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국 먹고 코코 마드모아젤 뿌린 여자의 최후우우웁
전편 안 읽으신 분들은 전편 먼저 보시긔
그것은 좀벌레였다.
사실 난 좀벌레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새끼들을 집안에 들이면 어떻게 되는지도...
같이 일하는 직원 중 하나가 가족과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펜션 라탄 의자에서 실수로 좀벌레를 데리고 집에 온 후, 그 집은 정★벅★ 되었다. 얘네들이 벽지 사이와 걸레받이 틈을 이용해 온 집안에 퍼지고 옷장에 들어가면 천연섬유 특히 양모 섬유를 갉아먹기 때문에 그 직원은 집안의 모든 가구를 벽에서 한 걸음 끌어내고, 옷도 다 꺼내서 세탁소로 보내고, 세스코 불러서 온 집안을 소독하고, 소독이 가라앉는 동안 다른 집에 피난을 가야만 했다.
"안돼! 절대 안 돼! 죽어도 저놈들을 우리 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어!"
일단 보이는 것은 잡았다. 하지만 방 안에 펼쳐둔 내 가방과 옷들은 어쩌지? 이미 우리 집에 같이 가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면?
나는 그 밤중에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부엌과 방 안 구석구석을 비추면서 돌아다녔다. 식탁 근처에서 두 마리를 더 잡았다. 오 마이 갓. 이 숙소는 좀벌레로 꽉 차 있음에 틀림없어! 난 당장 방에 있는 내 가방과 옷걸이에 걸어둔 내 옷을 탈탈 털었다. 혹시 이미 기어들어간 놈이 있다면 튀어나오라고 옷과 바닥 사이에 철썩!!! 소리가 나도록 패대기를 쳤다. 오밤중에 그 생지랄을 하고 나니 정신도 맑아지고 참 좋았다.
그렇게, 제주도의 밤은 깊어만 갔다.
제주도~ 푸른 밤~♪
철썩!(파도소리 아님) 철썩!
다음날, 제주시로 올라가 친구 먼저 공항에 내려준 후,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사무실 사람들에게 돌릴 과자라도 사기 위해 이마트로 향했다. 오늘따라 주차장도 참 쾌적하고 넓어 보인다 생각하고 룰루랄라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오늘은 휴무일입니다
Aㅏ.....
어쩐지 주차장이 휑하더라니...
나처럼 신나서 들어왔다가 빽스텝하는 차들을 보니 나만 븅신짓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항상 그렇지만 내 인생만 ㅈ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은 세상살이를 조금 더 부드럽게 해 준다.
바로 근처에 다행히 동문시장이 있었다. 재래시장은 복잡해서 안 가려고 했는데 시간도 많이 남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동문시장 주차장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선 차들의 행렬에 끼어 인생이란 대체 뭘까 생각했다. 아침에 숙소에서 준 토스트와 계란후라이 한쪽 말고는 먹은 것도 없고, 서귀포에서 제주시까지 운전에, 이마트는 허탕에, 발은 망할 놈의 통굽 구두 때문에 피곤하고(반드시 내다 버려야지), 주차장에 차는 또 왜 이리 많아.
마지막으로 동문시장에 온 게 언제더라? 엄마랑 같이 제주도 놀러 왔다가 동문시장에서 파는 양배추가 너무 실해 보여서 안 살 수가 없다며 동네 마트에서도 구할 수 있는 양배추, 구좌당근, 그리고 속이 꽉 차있는 양파까지 알차게 장 봐 갖고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우리가 이번에는 집에서 김포공항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여행 이후로는 안 온 것 같다. 그때 우리 집이 반대편 종점인 버스를 타러 계양역까지 공항철도를 타고 그 무거운 양배추와 당근과 양파를 이고 지고 가면서(*카트 없고 캐리어 없음), 대체 우리는 왜 이런 무거운 것들을 무식하게 제주도까지 가서 사 갖고 왔는가, 왜 엄마가 산다고 했을 때 나는 말리지 않았는가, 등등등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하며 삼보 일배보다 더 무거운 걸음을 걸었더랬지.
이번 동문시장은 그때보다 더 관광지화되어 있었고,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팔고 있었다. 나는 다 필요 없고 그저 국밥 한 그릇만 먹는 게 소원이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나눠줄 과자도 고르기 귀찮아 아무거나 사러 갔다. 검증된 오메기떡집에 가서 집 주소 써주고 택배로 보내달라고 한 다음 앱에서 '순대국'을 검색해서 가장 가까운 데로 갔다.
발이 너무너무 아팠다. 발바닥이 타는 통증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배도 고프고 당장 앉아서 국밥 한 그릇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자리 있어요?"
"자리는 있는데 밥이 없어요! 밥이 떨어져서 지금 막 앉혔는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30분?"
안 된다. 30분이면 나는 이미 송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두 번째로 가까운 집으로 향했다. 지도에 통로가 막혀 있는 것처럼 되어 있어서 한 바퀴 돌아갔더니 알고 보니 지름길이 있었다. 욕이 나왔다. 두 번째 순대국집은 테이블이 겨우 세 개 있는 아주 작은 가게였다. 문제는 그래서 자리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 기다리기로 했다. 세 테이블 다 이제 막 먹기 시작했거나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할아버지 한 분은 앞에 소주병도 놓여 있네(금방 안 끝난다는 뜻). 나는 가게 앞 오너즈 프라이빗 체어에 편안히 앉아, 가게 맞은편 포스트-리타이어먼트 레이디즈 마켓 부티크의 크리스털-인스파이어드 버튼과 플로럴 맥시멀리즘 패치워크 디테일이 메종의 아이코닉 DNA로 재해석된, 제주 하이 스트리트 '25 F/W 시니어 쿠튀르 룩을 감상하며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나처럼 배고파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또 나타났다. 테이블 하나가 비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괜찮으시면 합석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사람과 대각선으로 앉아 순대국밥을 먹었다. 그 여자는 로컬이고 여러 번 와본 듯했다. 거침없이 주문하고 물 떠먹고 나중에 자리가 하나 더 비니까 나한테 고맙다고 다시 한번 인사하고 그쪽으로 옮겨갔다.
자, 그러면 순대국밥 얘기를 해 보자.
우리 가족은 내가 3살 때 인천으로 이사 왔다. 당시 우리는 부평시장 근처에 살았는데,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얘한테는 공부 잘하라고 하지 마라(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래라)."라고 할 정도로 허약했다. 면역력이 너무 약해서 감기 돌면 감기 걸려, 폐렴 돌면 폐렴 걸려, 맨~날 병원 가고 맨~날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었다.
그 보상 심리일까? 지금 내가 이렇게 건장하고 아무거나 잘 처먹는 것은. 아무튼, 그때 나는 입 안에 수포가 가득히 나서 입 속이 아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빼빼 말라 맨날 징징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잘 먹고 약 먹어도 나을까 말까인데 안 먹겠다고 계속 울어대니 엄마는 이노무 자식새끼 내다버리고 싶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나를 살린 것은 두 가지였다. 아이스크림(부라보콘?), 그리고 순대국. 아이스크림은 차가우니 입 안에 수포가 생긴 아이도 핥아먹을 수가 있었고. 그거 먹고 조금 정신 차린 아이는 시장에서 파는 순대국(국물만)을 뜨거우니까 살살 식혀갖고 몇 숟가락을 떠먹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밥도 먹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아직도 부평시장에 전해져 내려온다(개뻥).
그 순대국 맛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데 아직도 정확히 재현해 내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뭘 넣어야 그런 맛이 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바닥은 물에 젖어 미끄러운 골목에 고사 지낼 때나 쓰는 진짜 돼지머리들을 갖다 놓은 정육점과 순대집이 있고, 들어가면 순대랑 간을 썰어주고 플라스틱 그릇에 순대국 국물만 담아주던 그 재래시장. 내가 회사 다니기 시작하면서 순대국을 그렇게나 많이 먹으러 다녔는데도 그 맛을 내는 데가 없었다. 어쩌면 그냥 미원이나 다시다 맛이었을지도 모른다. 뭐든 간에 그 맛을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회상 종료.
그런데! 그 맛을 내가 제주 동문시장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상~투스~♪
뭐지, 여긴? 부평시장?
아니구나, 동문시장이네. 휴 타임슬립한 줄 알았다(개오버).
아무튼 맛있었다. 발 아픈 거 다 잊을 정도로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심지어 가격도 착했다. 순대국밥 7천원. 따로국밥 8천원. 2025년에 이런 가격이라니. 또 오고 만다. 꼭 무조건 반드시 절대로. 저 구두 버린 다음에.
자, 떡도 사고 순대국밥도 먹었으니 이제 집에나 가자.
렌터카 반납 OK. 체크인 OK.
면세점도 구경. 지친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향수나 좀 볼까?
오 샤넬이다. 커리어우먼이라면 역시 샤넬이지! 내 비록 샤넬 가방이나 수트는 못 사지만... 향수라면 가능할지도? 시향이라도 해볼까?
"언니~ 여기 이거랑 이거랑 이거 시향 좀..."
"네~ 샤넬 샹스 오 후레쉬, 오 땅드르, 오 비브 시향해 드리겠습니다~"
음~ 뭔지 모르지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기도 하고~ 하며 종이에 한참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왔다.
"저기요. 여자들이 제일 많이 사는 게 뭡니까?"
샤넬 언니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여자분들이 제일 많이 찾으시는 건 여기 있는 코코 마드모아젤입니다. 시향해 보시..."
아저씨는 더 듣지도 않았다. "그거 주세요."
아니 일단 여자분 연령대라도 좀 물어보고 골라 달라고 하지. 다짜고짜 여자들이라니 샤넬은 너무 어린 애들이 쓰면 안 어울린다고! 아무튼 아저씨는 여자들이 제일 많이 산다는 그 향수를, 50ml 한 병에 00만 원이나 하는 코코 마드모아젤을 그냥 아묻따 사갔다.
나는 약간 기가 죽었다. 나도 마! 명색이! 돈 버는 커리어 우먼인데! 샤넬 향수 한병 뙇! 쿨하게 사지를 못하고 말야! 머 어떤 거길래 그래?
아저씨 계산을 도우러 직원이 사라진 틈을 타서 나는 그 여자들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코코 마드모아젤을 손목에 뿌려 보았다.
아~ 이거 딱 그거네 백화점 1층 냄새. 킁킁킁. 뭐 좋긴 좋네. 가격이 0 하나 빠지면 살텐뎅 흥. 비행기나 타러 가자.
잠시 후. 나는 내가 크나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땐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지금 약 부작용으로 속이 메스껍다는 것을.
그리고 내 옷에는 '동문시장 순대국'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것을...
나는 제주공항, 비행기, 김포공항, 집까지 오는 내내 순대국과 코코 마드모아젤이 섞인 냄새에 구역질을 참아야만 했다.
딱 한 번 뿌렸는데...ㅠㅠ
멋진 커리어우먼의 길은 멀고도 힘들다...
제주 여행기 끗.
그래도 제주도 풍경 사진은 몇 장 올립니다.
체류 시간이 워낙 짧아 사진도 몇 장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