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파티에 초대합니다
브런치에는 여행기가 많이 올라온다.
나도 여행기를 하나 연재 중이다. 『백수 스코틀랜드 여행기』일명 『백스여』(줄여서 부르기에는 너무 안 유명하지만, 아무튼).
오사카로 가려고 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라, 후쿠오카에 자리가 없어서였다.
왜냐면, 나는 어딘가를 구경하러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면세점에 가고 싶었다.
면세점 간 지가 너무 오래돼서 면세점에서 뭐 좀 사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면세점에 가본 것은(제주 면세점 제외) 4월에 마일리지 털어서 유럽 여행 갔을 때였다.
근데 그땐 뭘 딱히 대단한 걸 사진 않았다. 뭘 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무것도 안 샀을 수도 있다.
이번에 면세점 타령을 하 된 것은 지난번 통굽구두에 정육점 스커트를 입고 온몸에 순대국 냄새와 샤넬 코코 마드모아젤 냄새를 함께 풍기며 구역질하던 그때부터였다.
제주 면세가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코코 마드모아젤 가격으로 예를 든다면. 제주 면세에서 50ml 살 가격이면 인천공항 면세에서 100ml 살 수 있었다. 물론 코코 마드모아젤을 살 생각은 없었다. 그 향은 영원히 나에게 순대국 냄새로 남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 언젠가 냉장고에서 고기 썩는 냄새를 중화시켜 보겠다고 방향제 대신 뿌렸다가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고기 썩는 냄새로 기억된 베르사체 블루진처럼 말이다.
나는 이번에 향수를 사고 싶었다. 나는 향수를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 가족 봉사 여행으로 다낭에 갈 때, 블라인드로 샀었던 메종 마르지엘라 향수가 죄다 망해버려서(세일해서 두병이나 샀는데 두병 다 망했다) 비싼 방향제로 쓰고 있던지라 이번에는 진짜로 시향 제대로 해보고 사리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찜해놓은 것이 바로 이거였다.
끌로에 향수들은 사실 올리브영에서도 판다(끌로에 노마드 등). 하지만 아뜰리에 드 플뢰르 라인은 디게 비싸고 따라서 올리브영에서는 볼 수 없다. 면세점에서도 비싼 축에 속한다. 문제는 내가 사려던 게 인터넷 면세에 계속 품절로 떠있다는 점이었다.
아뜰리에 드 플뢰르 라인은 단일 꽃 향을 주제로 하는 향수들이다. 자스미넘 삼박, 로사 다마세나, 바이올렛, 매그놀리아 등등등. 그중에서도 내가 원했던 것은 수선화 향이었다.
수선화 향. 나르시서스 포에티쿠스.
나르키소스, 한국이름 ‘나길수’의 유혹을 상징하는 향기이기도 하다(은근슬쩍 글 홍보).
이 이미지의 아름다운 소년이 바로 수선화, 나르키소스 - 나길수다.
내가 비록 평소에는 올리브영에서 산 바디 판타지아 스프레이(한 명에 몇천 원 가격이다. 인공적이긴 해도 향은 좋음)를 쓰긴 하지만, 나도! 마! 돈 버는 커리어 우먼인데(이 소리 하면서 매 주말마다 배달음식 시켜 먹는다) 나도! 니치인가 나치인가(아님) 향수 한번 써 보자! 한 병에 40만 원 넘는다는 펜할리곤스 같은 건 못 사더라도, 그보다 조금 더 아래 가격인 건 살 수 있잖아!(배달음식만 덜 시켜 먹었어도 여러 병 샀다)
나는 12시 비행기인데 무려 8시 반에 도착해서 면세점으로 뛰어들어갔다. 끌로에 매장부터 찾아가서 언니한테 나르시서스 있냐고 물었다.
"그건 단종이에요..."
"품절 아니고, 단종이요?"
"네... 인제 안 나와요."
"창고에도 없어요?"
"이제 안 만들어요ㅜㅜ"
끌로에 누구야, 당장 나와. 왜! 왜! 왜 안 만드는데! 수선화를 못 구해서라고 말하지 마라! 일산 호수공원에도 피는 게 수선화다!(그 수선화로 만드는 거 아님)
나는 쓸쓸히 돌아섰다. 신라에 없으면 신세계에도 가보면 되지. 근데 신세계 면세점에는 끌로에가 아예 없었다. 사실 신라랑 롯데가 라인업이 제일 좋다(고 한다). 나는 무지 쓸쓸한 마음으로 아무거나 시향 했다. 그리고 같은 라인에서 로사 다마세나(다마스커스 장미)를 샀다. 이 향이 다른 장미향에 비해 좋은 점은 진짜 생장미향이라는 것이다. 장미 줄기향까지 안 버리고 다 그대로 처박은 것 같은 진짜 레알 장미향. 킁킁킁. 진짜 장미다 장미.
쓸쓸한 마음으로 향수 코너를 지나가다가 왠지 허전해서(원하던 것을 못 샀기 때문에) 하나를 더 샀다. 바로 휴고 보스의 휴고(Hugo). 큰 금액을 지르고 나니 이건 심지어 싸게 느껴졌다.
젠장, 면세점 돌아다니며 이 향수 저 향수 시향하고 나니 니치도 다 같은 니치가 아니고 그 안에서도 크라쓰가 나뉘었다. 조 말론은 그중에서도 대중적인 라인이고 프레데릭 말이나 펜할리곤스 같은 건 몇 병 사면 월급이 다 없어질 각이다. 대체 이런 미친 가격의 향수들은 누가 사는 거람.
휴고 보스의 스테디셀러인 이 향수는 1995년에 출시되었고 아직도 휴고 보스 향수들 중에 가장 잘 나간다. 아무리 시트러스 우디 등등 배리에이션을 주어 봐도 결국은 다들 이걸로 돌아온다고 한다. 나에게는 맡자마자 95-96년을 떠오르게 하는 마법의 향기다. 군용 수통 모양의 바틀인 것 치고는 독한 아저씨 향도 아니다. 오히려 상큼해서 여자들도 뿌리기에 무리가 없다.
95-96년은 세계사적으로도 나름 괜찮은 시대였다. 우리나라는 IMF 오기 전, 세계적으로는 9/11도 시리아 내전도 ISIS의 본격적인 활동도 아직 한참 먼, 탈레반이 이제 활동을 시작했지만 아직 그 동네 뉴스에서만 나올 뿐이고, 유럽은 아직 난민으로 어지러워지기 전이고, 중국인들은 아직 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지 않았고, 나도 젊었고 날씬했고 아직 세상은 그렇게까지 무섭지만은 않은 곳이었던, 95-96년.
그때 저 휴고 보스 향수가 나오면서 향수 좀 쓴다는 남자들은 죄다 저거만 뿌리고 다녔다. 다른 걸 쓰는 남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단일 향수가 유행을 휩쓸었다. 당시 여자 향수로 유명했던 것들은 디올 듄(Dune), 랑콤 트레졸(Tresor), 엘리자베스 아덴 선플라워(Sunflower - 가격이 저렴해서 진짜 많이들 썼다) 등이었는데 선플라워만 빼고는 무겁고 머리 아픈 서양 여자 향수라 나는 맡는 순간 구역질이었다(후각이 진짜 예민하고 싫어하는 향은 견디지 못한다).
반면 시원한 남자향수인 휴고는 여자인 나도 좋아했다. 하지만 직접 산 것은 30년 후인 2025년, 그러니까 바로 어제가 처음이었다. 뿌려보는 순간, 젊었던 그 시절, 지금보다 몸무게 20kg 이상 덜 나가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흑흑흑...)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젊은 시절, 평화롭던 세계...
오사카에 도착했다. 하지만 시내에는 가지 않는다. 애초부터 나는 시내에 나갈 생각이 0.0001도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다 건너 링쿠 타운 가서 쇼핑만 하고 다시 공항으로 돌아와 하룻밤 자고(숙소도 공항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비행기 타고 돌아오는 게 이번 일정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공항에서 지하철 타고 영종도 운서역까지만 갔다가 다시 인천공항 앞에 있는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 타는 일정 되시겠다.
하지만 링쿠 타운에는 아울렛이 있었다. 우리 집 근처 시흥 아울렛이나 송현아도 안 가는 내가 뭔 놈의 일본에서 아울렛이람. 하지만 아울렛은 아울렛만의 흥이라는 게 있다. 왠지 하와이를 떠올리게 하는 오픈된 인테리어와, 그리고 링쿠 타운은 특히 근처에 관람차가 있어서 왠지 애상(?)에 젖게 한다.
열린 마음과 여러 장의 카드가 있는데도 살 게 없네(주의: 카드는 돈이 아닙니다. 빚입니다).
젠장...
갭(Gap) 매장에 가면 예전에는 그래도 후드티라도 좀 살게 있었는데 추리닝 스커트를 내가 이돈주고 사느니 우리 동네 전위적인 옷 파는 옷가게에서 옷가게 사장님 매상이나 올려주고 말겠다.
누가 뭐 사다 달라고 한 것도 있어서 가긴 가는데, 뭐 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웬만한 건 다 세계과자 전문점 같은 데서 파니까...
라고 생각하며 동키 문을 열고 들어간 후...
어? 시간 순삭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일본에서 라멘을 처음 먹은 것은 규슈였다. 돼지 뼈국물 진하게 고아 끓인 규슈 스타일 라멘부터 시작했더니 국물 진한 돈코츠 라멘만 라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사 먹은 라멘은 도톤보리 가무쿠라라는 가게의, 관서지방 스타일도 아니고 그냥 이 가게만의 스타일이라고 하는, 배추와 양배추를 오래 푹 끓여 야채로 단맛을 낸 맑은 국물의 라멘이었다. 배추도 양배추도 둘 다 환장하는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게다가 이건 먹고 나서도 미친 듯이 물을 들이켜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속이 편했다. 차슈는 있어도 안 먹게 될 만큼 야채만 갖고도 너무나 맛이 풍부했다. 나는 도착한 날 저녁과 출발일 아침 두 번 식사를 다 이 집 야채라멘으로 먹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불행한 일은, 한국에서는 이런 라멘을 안 판다는 것. 나는 어쩌면 이 라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다시 여기 올 지도 모르겠다.
다행한 일은, 공항에서도 팔기 때문에 도착해서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일본 입국 절차가 너무 그지 같아서, 다시 올 엄두는 나지 않는다.
간사이 공항 동선은 정말 최악이고, 입국 절차는 비지트 재팬 웹사이트에 등록은 도대체 뭐 때문에 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덕분에 출국절차는 빨랐다) 거지 같았다. 줄 서다 시간 다 날려먹고 입국장 빠져나왔을 때는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라멘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그 짓 다시 할 자신은 솔직히 없다.
슬슬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니 다음달 카드값도 걱정되고...
내 손에는 향수 두 병과 엄청난 과자(저거 많아 보여도 여기저기 돌리고 나면 순삭이다)와 사진에 차마 올리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 그리고 라멘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이런 아무 생각없는 여행은 앞으로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와 이런다고? 억지로 짜맞추기 너무 심한거 아니오?).
다른 작가님들은 다시는 안 그러기 파티를 대체 어떻게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았던 쇼핑여행 후기 겸, 다시는 안 그러기 글 올리기 겸(일명 일타쌍피라고 한다)
이 글을 올린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