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사람이 나타났다!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잠에서 깬 레이첵은 아직도 천장이 그 천장임을 깨닫고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너무 오래 잔 것 같았다. 몸은 아직 욱신욱신 쑤시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몸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레이첵은 팔꿈치로 지탱하여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아줌마의 집에서 빨리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과부가 자신을 물에서 건졌다면 이곳은 강가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일 것이다. 마을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세라비와 레이 형님도 찾아야 했다.
레이첵은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해가 기울어가는 하늘은 언제 비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쳤었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과부네 집 마당에 지은 수호령님 사당 양쪽에 심어놓은 산사나무 잎사귀를 타고 빗물이 반짝반짝 방울지어 떨어졌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과부의 집과 광, 수호령을 모시는 사당(레이첵은 그게 뭐 하는 곳인지 몰랐다) 그리고 외양간이 있었으며 울타리 밖에는 채소밭이 펼쳐져 있었다. 집 옆에 밤나무 세 그루가 있고 오솔길 하나가 집 앞을 가로질러 쭉 나 있는 것만 빼면 주변에는 집도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첵은 어디로 가야 마을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외양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외양간 그늘에서 염소 한 마리가 딴생각하지 말라는 듯 레이첵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이첵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때 집에 막 돌아온 과부가 레이첵을 발견했다.
“여보! 바람이 찬데 왜 밖에 나와있어! 어서 집에 들어가자!”
눈 깜짝할 새 레이첵은 도로 오두막 안에 끌려들어 와 있었다. 레이첵은 또다시 절망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먼저 파악해야만 했다. 침대에 넣어주기 위해 가죽 주머니에 물을 끓여 담고 있는 과부에게 레이첵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보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과부는 레이첵을 돌아보았다. “여보, 당신이 나한테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이렇게 돌아와 줬으니 난 괜찮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을 좀…” 레이첵은 아줌마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과부는 레이첵을 도로 침대로 밀어 넣고 뜨거운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넣어 준 후, 방구석에 있는 의자를 가지고 와서 침대 곁에 앉아 십 년 전에 일어난 일부터 자신이 어떻게 수호령님께 치성을 드리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보답으로 이렇게 남편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친 사람이구나…’ 레이첵은 모든 것을 깨닫고 속으로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남편이 죽은 것을 못 받아들이고 혼자 살다가 미친 사람이구나. 구조되어도 하필 이런 사람에게 구조되다니…’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한데, 전 아주머님의 남편이 아닙니다.”하고 레이첵은 과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레이라고 하고요.” 레이첵은 무심코 이카리아라고 하려다가 정정했다. “…브레스부르에서 온 레이라고 합니다. 스무 살이구요. 여행 중에 배가 부서져서 물에 빠진…”
“여보,” 과부가 부드럽게 레이첵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파서 꿈을 꾼 걸 거야. 기억도 다시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봐봐, 당신이 원래 입던 옷도 이렇게 잘 맞잖아?”
레이첵이 입고 있는 낯선 옷은 실제로 대략 잘 맞기는 했으므로, 레이첵은 과부의 남편 체격이 자기와 비슷했고 그래서 과부가 더더욱 자신을 남편이 살아 돌아온 거라고 믿는 거라고 추측했다.
“제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은요?”하고 레이첵은 물었다. 과부는 방 한구석 천장을 가리켰다. 레이첵이 입고 온 옷이 잘 빨아져 빨랫줄에 널려 있었다.
“다른 건 없었나요?” 레이첵은 다시 물었다. 과부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첵은 목숨만큼 소중한 자신의 기록장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그 기록을 하기 위해 따라온 여행길인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그러나 상관없었다. 레이첵은 그 기록장을 수십 번도 더 읽었기 때문에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기록장에 쓰인 내용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다시 새로 쓸 수 있었다. 우선 여길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해가 지고 방 안이 어두워지자 과부는 난로에 불을 더 지피고 나무들보에 평소에 안 쓰고 아껴 놓았던 램프를 걸었다. 레이첵은 과부가 끓여주는 감자 수프를 먹고 침대에 기대앉아 과부가 실타래와 바늘이 든 바구니를 가지고 와서 이젠 다 마른 레이첵의 옷을 꿰매고 기우고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과부는 바느질이 빠르고 솜씨도 좋았다. 과부는 바느질을 하면서 자신과 남편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와 라피드 쉬르쿠젤에 와서 같이 집을 짓고 밭을 일구기 시작한 이야기, 돈을 모아 처음으로 소를 사고 염소를 사서 기뻐했던 이야기 등을 해 주었다. 레이첵은 과부가 여전히 무서우면서도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윽고 과부의 이야기는 남편이 물에 휩쓸려 갔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과부는 여울의 수호령님께서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강가에 나와 치성을 드린 보상으로 남편(레이첵)을 돌려보내 주셨으며 레이첵이 입고 있던 좋은 옷도 수호령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램프와 난로의 장작불로 방 안은 밝고 따뜻했다. 과부는 십 년 만에 이 집 안에 자신 말고 누군가가 더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는지 레이첵의 옷을 다 고치고 마을에서 얻어온 짚으로 자리를 짜면서 옛날 일을 계속해서 레이첵에게 얘기해 주었다. 과부가 잠들면 집에서 탈출하려고 졸음을 참고 있던 레이첵은 과부가 너무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바람에 혹시 자신이 정말로 기억을 잃었고 이카레이유와 세라비 누나에 대한 기억은 모두 꿈꾼 것이며 자신이 십 년 전 모습 그대로 수호령님이 돌려보내 준 과부의 남편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물어볼 다른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내 정신까지 의심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레이첵은 생각했다. 그러나 과부는 레이첵을 밖에 내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이첵은 오늘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등 밑으로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져 레이첵은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딱딱하고 길고 얇은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것은 아마도 과부가 레이첵의 옷을 갈아입히는 도중 떨어져 침대 속에 굴러들어갔을, 레이첵이 기록장과 함께 목숨처럼 소중히 지니고 다니던 금펜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카레이유에 있는 왕실 납품 상회에서 특별히 각인까지 해서 사 갖고 온 펜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손으로 만져보며 레이첵은 속으로 안도했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레이첵은 생각했다. ‘이카레이유와 세라비 누나에 대한 기억도 모두 사실이다. 이곳을 나가야 해.’
레이첵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잠이 깼다. 과부가 문을 열고 누군가를 집 안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의사는 방앗간집 아이가 좀 괜찮아진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도 들리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과부네 집으로 바로 온 것이었다. 과부는 레이첵이 잠들면서 껐던 램프를 다시 켜고 레이첵을 의사에게 보였다.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제 겨우 스물이나 되어 보이는 청초한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 과부를 돌아보았다.
“고향에서 조카가 놀러 왔나?” 의사가 물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의사양반!” 과부가 레이첵이 깰까 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수호령님이 돌려주신 우리 서방이라고 어제 얘기했잖소!”
“누구네 집 멀쩡한 아들놈을 건져와서 서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겐가! 가족들이 걱정할 테니 낫는 대로 빨리 돌려보내 주게!”
레이첵은 눈을 감은 채로 아직 자는 척하며 이 대화를 듣고 크게 안도했다. 드디어 정상적인 사람을 만났다! 의사양반이라고 하는 걸 보니 마을에서 의사를 불러온 것이 틀림없었다.
의사는 미친 데는 약도 없는데 어쩌냐고 중얼중얼하며 레이첵의 맥도 짚어보고, 아직 자는 척하는 레이첵을 깨워 기침도 해보게 하고, 팔다리도 움직여보게 했다. 마지막으로 떠내려오다 쓸리고 긁힌 상처에 약도 발라 주었다. 그리고는 과부에게 뭔가를 잔뜩 불러주더니 지금 당장 광에 다녀오라고 내보냈다.
과부가 나가자, 의사는 레이첵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좀 어떤가? 앞으로 며칠 쉬고 영양보충 잘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걸세.”
“여긴 어딘가요? 저분은 대체 누구세요?”
“여긴 라피드 쉬르쿠젤일세. 저 여자는 이 마을에 사는 과부인데 남편 잃은 지 십 년이 넘어가다 보니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자네를 죽은 자기 서방이 돌아온 거라고 하더구만.”
“제가 아무리 아니라도 말해도 믿지를 않아요.” 레이첵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의사에게 말했다. “여기 저 말고 구조된 사람은 또 없나요? 저희 세 명이 같이 배를 타고 왔거든요…”
“마을에 가면 찾아보겠네. 친구들 이름이 뭔가?”
“제 사촌누나고 이름은 세라비예요. 다른 사람은 마법사인데 이름은 레이고요.” 레이첵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제 이름은 레이 세르비카예요.”
“처음 듣는 성이로군. 집은 어딘가? 어디에 연락하면 되나?”
“브레스부르의 수도원이요. 그전에 혹시라도 마을에 누나랑 레이 형님이 구조되었는지 알아봐 주세요.”
“브레스부르라니 멀리서도 왔구만. 이번 같은 폭우면 구조되기 힘들었을 텐데. 자네는 운이 좋았네. 자네 누님이나 형님도 운이 좋았으면 좋겠지만…” 라피드 쉬르쿠젤에 살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만 수십 명을 봐 온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각오는 하고 있는 게 좋을 걸세.”
“아니에요. 살아 있을 거예요.” 레이첵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아나?”
“제가 구조되었는데 누나나 레이 형님이 안 살아있을 리가 없어요.”
“가족들이 꽤 튼튼한가 보구만.”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레이첵에게 무언가 더 얘기하려고 했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광에서 돌아온 과부가 등 뒤에서 의사를 세게 내리쳤기 때문이다. 의사는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레이첵은 비명을 질렀다. 과부는 힘없이 축 늘어진 의사를 질질 끌고 가서 다락방에 처넣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레이첵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여보.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은 내가 다 만들어 줄 테니까 당신도 곧 나을 거야!”
“죽였나요?” 레이첵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의사 선생님 죽은 거예요?”
“당신 다 나을 때까지는 여기 둘 거야.” 과부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부엌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아까 의사가 잔뜩 불러준 재료를 다 그러모으더니 씻고 자르고 끓이기 시작했다. 레이첵은 온몸에 힘이 빠져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이윽고 과부는 뭔가를 끓인 물을 침대 곁으로 가지고 와서 식혔다. 레이첵은 벌벌 떨면서 과부가 먹여 주는 약을 조금씩 삼켰다.
밖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과부는 하루 일을 시작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두막 문도 밖에서 걸어 잠그고 가 버렸다. 과부가 마당의 사당 문을 열고 수호령님께 바치는 물그릇에 물을 붓는 소리가 들렸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