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편지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사당 문이 다시 닫히고 과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레이첵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이첵은 다락방으로 달려가 자물쇠를 열어 보려고 했으나 과부가 없는 살림에 자물쇠는 어찌나 좋은 걸 샀는지 무슨 짓을 해도 열리지 않았다.
“선생님!” 레이첵은 작은 소리로 다락방 문틈에 대고 불렀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총각!”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니 생각보다 멀쩡한 것 같았다. “그 여편네는 나갔나?”
“밖에 나갔어요. 그런데 집 문도 잠그고 갔어요.”
“자네가 나 좀 살려줘야겠어! 이대로 있다가는 저 여편네가 풀 베는 낫으로 날 찍어 죽이고 말 걸세!”
“제가 어떻게요? 저도 죽일 것 같은데요 이대로면?”
“자넨 저 여편네 서방이니까 안 죽이지 이 사람아!” 의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밤에 왕진을 다니는 게 아닌데… 의료인으로서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데 미친 과부 여편네의 손에 허무하게 죽겠구나…”
레이첵은 의사가 자신을 저 여편네 서방이라고 부른 게 기분이 나빠서 “선생님은 살만큼 사셨지만 전 인제 스물이라구요! 미친 아줌마 남편 노릇하면서 모르는 동네에서 한평생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하고 울먹였다.
“그럼 깨끗하게 자결하게나. 살아나갈 용기도 딱히 없어 보이니 그럼 길은 하나뿐이겠구만.”
레이첵은 뭐 저런 의사가 다 있나 생각했지만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일단은 의사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레이첵과 의사는 문틈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해가 떠오르자 과부가 밭일을 하다 말고 아침을 차리러 돌아왔다.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를 듣자 레이첵은 재빨리 침대에 누워 끙끙 앓는 척했다.
“여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과부가 기겁을 해서 침대로 다가왔다. “아니, 의사한테 보였는데 왜 더 아프지?”
의사의 말대로 화로에 뜨겁게 데운 물수건을 이마와 목에 올려놓았었기 때문에 과부가 레이첵의 이마를 짚었을 때에는 열이 나며 앓는 것처럼 보였다. 과부는 당장 다락방 자물쇠를 풀고 의사의 멱살을 잡아 침대 곁으로 끌고 갔다.
“돌팔이 영감탱 같으니라구.” 과부는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내 서방 잘못돼서 죽으면 한 시간 내로 뒤따라갈 줄 아쇼!”
“이놈의 여편네가 한밤중에 왕진 와달래서 쉬지도 못하고 와줬더니 뭐가 어째?” 의사는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의사는 뭐 맨손으로 치료하는 줄 아나? 들고 온 것도 저 왕진가방 하나고 약도 다 진료소에 있는데 나를 여기다 가둬놓고 어떻게 치료를 하라는 건가?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지만 난 자네가 급히 와달라고 해서 방앗간 아들 치료하고 바로 달려온 몸일세!”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 과부가 말했다. “그럼 뭐가 필요한지 적어 주시구랴! 내가 선생 집에 가서 가지고 오겠소.”
의사의 진료소로 치료하러 같이 가게 될 줄 알았던 레이첵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의사는 태연하게 왕진가방에서 처방전 쓰는 종이를 꺼내 뭔가를 잔뜩 써서 과부에게 건네주었다.
과부가 다시 의사를 다락방에 가둔 다음 진료소에 다녀온다며 나가버리자, 의사는 자신만만하게 다락방 안에서 레이첵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마누라가 사람들을 데리고 구하러 올 걸세!”
“그치만 아까 그 종이에 구해달라고 써놓은 걸 보면 아줌마가 가만 안 둘 텐데요.” 레이첵이 말했다.
“이 사람아! 암호로 적었지! 우리 마누라는 머리가 잘 돌아가니 아마 알아보고 찾아올 걸세.”
그러나 점심때가 다 되어 돌아온 과부는 묵직한 가방을 들고 들어와 오두막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선생 마누라가 집에 없길래 내가 일단 아무거나 챙겨왔수다! 뭐 빠진 거 있음 다시 얘기하쇼. 금방 다녀올 테니…”
레이첵은 실망으로 한숨을 쉬었다. 의사는 얼굴이 벌개져서 “누가 남의 진료실을 함부로 뒤지라고 했나! 기다려서 다 받아갖고 왔어야지!”하고 버럭 소리쳤다.
과부는 약간 움찔했다. “내일 다시 댕겨오면 될 거 아니우! 난 선생 마누라가 너무 오래 안 오길래 그동안 우리 서방 더 아플까 봐 빨리 돌아온 건데 너무 그러지 마슈.”
의사도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과부는 서둘러 레이첵에게 점심을 먹인 다음, 레이첵이 남긴 음식은 의사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의사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첵은 곰곰 생각했다. 의사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 마당에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역시 과부가 남편이 드디어 돌아왔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러 나가는 날만 기다려야 하나? 그러나 과부가 레이첵을 평생 집 안에 가둬놓을 가능성도 있었다.
과부가 레이첵의 치료를 위해 의사를 잠시 다락방에서 꺼내 주었기 때문에 의사와 레이첵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의사는 레이첵이 폐에 물이 찼을 수 있으므로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과부는 의사의 말을 받아들여 레이첵을 부축해서 안마당과 집 근처를 걷게 했다. 레이첵은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집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집 밖을 지나가는 동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레이첵이 침대로 돌아와 보니 베개 밑에 의사가 두 사람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넣어놓은, 쿠젤 강과 여울과 라피드 쉬르쿠젤 마을, 그리고 과부의 집 위치를 그린 종이가 들어 있었다. 과부가 소 여물 주러 나간 사이에 그 종이를 본 레이첵은 세라비와 레이도 이 근처 어딘가에 구조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레이첵은 눈을 질끈 감고 만약 이럴 때 세라비 누나나 레이 형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누나라면 분명히 고대의 검을 들고 진작 과부와 결투를 벌여 처단했을 것이다. 이쪽은 레이첵이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레이 형님이라면 파괴 마법으로 과부의 집은 물론 레이첵을 노려본 염소가 있는 외양간까지 싹 다 부숴버리고 탈출했을 것이었다. 그것도 역시 자신이 죽었다 깨도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레이첵은 아무 재주도 없는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고 또 탓했다. 레이 형님처럼 말도 잘하고 사람들을 잘 구워삶을 줄 안다면 마법을 쓸 줄 몰라도 어떻게든 탈출했을 텐데!
레이첵은 과부를 구워삶아 탈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고 여러 번 머릿속으로 연습해 보았다. 다음날 과부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레이첵은 차분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서 과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보, 몸은 좀 어때? 영감탱이 준 새 약 먹으니까 좀 괜찮아?”
이렇게 묻고 침대 곁에 둔 의자 위에 털썩 걸터앉은 과부는 레이첵이 “당신 덕분에 금방 나을 것 같아.”라는 대답하는 것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여보!” 과부는 의자에서 튀어 일어났다. “드디어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점점 돌아오고 있어. 내일이면 마을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마을에는 왜?” 과부가 의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내가 돌아왔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야지. 이장님도 만나고 무녀님도 만나고. 우리 옛날에 염색공방에 맡겼던 내 옷이 안 보이던데 혹시 찾아왔어?”
과부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레이첵을 쳐다보았다. 염색공방 얘기는 의사가 다락방 문틈으로 말해준, 이 집 서방이 죽기 전에 염색공방에 옷 맡긴 게 있는데 양심 없는 공방 주인이 그가 죽어서 과부가 정신없는 틈을 타 몰래 다른 데 팔아먹었다는 얘기를 생각해 내고 한 말이었다.
“여보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과부는 그 일이 벌써 십 년 전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내일 당장 가서 찾아올게!”
레이첵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부는 남편이 기억이 돌아왔다는 기쁨에 레이첵의 두 손을 잡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과부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레이첵을 마을에 데려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레이첵은 자기 거짓말이 티 났나 싶어 불안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왜냐고 물었다.
“당신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마을처럼 먼 곳에 가면 안 될 것 같아. 일 년 정도 푹 쉬고 그 후에 나가면 어때?”
뭐, 일 년? 레이첵은 속으로 의사처럼 이놈의 여편네가 돌았나, 하고 욕을 했다.
“수호령님께서 돌려보내 주신 나를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건 아니겠지?”
과부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그냥 당신이 꼭 마을에 나가야 하나 해서… 그냥 여기서 우리끼리 잘 살아도 되지 않아?”
레이첵은 이를 꽉 깨물고 속으로 ‘나는 마법사 레이다! 나는 마법사 레이다! 나는 마법사 레이다!’하고 외친 다음, 과부를 향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야 당신하고 같이 여기서만 살아도 좋지. 하지만 수호령님한테 거소 신고는 해야 하거든? 그러려면 무녀님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뭔데?” 과부가 물었다.
“원래 일주일 안에 수호령님의 전령을 통해 어디 정착했는지 알려야 하잖아?”하고 레이첵은 뭐 그런 것도 몰랐냐는 듯이 과부에게 말했다. “안 그러면 자리 못 잡은 걸로 알고 다시 돌려보내지는데… 어렵게 다시 왔는데 다시 헤어지면 안 되잖아…?”
말을 마친 레이첵은 이를 꽉 깨물고, 과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부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당장 오늘 무녀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레이첵이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며 자기 혼자 다녀오겠다고 고집했다. 레이첵은 속으로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같이 가겠다고 우기면 과부가 의심할 것 같아서, 대신 수호령님께 전달할 편지를 써놓을 테니 무녀님께 전해 달라고 했다.
오후 일을 마치고 다시 집에 돌아온 과부는 레이첵이 내민 편지를 보고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은 딱 봐도 신성해 보이는 양피지에 푸르게 빛나는 글씨로 쓰인 편지였다.
“이런 게 어디서 났어?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과부는 경이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편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렇게 신성한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어?”
레이첵은 마치 신의 전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과부를 내려다보았다.
“모두 수호령님의 뜻이야.”
레이첵은 속으로 다시 ‘나는 마법사 레이다!’를 세 번 외친 다음, 일부러 큰 동작으로 예전에 이카레이유에서 레이가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신을 경외하는 몸짓을 지어 보였다. 과부는 예언의 문서라도 본 듯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그리고는 금방 다녀오겠다며 그녀가 일 년에 한 번 수호령님을 모시는 축제에 갈 때만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편지를 소중히 넣었다.
과부가 사라지자, 레이첵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긴장으로 목 뒤에 땀이 배어 나왔다. 과부에게 들려 보낸 편지의 종이는 과부가 일 나간 사이에 의사의 왕진가방에서 꺼낸 처방전 종이 여러 장을 겹쳐 난로의 고운 재와 의사의 가방에 들어있던 약초가루를 갠 물에 적셨다가 조금씩 두들기며 난롯불에 말려 양피지처럼 만든 것이었다. 레이첵은 집 안에 있는 나무열매 짓이긴 즙에 의사 진료가방에서 꺼낸 소화제 가루와 감자전분을 섞어서 잉크도 만들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수호령님의 은혜에 감읍하며 이 편지를 전합니다. 저는 수호령님의 자애로 십 년 전 헤어진 아내를 무사히 만나 라피드 쉬르쿠젤의 제 집인 밤나무집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예정된 기간 안에 수호령님께 보고 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무녀님을 직접 뵙고 축복의 말씀을 들으러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나,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이렇게 아내의 손을 빌려 전언드리게 됨을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절차에 따라, 이 편지를 받으시면 즉시 쿠젤 강 중류 지방 담당이신 *세라비 세르비카* 전령님께 이 편지를 보이시고 저의 정착을 수호령님께 전달해 주시도록 요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몸이 회복되는 대로 무녀님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라도 다음 주까지도 몸이 낫지 않아 수호령님께 예를 다할 수 없게 된다면 수호령님의 즉각적인 축복이 필요하니 번거로우시더라도 친히 방문해 주실 것을 감히 요청드리옵니다.
브뤼메에서 파렌베르크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쿠젤 강의 너그러움과 여울을 지키는 수호령님의 자애로움이 만방에 퍼지기를 빕니다.』
마지막에는 의사에게 과부의 남편 이름을 물어보아 서명까지 만들어 넣었다.
과부가 세라비의 이름을 알게 되면 마을에서 어떤 짓을 할지 예측이 되지 않아, 레이첵은 과부가 못 알아보도록 일부러 *세라비 세르비카*라는 이름 부분만 법전이나 공문서 등에 쓰는 현대 알티스 문자로 적었다. 아마도 마을에 무녀가 있다면 기도문이나 의식에 사용되는 문서를 읽을 줄 알 테니 세라비의 이름을 알아볼 것이다. 설령 세라비가 이 마을에 없다 해도, 무녀가 과부처럼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이 편지를 읽고 적어도 이것을 쓴 사람은 과부의 남편이 아니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온 사람임을 눈치챌 것이다. 누구든, 과부의 집에 이런 공문서 같은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만 해도 레이첵이 탈출할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