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강해지고 싶어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한편 과부는 편지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가서 무녀의 집을 찾아갔다. 수호령을 모시는 큰 사당과 붙어있는 무녀의 집은 마을 중앙에 있었으며 아델린 드몽의 장의사 바로 맞은편이었다.
무녀는 집에 없었다. 의식에 쓰는 물건들을 가지러 사당에 와 있던 장의사 직원이 무녀님은 물귀신 여울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고 알려 주었다.
“지금 물귀신 여울에 가는 길인데, 저랑 같이 가실라우?” 장의사 직원이 물었다.
“내가 집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그렇수!” 과부가 발을 구르며 안타까운 듯이 외쳤다.
그 집 과부 없을 땐 허구한 날 비어 있지 않나…? 하고 장의사 직원은 생각했지만 곧 과부가 부탁하는 대로 편지 하나를 반드시, 무조건, 오늘 안으로, 도착하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무녀님께 전달할 것을 조상님과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대체 뭔데 저러지?”
장의사 직원은 수상쩍게 생각하고 여울에 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아델린 드몽이 돌아오자 편지를 보이고 과부가 왔다 간 일을 설명했다. 마을의 치안 담당 겸 해결사 비슷한 역할도 하고 있던 아델린은 마을 의사의 마누라가 찾아와서 남편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것 같다며 이 인간을 당장 찾아서 다리를 부러뜨리든 눈알을 뽑든 해 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것을 겨우 달래 놓고 오는 길이었다.
아델린 드몽은 과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아델린은 과부를 가엾이 여기고 있었으므로 만약 뒤늦게라도 그녀의 남편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돈도 안 받고 장례를 치러 줄 의향도 있었다. 물론 십 년 후에도 시체가 발견된다면 말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과부가 완전히 실성해서 자기 서방이 드디어 돌아왔다고 한다던데, 무녀님은 왜 보자고 하는 것일까? 아델린은 무녀에게 가는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뜯어서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장의사 직원들의 박수갈채 속에 멋지게 말 위에 올라타고 물귀신 여울로 향했다.
입이 가벼운 의사 덕분에 과부가 제대로 실성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과부를 보고 제각기 한 마디씩 했다.
“밤나무댁! 요새 무슨 일 있다며?”
과부는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나보고 정신 나갔다고 뒤에서 욕하는 거 다 들었다 이 못된 인간들아. 남편 없이 혼자 농사짓고 산다고 종자 나눠줄 때도 혼자 다 못 심을 거라며 적게 줬던 거 내가 모를까 봐? 댁들은 곧 내가 너무 부러운 나머지 마을 끝에서 강둑까지 배 아파 굴러다닐 일만 남았다.
그러나 과부의 속마음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과부에게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이 여편네야!” 와 같은 소리들만 해댔다. 참다못한 과부는 “수호령님이 우리 서방을 돌려보내 주셔서 방금 거수… 아니 거소 신고 하고 오는 길이야!”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이 말에 마을 사람들은 아이고아이고 저걸 어쩌냐 저 여편네 진짜 제대로 실성했네… 하고 크게 수군대기 시작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과부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첵은 과부가 분노에 차서 돌아온 것을 보고 ‘아, 망했구나.’하고 생각했다.
“네가 나를 속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게 했어!” 과부가 소리쳤다. “너도 저 영감탱도 모두 없애 버리고 말겠다. 영감탱은 어디 있지?”
과부는 다락방 자물쇠를 풀고 의사를 끌어냈다. 레이첵에게 연기 잘한다고 칭찬하며 이제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다고 희망을 품고 있던 의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과부에게 덤벼들었다. “미칠 거면 곱게 미쳐야지, 사람을 납치하고 가두고… 자네 진짜 어쩌려고 이래!”
과부가 먹을 것도 거의 주지 않아 힘도 없었던 의사는 과부의 업어치기 한 방에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과부를 말리려고 달려들었던 레이첵도 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첵은 비틀거리면서도 재빨리 일어나 과부의 두 팔을 잡고 소리쳤다.
“당신은 믿음이 그렇게 없어?”
과부는 믿음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레이첵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십 년을 믿으면서 기다렸는데, 반나절 만에 동네 사람들한테 무슨 소리 좀 들었다고 그새 이렇게 된 거야? 당신 믿음은 그 정도밖에 안돼?”
레이의 두 손에 잡힌 과부의 팔에 힘이 빠졌다. 레이첵은 의사에게 달려가 부축해서 일으켰다.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오래 못 살아남겠는걸.’하고 레이는 생각했다.
과부는 레이첵의 호통에 한동안 조용해져서 수호령님의 사당에 가서 절을 몇 번 하더니, 갑자기 집으로 돌아와 그의 두 손을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는 레이첵을 사당으로 밀어 넣고 “내 믿음을 위해 수호령님께 기도드려.”라고 짧게 말한 다음 사당 문을 닫았다.
레이첵은 당황했다. 아마도 과부는 의사와 레이첵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안 된다고 여긴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을 사당에 가둬 놓은 다음 의사를 죽이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당에는 창문이 없었다. 레이첵은 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밤이라 어두웠으므로 과부의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이첵은 문을 열려고 해 보았지만 과부가 문 손잡이를 바깥에서 밧줄로 감아 놓아 열리지 않았다.
레이첵은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사당 안에는 수호령님께 맑은 물을 바치는 큰 물그릇과 가루로 된 향을 담는 작은 단지, 그리고 향을 뜰 때 쓰는 물결무늬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레이첵은 손은 묶여 있었지만 손가락은 자유로웠으므로 숟가락을 집어 들고 문 틈으로 살짝 밀어 넣어 보았다.
레이첵은 과부가 한밤중에 갑자기 사당으로 오지 않기만을 빌며 오랜 시간 동안 문 틈으로 밀어 넣은 청동 숟가락 끝으로 문고리를 감고 있는 밧줄을 갉아냈다. 해가 뜨면 과부가 밭일 나가기 전에 수호령님께 절하러 사당에 올 것이므로 해가 뜨기 전에 이 밧줄을 모두 잘라내야 했다. 자유롭지 않은 손으로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려니 손목에 밧줄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마침내 먼동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올 무렵, 레이첵은 밧줄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사당 문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지만, 과부의 집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레이첵은 소나 염소가 음메라던가 매에 소리를 내어 과부를 깨우지 않기만을 빌며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흐르는 과부네 집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과부가 마을로 갈 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는 봐 두었으므로 레이첵은 그쪽으로 향했다. 너무나 조용한 새벽녘의 오솔길에서 레이첵의 발소리는 너무나 크게 들렸다. 조금만 있으면 과부가 잠에서 깨어 사당으로 향할 거였다. 해가 뜨기 전까지 마을에 도착해야 했다.
레이첵은 과부의 집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이 들자 달리기 시작했다. 동녘 하늘이 밝아졌다. 레이첵은 미친개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돌담을 두른 초가집 몇 채가 나타났다. 드디어 마을이었다. 레이첵은 과부가 뒤를 쫓아오고 있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일단 제일 먼저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는 모양인지 담장 안은 조용했다. 레이첵은 “도와주세요!”하고 집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낡아빠진 문이 열리며 흰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레이첵은 긴장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빨리 뛰었더니 숨이 차서 어지러웠다.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가 레이첵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레이첵은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 손에서 피나는데요?” 소녀가 레이첵의 밧줄로 감긴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른은 안 계시니?” 레이첵은 소녀에게 묻고 나서 이 집이 군데군데 헐어 있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임을 알아차렸다.
소녀는 대답 대신 당연한 것처럼 레이첵의 손에서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아픔으로 레이첵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자 상처에 뭔가를 발라 주었다. 진흙덩어리 같았지만 상처에 얹자 갑자기 시원해지며 통증이 가라앉았다.
“이거 뭐야? 진짜 좋은 약인가 보다.”
“아저씨, 그런데 왜 도망 다녀요? 죄 지었어요?” 소녀가 물었다.
너무 직설적인 소녀의 질문에 레이첵은 목에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고, 미친 과부에게 감금되어 평생을 과부의 남편 노릇을 하며 살 뻔했다. 이런 얘기를 누가 믿어줄까? 며칠 동안 너무나 무서운 일을 겪었던 레이첵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어른인데 아이 앞에서 우는 걸 보이면 안 되겠지? 하고 레이첵은 겨우 울음이 터지는 것을 삼켰다.
“난 감금당했단다.” 레이첵은 소녀에게 말했다. “며칠 동안 갇혀 있었어. 지금 그 집에는 의사 아저씨도 있어. 빨리 구하지 않으면 그 아저씨는 죽을지도 몰라… 어서 어른을 불러 줄래?”
“그랬군요.” 불러달라는 어른은 불러주지도 않고 소녀가 말했다. “왜 빨리 도망치지 않았어요?”
레이첵은 말문이 막혔다. 과부가 문을 잠그고 못 나가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라비 누나나 레이 형님이라면 아마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첵은 여행 중 내내 그들이 이끄는 대로, 그들이 지켜주는 대로 열심히 필기만 하며 따라다녔으므로 처음으로 혼자 떨어진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쇠약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강했다면 과부와 몸싸움을 해서라도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이 형님 흉내를 내고 신성한 편지를 써서 과부를 속이긴 했지만, 결국 효과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목숨을 걸고 과부와 싸우거나 도망칠 용기조차도 레이첵에게는 없었다.
“왜 그래요 아저씨?”
“아무것도 아니야…” 레이첵은 비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저씨,” 소녀가 부르며 레이첵의 손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그는 손목에 났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깨끗이 아문 것을 깨달았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소원하는 게 있어요?”
허름한 오두막에서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몸을 숨겨달라고 찾아온 청년에게 소원을 묻는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나 고양이가 안녕하시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악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이 무너진 지붕의 작은 틈새로 하나씩 스며들며 소녀가 입고 있는 몽롱한 하얀 긴 옷에 무늬를 만들고 있는 컴컴한 오두막 구석에서는 간혹 있을 수도 있는 일처럼 여겨졌다.
레이첵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난 강해지고 싶어.”
“지금은 약해요?” 소녀가 다시 물었다.
“남을 도와줄 정도까진 아니어도… 나 하나만이라도 지킬 만큼은 강해졌으면 좋겠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강해지도록 내가 도와줄게요.” 말을 마친 소녀는 이제는 다 아물어 감각이 뚜렷한 레이첵의 손을 잡았고, 그는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잠이 들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