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시 파렌베르크로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저 집입니다!”
장의사 직원이 가리킨 집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 아래의 자그마한 집이었다. 막상 와 보니 라피드 쉬르쿠젤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이어서 세라비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집은 불길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델린 드몽과 세라비와 레이는 조심스럽게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외양간 안에서 날카롭게 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염소로군요!”
갑자기 집 안쪽에서 쿠당탕 하고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이어서 아우성치는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아델린 드몽이 달려가서 문을 홱 열어젖혔다.
집 안은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가 모두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과부에게 멱살을 잡힌 가련한 의사의 모습이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드러났다.
과부는 아델린 드몽과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세라비와 레이를 보더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놈들이 내 서방을 훔쳐갔구나!”
“아이고 이놈의 여편네야 이젠 다 끝났어!” 멱살을 잡힌 채로 의사가 소리쳤다. “아델린 님 오셨다고!”
“사람을 무단으로 감금하다니! 라피드 쉬르쿠젤의 치안 담당인 내가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체포하겠다!”하고 평소에 제문을 읽어 낭랑하기 짝이 없는 아델린 드몽의 목소리가 상쾌한 아침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무슨 염소 짖는 소리만도 못한 얘기들을 하고 있어!” 과부는 의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손에 들고 있던 풀 베는 낫을 휘두르며 아델린 드몽에게 덤벼들었다. 뒤따라 들어온 장의사 직원들이 “드몽 님! 조심하십시오!”하며 과부의 앞을 막아섰다. 아델린 드몽은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훌륭한 장식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장의사 직원들의 박수 소리를 뒤로하고 세라비는 레이와 함께 과부의 집 안을 뒤졌다. 의사가 갇혀있던 다락과 헛간, 마당의 수호령 사당, 건초 더미, 침대 밑, 굴뚝 속, 그리고 여전히 기분 나쁜 눈초리를 하고 있는 염소와 소가 있는 외양간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레이첵은 없었다.
“저 여자가 레이첵을 죽인 거야!” 세라비는 절망해서 울부짖었다. 하지만 레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부가 “네놈들이 내 서방을 훔쳐갔구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핏자국이 있어요!” 레이가 사당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르비카 군은 여기 갇혀 있다가 도망친 것 같아요!”
과부의 집으로 올 때는 급하게 달려오느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 과부의 집 앞으로 난 오솔길에 희미하게 발자국이 보였다. 핏방울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세라비는 덜컥 겁이 났다. “피를 흘리면서 도망친 거야?”
과부의 집 안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터지는 것을 보니 아델린 드몽이 과부를 제압한 모양이었다. 세라비와 레이는 장의사 직원들이 타고 왔던 말을 타고 마을 쪽으로 달렸다.
마을 입구에 쓸쓸하게 서 있는 초가집 몇 채 앞에서 그들은 말을 세웠다.
“여기는 집도 몇 채 없으니 마을로 더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레이가 물었다.
세라비는 직감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놈은 겁이 많아서 우선 보이는 집부터 들어가서 도움을 청했을 거야. 바보 같은 놈! 그냥 바로 마을로 갔으면 우리랑 오는 길에 마주쳤을 수도 있는데…”
세라비는 예닐곱 채 되는 근처의 집 문을 죄다 두드려 사람들을 깨워 불러 모았다. 사람들은 일부는 화를 내고 일부는 놀라며 밖으로 나왔다.
“세라비 님, 이렇게 다 불러낼 필요가 있어요?” 레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라비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이렇게 생긴 젊은 남자가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좀 찾아봐 주시면 소정의 사례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불신에 찬 표정으로 세라비를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자 한 아저씨가 “소정의 사례가 구체적으로 뭐요?”하고 물었다.
“아, 그건…” 세라비는 우물쭈물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한층 짙어졌다.
“아무것도 줄 거 없으믄서 그딴 소리 하는 거 아니여?”하고 다른 아저씨가 뒤쪽에서 외쳤다. 그러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라비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레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시는 선생님은 아무튼 목격하긴 하신 건가요? 거짓 제보에는 벌금이 따르는 것은 알고 계시죠! 저희는 마을의 치안 담당인 아델린 드몽 님의 대리인들이니까 엉터리 제보를 하시면 법에 따라 벌금이 부과됩니다!”
레이는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암튼 그짓말 아니면 뭔가 주긴 주는겨?”하고 처음에 말한 아저씨가 물었다. 옆에 있던 아줌마가 아저씨의 소매를 잡아끌며 “뭔 소리 하는 거유! 그짓말 하면 벌금 문다잖아!”하고 속삭였다.
“아녀! 나 아까 담배 피우러 잠깐 나왔다가 누가 저 집에 들어가는 거 봤다고!”
아저씨가 가리키는 집을 보고 사람들이 허억 하고 놀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들어가면 안 되는 집인 것 같았다. “아이고 이 양반아! 저 흉갓집에 들어가긴 누가 들어간단 말유! 헛것을 보고 이러나배!”하고 아줌마는 벌금 생각에 바닥에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세라비는 흉갓집이라고 불린 그 집을 바라보았다. 대문과 담장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집은 허물어진 지 꽤 되어 보였다. 반쯤 무너진 집의 외벽에는 덩굴이 무성했고 부러진 우산살 같은 지붕과 벽돌이 튀어나온 벽의 몰골은 영락없는 흉갓집이었다.
“바보 같은 놈이 하고많은 집들 중에 고른다는 게 하필이면 흉갓집이냐…” 세라비는 중얼거렸다.
“저 집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없지 않아요?” 레이가 옆에서 물었다.
“누나로서의 직감이다. 가보자!”하고 세라비는 달려갔다. 레이도 뒤따라갔다. 마을 사람들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우르르 따라 들어갔다.
“레이!” 세라비는 큰 소리로 부르며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한쪽 외벽에서 흙이 우르르 떨어졌다.
“레이!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어서 나와!” 세라비는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워쩐다냐 범죄자인갑네…”하며 웅성거렸다.
다른 외벽에서 흙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인제 클났셔! 시끄럽다고 수호령님이 화내겠셔!” 할머니 하나가 말했다.
눈같이 흰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날쌔게 지붕으로 올라가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재빨리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기 있어요!” 레이가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세라비는 그쪽을 바라보고 숨이 멎을 뻔했다.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한 레이첵이 건초 위에 누워 편안히 자고 있었다.
세라비는 레이첵 곁에 꿇어앉았다. 레이는 “세라비 님… 너무 편안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못하시는군요!”하고 감격에 차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세라비는 레이첵을 있는 힘을 다 해 꼬집었다. 레이첵은 아픔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누나.” 레이첵이 입을 열었다.
“범죄자 아냐? 범죄자 아냐?”하고 마을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세라비가 엉엉 우는 소리가 다 쓰러져 가는 흉갓집 안에 울려 퍼졌다. 세라비가 저렇게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레이는 처음 보았다.
아델린 드몽이 별채로 찾아왔을 때 레이첵은 세라비의 방 침대에 누워 다시 찾은 기록장을 읽고 있었다.
“역시 종이는 좋은 걸 쓰고 봐야 해요.” 레이첵이 기록장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실용 기록지라 방수처리가 되어 있으니 물에 떠내려와도 상한 데가 거의 없네요!”
“넌 내 안부는 안 물어보고 기록장부터 챙기냐?” 세라비는 침대에 누워있는 사촌을 툭 치며 말했다. “네 눈엔 내가 종이만도 못하냐? 그리고 헤엄치는 거 배우라고 내가 그렇게 얘기를 했을 때 좀 들었어야지!”
아델린 드몽은 안심한 듯 멋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세라비에게 파렌베르크로 타고 갈 마차가 준비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우리 마을에서 안 좋은 일을 당하셨으니, 제 책임입니다.” 예술적인 장의사 아델린 드몽은 이렇게 말하고는 마차를 몰고 같이 가줄 장의사 직원까지 붙여 주었다.
며칠 더 빨리 파렌베르크로 가려고 배까지 사서 강을 탔다가 라피드 쉬르쿠젤에 며칠이나 발이 묶여 버렸던 세라비 일행은 드디어 게로스 왕이 있는 파렌베르크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출발을 더 미루지 않고 바로 다음날 아델린 드몽과 무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파렌베르크로 출발했다.
“자네 생각보다 재미있는 친구더구만! 나중에 우리 마을에 또 들리게 되면 술이나 같이 한 잔 하세.” 의사가 레이첵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레이첵은 살아생전 다시는 이 마을에 올 생각은 없었지만, 그러겠다고 하고 의사와 힘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마부석에 앉은 장의사 직원이 고삐를 털었다. 마차는 파렌베르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과부는 2명의 마을 주민(한 명은 외지인이다)에 대한 감금과 상해죄로 감옥에 갇혔다. 아델린 드몽은 과부를 체포하긴 하였으나, 재판에 넘길 때에는 정신이상을 이유로 들어 선처를 요청했다.
과부는 감옥에 얼마간 갇혀 있다가, 군용 천막을 만드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일손이 모자라서 노역형을 사는 범죄자도 돈 벌러 온 노동자들도 다들 서로 말 한마디 주고받을 시간 없이 바삐 일했다. 과부는 모든 잡념을 잊게 해 주는 노동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과부는 손이 빠르고 손재주도 좋았기 때문에 군용 천막에 이어 군복과 방한용 외투를 만드는 일도 맡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난민 수용 시설에 들어가는 천막과 담요 등을 만드는 곳으로 보내졌다. 과부는 점점 실력을 인정받아 형기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날 아침, 과부는 아무도 몰래 라피드 쉬르쿠젤로 돌아왔다.
집이 폐허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과부는 집이 누군가 틈틈이 와서 돌본 듯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당에는 풀도 베어져 있고 헛간 문은 폭풍우에 날아가지 않도록 누군가가 나무를 덧대어 박아 놓았으며, 과부가 체포되던 날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세간살이들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외양간에는 ‘소와 염소는 방앗간 주인네 집에서 돌보고 있으니 돌아오면 찾으러 오시오’라고 쓰인 널빤지가 붙어 있었다.
집 안의 의자 위에는 웬 새 옷이 한 벌 곱게 개켜져 있었다. 옷 속에는 옛날 과부의 남편이 염색해 달라고 맡긴 옷을 몰래 팔아먹었던 염색공방 주인이 사기 쳐서 미안하다며 다시 오면 이 옷을 입고 마을로 오라고 짧게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과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그래도 라피드 쉬르쿠젤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과부는 집에서 며칠간 지내다가, 소와 염소를 판 돈과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들 중 가져갈 만한 것들을 챙겨, 돌아왔을 때처럼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과부는 데종으로 가서, 노역형 살 때 과부의 손재주를 눈여겨본 큰 포목상 주인이 건네준 주소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과부는 담요, 커튼, 식탁보 등을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과부는 솜씨가 좋고 우직하게 열심히 일했으므로 금방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나중엔 돈을 모아 작은 가게도 차렸다. 라피드 쉬르쿠젤에서 ‘이 여편네’ 혹은 ‘과부’라고만 불리던 그녀는 데종에서 살며 다시 자기 이름인 ‘마농 뒤랑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농 뒤랑스는 다시는 라피드 쉬르쿠젤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단골손님들이 수다를 떨다가 돌아간 조용한 가게 문을 닫고 바느질을 하거나 천을 재단할 때면, 마농은 맑은 물이 천천히 땅을 적시며 흐르는 강과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강둑, 울타리 밖으로 펼쳐진 채소밭, 그리고 밤나무 세 그루를 떠올리곤 했다.
원작에서의 1부가 원래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화인 38화부터가 원래의 2부에 해당됩니다.
드디어 그분(?)이 나오십니다. 기대해 주세요.
※ 레이첵은 원래 본인도 주변인도 레이라고 부릅니다. 혹시라도 세라비가 레이첵 찾으면서 왜 레이라고 부르는지 혹시 오타 아닌가 하시는 분은 레이첵이 처음 등장하는 6화를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