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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칼베르의 수도 파렌베르크는 세라비가 살면서 본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 포르트메르의 스칼하븐 병사들이 ‘칼베르는 지금 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어 있다’고 위협했을 때에는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이카리아도 지금 오스틴과 스칼하븐의 위협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인 만큼 게로스 왕이 있는 파렌베르크는 이미 오스틴이나 스칼하븐 군대가 왕궁을 에워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던 세라비는, 세상 어딘가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롭고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의 모습에 이질감과 위압감을 느꼈다. 쿠젤 강이 가로지르는 도시의 곳곳에는 잘 보존된 옛 건물들과 크고 화려한 새 건물들이 어울려 섞여 있고, 시민들의 옷차림은 부유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이카레이유도 오래된 건물 많은데, 여긴 더 많네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시내를 바라보며 레이첵이 말했다.
“원래 여긴 우리나라 수도였잖아? 이카레이유는 얘네한테 쫓겨나서 나중에 세운 데니까 당연히 여기가 더 오래되고 멋지지.” 세라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레이첵은 그 쫓겨난 것이 이미 2천 년도 더 전의 일이라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튼 굉장하네요. 여기가 전 세계 도시 중에 제일 클 것 같아요!” 레이첵이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스틴 수도 에이번홀트가 훨씬 커요.”
장의사 직원은 마차를 왕궁과 가까운 거리에 세워주었다. 세라비는 마차에서 내려 왕궁을 바라보고 숨을 삼켰다.
파렌베르크의 왕궁인 슐로스 루와얄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어 도시 어느 곳에서도 잘 보였다. 높은 성벽 위에 자리한 상아빛 궁전과 푸른 탑들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신비로운 빛을 띠며 빛났다. 이 왕궁에 살고 있는 그들의 왕은 다름 아닌 전 세계를 쑥밭으로 만들고도 고고하게 빛나고 있는 게로스였다.
모든 나라의 왕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백성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칼베르는 7년 전 게로스가 왕위에 오른 후로는 더욱 심화되어 있었다. 칼베르 국민들은 모두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왕을 사모하고 존경했으며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듯 우러러보고 섬겼다. 그것은 물론 게로스의 전설적인 외모가 한몫하기도 했지만, 그가 뛰어난 통치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두고 전쟁하는 와중에도 칼베르에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정교하게 조율할 줄도 알았다. 오스틴과 스칼하븐은 자기네 나라 공주를 왕비로 보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 년째 전쟁 중이었지만, 칼베르 국민들의 광신적인 게로스 숭배 정신을 파악한 후로는 자기네 나라 공주 이미지를 생각해서 게로스 왕에게 대놓고 협박을 가하지는 못했다.
“저긴… 어떻게 들어가야 하지?”
성은 언덕 위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철제와 흑단목으로 만든 거대한 성문 양쪽 탑에는 경비병들의 투구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성문과 이어진, 카를링겐 왕가의 문장과 세 수호신의 상징이 새겨진 아치 형태의 돌다리는 마치 하늘 위로 이어진 제단처럼 보였다.
“돌다리에 발 들이면 이카리아 사신이라고 말도 하기 전에 창에 찔려 죽을 것 같아.”
“가서 이카리아 사신이라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안될 것 같은데요.” 성 주변에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깨닫고 레이가 말했다. 세라비도 레이들도 모두 평민 차림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렌베르크 사람들은 머리색도 다양하고 눈 색깔도 참 다양하네.”하고 세라비는 신기한 듯이 말했다. “같은 칼베르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저쪽에 있는 개 산책시키는 아저씨는 오스틴 사람이고, 벤치에서 사과 먹고 있는 할머니는 스칼하븐이에요. 그리고 방금 우리 옆에 장바구니 들고 지나간 아줌마는 루스카 사람이고요.”
레이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있는 세라비와 레이첵을 끌어당겼다. “여기로는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일단 다른 데로 가죠.”
그나마 세라비와 레이첵이 너무 해맑은 얼굴로 성문을 바라보며 우와우와 하는 바람에 시골에서 올라온 관광객으로 보인다는 것이 다행이긴 했다. 레이는 두 사람을 데리고 그 자리를 재빨리 떠났다.
성벽 측면을 따라 난 거리에는 왕궁 뷰로 유명한 노천카페와 식당들이 모여 있었다. 임금님 계신 곳을 바라보며 차 한 잔 마시는 값은 꽤 비쌌다. 세라비는 아델린 드몽이 여비로 하라고 준 돈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누나, 이거 보세요. 창가랑 야외 자리는 메뉴판이 따로 있어요. 안쪽 테이블이랑 가격이 달라요.” 레이첵이 말했다.
“우리나라 왕궁도 예쁜데 이렇게까지는 안 하지 않나?” 세라비는 투덜거리며 찻잔을 들었다. “파렌베르크에 도착만 하면 저녁밥은 저 안에서 먹을 줄 알았더니 이게 웬일이람.”
주변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들은 대략 “폐하의 개인 처소는 어디어디쯤 있대.” 라든가 “매일 저녁 몇 시쯤 어디어디를 지나가신대.” 같은 얘기들뿐이었다.
“돌아가면 팔레 에클라 근처에서 카페나 차려야겠어요.”하고 레이첵이 속삭였다.
“우리나라 임금님은 외모가 좀 부족하신데, 안 되지 않을까?” 알현할 때 봤던 마르셀 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세라비가 말했다.
“플로르 왕자님이 자라면 좀 어떻게 안 될까요?”
레이는 세르비카 사촌 남매의 한가한 대화를 들으며 가슴을 쳤다. 그때 성벽에 난 측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측문 돌다리를 넘어 거리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레이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들을 지켜보다가, 그중 뭔가를 두 손 가득히 들고 있는 아주머니가 카페 옆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넘어지자 레이는 황급히 일어나 부축했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레이는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짐을 순식간에 자기 손으로 옮긴 다음 다른 손으로는 아주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이렇게 무거운 걸 혼자 들고 다니시다니, 제가 도와 드릴게요! 댁이 어디세요?“
아주머니는 “그거 빈 부대야 총각…”하고 대답했지만 어느새 레이의 팔을 붙잡고 따라가고 있었다. 레이와 아주머니가 어디론가 가 버리자 세라비는 사촌에게 속삭였다.
“지금 레이가 발 걸은 거 맞지?”
“네… 저도 봤어요.” 레이첵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레이가 카페로 돌아왔다. 어디 다녀왔냐고 묻기도 전에 레이는 씩 웃으며 세라비에게 말했다.
“자, 다 마셨으면 이제 일하러 가요.”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