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그날 저녁, 왕궁 동측 후문과 이어진 납품소를 지키던 경비병과 주방 하인은 밀가루 부대를 지고 온 세 명의 젊은이들을 맞이했다.
“대주방 창고까지 갖고 가야 한다고요?” 납품증(레이가 아주머니에게서 훔친)과 신분증(레이첵이 위조한)을 확인하며 주방 하인이 물었다.
“어제 요리장님께서 부탁하신 특제 발효 밀가루입니다.” 밝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 말했다. “다른 식재료들하고 같이 두면 다른 음식들도 같이 발효되기 때문에 대주방 창고에 따로 보관해야 한다고 어제 말씀 다 드렸다던데요!”
“누가요?” 하인이 물었다.
레이는 아까 집까지 바래다 드린 아주머니 이름을 댔다. “급하다고 빨리 갖다 드리라고 하셔서 오늘 바로 가지고 온 건데… 도로 가져갈까요?”
“아무 얘기 못 들었는데…” 하인이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다 두고 가시구랴. 사람 불러와서 가져가게 할 테니.”
“이건 요리장님을 뵙고 후숙하는 법을 알려 드려야 합니다.” 청년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되시면 경비병이랑 같이 보내주세요. 이러는 동안에도 계속 발효가 진행돼서 조금만 있으면 상해버린다니까요!”
주방 하인은 옆에 서 있던 경비병에게 눈짓을 했다. 경비병은 젊은이들에게 따라오라고 하고 안으로 안내했다.
대주방과 창고가 있는 부속채로 향하는, 수레 두 개가 나란히 지나갈 너비의 길을 밀가루 부대를 지고 걸어가던 세라비는 갑자기 어디선가 아련한 황금빛 광휘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부속채로 가는 길 양쪽에 늘어선 나무의 잎사귀들이 흔들리며 자연의 온갖 조화롭고 불공평한 혜택을 받은 고귀한 존재의 접근을 알리고 있었다.
본궁 뒤편의 중정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세라비의 눈에 들어왔다. 부속채와 중정은 거리가 멀었지만, 세라비는 무리 앞쪽에서 걷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마치 햇빛이 그에게만 내리쬐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높으신 분들인 듯한 사람들과 뭔가 전문적인 용어가 섞인 대화를 나누며, 산들바람과도 같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가슴이 떨리도록 우수에 젖은 응시를 쓸데없이 정원 어딘가에 뿌리며, 모든 국민의 소망이며 하늘의 태양, 카마, 로나와도 같은 광휘의 존재이자 정의할 수 없는 미의 결정체이며 집합체인 칼베르의 왕 게로스는 그렇게 세라비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광휘가 사라지고, 경비병의 재촉하는 소리에 세라비는 정신이 들었다. 게로스가 거기 나타났었는지 아니면 헛것을 본 건지도 순간적으로 헛갈릴 정도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레이첵마저 멍하니 서있는 것을 보면 게로스가 지나가긴 한 모양이었다.
세라비는 게로스와 대신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레이에게 속삭였다. “레이, 내 생전에 인간에게 폭력을 쓰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하지만…”
레이가 대답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죠.”
“고맙다.”
세라비는 고대의 검을 꺼내 묵직한 손잡이로 부속채를 향해 앞장서서 걷고 있던 경비병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경비병은 비슬비슬 쓰러졌다. 세라비와 레이는 밀가루 부대를 나무 뒤에 숨기고, 기절한 경비병을 나무 뒤 부드러운 땅 위에 뉘인 다음 부속채 건물 그늘 뒤로 재빨리 숨었다.
게로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레이첵이 속삭였다. “게로스 왕은 아마 저 테라스로 갔을 거예요.”
“네가 어떻게 알아?” 레이첵이 손으로 가리키는 외부로 열려 있는 테라스를 바라보며 세라비가 물었다.
“아까 카페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수정이 박힌 테라스에서 달구경을 하면서 차를 마신다고 했거든요. 오늘은 카마가 보름달이 되는 날이니까 분명히 거기로 갔을 거예요.”
세라비는 ‘얘 나름 쓸만해졌는데?’하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건물 그늘과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수정 테라스가 있는 건물까지 갔다.
입구에는 아까 납품소를 지키던 경비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섭게 생긴 경비병들이 둘이나 서 있었다. 세라비는 입구로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테라스 아래쪽 그늘에 숨었다.
“절대로 저 입구로 못 들어간다면, 벽이라도 타고 올라가야겠다.” 세라비가 말했다. “하지만 이쪽에도 지키는 사람이 하나 있네…”
“어차피 대의를 위한 일이라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뭐가 중요하겠어요.” 레이가 말했다. 그러나 세라비가 망설이자, 레이는 망토 안에 숨겨서 등에 지고 있던 지팡이를 꺼내 테라스 밑을 지키던 경비병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자, 이제 됐어요!’” 레이가 말했다.
“잠깐만요!” 레이첵이 뭔가를 꺼내며 말했다. “여기만 올라가면 게로스인데, 이 차림으로 가면 안 되죠!”
레이첵이 부스럭거리며 품 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기나긴 여행 동안 산맥을 넘고 물에 떠내려가면서도 질기게 살아남은 이카리아의 사신 예복이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계셨던 모양인데,” 레이첵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만 올라가면 그다음부터는 정식 사신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잖아요? 그때 가서 옷 갈아입고 온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 입어야 해요!”
세라비는 사촌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꼴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말없이 망토를 벗고 그 위에 사신복을 걸쳐 입었다. 싫다고 할 줄 알았던 레이도 순순히 옷을 받아 걸쳤다.
정식 사신이 아니라 몰래 따라와서 자기 몫의 예복도 없고 건물 벽을 타는 것도 불가능한 레이첵은 테라스 밑에서 망을 보기로 하고, 세라비가 먼저 벽으로 올라가고 레이가 그 뒤를 따랐다. 게로스의 존엄하신 테라스는 3층에 있었다. 외벽은 우둘투둘하고 군데군데 장식이 튀어나와 있어 세라비는 이 정도 벽쯤이야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카리아의 전통 사신 예복은 몇 백 년의 전통을 고수하는 매우 아름다운 옷이었다. 대를 이어 왕실의 옷을 짓는 장인에 의해 섬세하게 짠 옷감에 절대 색깔이 빠지거나 변색되지 않는 염색공정을 거친, 거기에 이카리아의 클레르몽 왕가의 문장과 세 수호신의 상징, 그리고 역대 왕들의 이름을 각도와 치수까지 정확하게 새겨 넣은, 사신의 연례 방문 때 입는 간소화된 예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교하고 품위 있는 예복이었다.
그러나 벽을 타기에 적당한 옷은 아니었으므로 세라비는 몇 번이고 떨어질 뻔하며 겨우 벽을 기어올라 테라스 위의 난간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카마의 빛을 받아 테라스의 수정들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쿠젤 강 너머 몽베리스 산의 능선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게로스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카마가 보름달이 되어 떠오르는 그 하루만은 숨을 돌리며 정보국장 코린 벨몽과 총리대신 앙투안 마르시에 백작 등 측근 대신들과 함께 차를 마시곤 했다.
차의 향기가 공기 중에 맴돌고, 아직 희미하게 보라색이 남아있는 서쪽 하늘에는 별이 하나 둘 반짝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로스는 만족하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말 좋은 저녁입니다, 폐하. 참으로 평화…”하고 앙투안이 말한 순간, 쿵! 하고 세라비가 난간에서 테라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앙투안은 너무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코린은 테라스 안쪽을 향해 “침입자다!”하고 소리쳤다.
게로스만이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전혀 동요하는 빛 없이 침착해 보이도록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돌처럼 냉정하고 침착할지 몰라도, 이번만큼은 그도 꽤 놀랐다.
경비병들이 달려오고, 게로스가 찻잔 속 나머지 차를 마시는 가운데 앙투안이 어물거리면서 말했다.
“…로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세라비는 경비병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바닥에 떨어진 아픔도 잊고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며 막는 동작을 취했다.
“잠깐만요!”
경비병들이 순간 멈칫했다. 그 순간, 게로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이카리아 사신이시군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코린과 앙투안은 이카리아 사신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세라비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때, 세라비의 뒤를 이어 레이가 테라스 난간을 넘어왔다. 레이는 구겨진 옷자락을 펴고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게로스에게 답했다.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세라비는 이 모든 정황을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찌하여 게로스는 세라비가 이카리아의 사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어느 정보망에 걸려든 것인가? 게로스가 이미 알고 있다면 오스틴과 스칼하븐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카리아는 이미 망한 것일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카레이유의 정경이 세라비의 머릿속에 스쳐갔다.
그러나 현실은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게로스는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세라비가 입고 있는 요란한 옷을 눈여겨보았고 위해를 가하기에는 너무 불편한 옷임을 알아보았다. 게로스가 눈 깜짝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 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게로스 왕이 세라비의 복장이 이카리아의 사신복임을 금세 알아보았는가는 전적으로 게로스의 재빠른 잔머리 덕분이었다. 게로스가 이카리아의 전통 사신복을 본 것은 7년 전인 그의 대관식 때였다. 이카리아의 사신들은 평소에는 간소화된 예복을 입고 왔기 때문에 그는 대관식 이후로는 전통 사신복을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옷은 슐로스 루와얄 근처에서 감시의 눈을 불태우고 있는 스칼하븐이나 오스틴의 사신 예복은 아니었다. 그 옷이라면 게로스도 지겹도록 잘 알고 있었다.
게로스는 세라비가 테라스 바닥에 떨어져 구를 때 세라비의 요란한 의상에 새겨진 이카리아 선대 왕의 이름을 재빨리 눈여겨보았고, 이카리아가 처한 상황을 게로스도 잘 아는 만큼 이 희한한 방법으로 나타난 사람이 이카리아의 게으른 멍청이들(이카리아와 칼베르는 이웃한 나라인 만큼 서로를 놀리는 농담도 많았다)이 느지막이 보낸 사신일 거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이카리아가 고립된 지 반년쯤 됐으니… 이제 슬슬 사신이 올 때가 되긴 했군.’ 게로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는 땡그란 눈의 이카리아 사신을 보며 생각했다.
잠시 후, 밑에서 망을 보던 레이첵도 테라스로 올라왔으므로 세라비는 드디어 이카리아의 정식 사신으로써 칼베르의 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형제의 나라에 세 수호신의 보살핌이 있으시기를!” 세라비는 이카레이유에서부터 연습했던 인사말로 엄숙한 순간을 열었다.
“왕국에…” 여기까지 말한 세라비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 더듬거렸다.
게로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비 뒤에 서 있던 레이첵이 “평안… 평안이요 누나…”하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세라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게로스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비는 온몸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 젠장… 뭐더라…? 어제도 연습했는데…’
게로스가 참다못해 말했다. “…왕국에 평안과 번영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라비는 죽고 싶었다.
레이첵은 작은 소리로 “우리가 할 말을 저분이 대신하게 하면 어떡해요!”하고 속삭였고, 레이는 ‘아, 그냥 내가 할걸…’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귀빈용 별관으로 발을 옮기는 동안, 세라비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수백 번 되뇌며 이 나라 왕의 세상 온화하지만 자비 없어 보이는 미소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